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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독립운동유적(유근 묘)
독립운동가 석농 유근(1861 - 12921) 선생은 남궁억 등과 함께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때는 간부로 활동했다.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 관료들을 지면을 통해 비판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장지연이 체포되자 그의 뒤를 이어 황성신문의 사장으로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대한자강회 활동을 하는 한편, 신민회에서 역시 활동했다. 종교계에 있어서도 민족 종교 대종교가 창건되자 이에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는 조선 강제합병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3.1운동 이후 한성정부라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에는 언론계 원로로서 고문으로 추대되는 등 언론 활동을 지속하다가 1921년 서거하였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그의 추도식을 거행했다. 196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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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 추모비
유근(1861 - 1921)은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독립운동과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898년 황성신문이 창간할 때 주필, 논설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시일야방성대곡을 쓰다가 장지연 선생이 격분한 나머지 끝을 맺지 못하자 선생이 후반부를 마무리짓고 신문을 인쇄함으로써 한국언론사에 빛나는 논설의 탄생에 기여했다. 이후 1907년 황성신문 5대 사장으로 취임, 경술국치 직전까지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정신 함양에 노력했다. 1915년 중앙학교장에 취임, 민족경제 자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조직을 지원하다 배후자로 체포돼 곤욕을 치렀으며, 3·1운동 때는 한성정부를 수립하는데 「13도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동아일보 창간을 발의하면서 「동아일보」라는 제호를 짓기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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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각 집
남정각(1897 - 1967)은 호는 오산(午山)이며 이명(異名)은 영득(寧得·英得)이다.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출생하였다. 서울기독교청년회 공업과를 중퇴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20년 3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중국청년회(中國靑年會) 어학과를 다니다 중퇴, 창춘[長春]·톈진[天津]·상하이[上海] 등지에서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다 1922년 6월 항일 무력독립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행동대원으로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서울에 있던 김한(金翰)과 폭탄반입을 협의하였으나 자금부족으로 구하지 못하고, 1923년 2월 권정필(權正弼)·유시태(柳時泰)·유병하(柳秉夏) 등과 자금 마련을 위해 3차례에 걸쳐 서울 내자동(內資洞)의 부호 이인희(李麟熙)에게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하다 잠복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4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8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한 후 1929년 톈진으로 건너가 톈진교민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광복이 되자 교포의 귀국을 위해 노력하였고, 귀국 후에는 고려동지회(高麗同志會)에 가입하여 건국사업을 위해 활동하였다. 1967년 1월 29일 병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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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각 유허비
오산 남정각(1897 - 1967)의 생가 터이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 등지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해 장춘·텐진 등지를 순력하였다. 장춘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난 뒤 1922년 6월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에서는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와 요인을 암살하고자, 서울에 있던 김한과 김원봉 사이를 오가면서 폭탄의 수입준비를 진행하던 중 김한이 검거되어 폭탄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해 텐진으로 가 독립운동비용을 보충하기 위해서 동지 권정필·유시대·유병하와 협의한 뒤 권총을 휴대 서울 이인희 집에 찾아갔다가 잠복한 경찰에 붙잡혔다. 출감 후 다시 텐진으로 망명하여 텐진교민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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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수 묘
정철수(1924 - 1989)는 고려말기의 충신 정몽주의 대종손으로, 보성전문학교 3학년 재학 중 학도병으로 강제 징병되어 중국 산동성 지난에 배치되었지만, 동료 두 명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투항한 뒤, 항일투쟁 근거지인 태항산으로 가 조선의용군에 참여하였다. 이 때 이름을 고철로 고친 후, 조선 의용군 등에서 항일 무력 투쟁을 펼쳤다. 해방 이후 지린에서 조선중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취임하는 등 조선동포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그 후 1983년 한국방송공사(KBS)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통해 고국에서 노모가 애타게 찾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1985년에 아들을 데리고 영구 귀국하였다. 사후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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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묘
김윤식(1902 - 1950)은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강진으로 내려왔다. 고향 강진으로 내려가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준비 계획하다가 강진경찰서(康津警察署)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불복하고 공소(控所) 제기하여 무죄(無罪)를 선고받았으나 검사 측의 상고(上告) 제기 등을 거쳐 6월 9일 서울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무죄가 확정되었다. 2018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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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희옥 묘
하희옥(1890 - 1978)은 1914년부터 1945년까지 미주 대한인국민회 아크론지방회, 뉴욕지방회, 시카고지방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14년 8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 회원, 1917년 9월 대한인국민회 은행채 보상 발기자로 활동하고, 1918년 10월 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 식자기계 청장을 위해 동맹자를 모집하였으며, 1919년 1월 15일 오하이오주 아크론 지방회 설립 발기인 및 구제원, 1921년 뉴욕지방회 서기로 활동하였다. 1924년 12월 복설(復設)된 시카고지방회의 재무·부회장 등으로 1945년까지 활동하며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2015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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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자옥 묘
우자옥(1911 - 1966)은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1930년 1월 중순 함북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鏡城公立高等普通學校) 2학년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했는데, 격문과 깃발을 제작하는 한편 학생들을 독려하며 가두시위에 앞장서 거사일인 1월 25일에 2학년생 40여 명을 선발대로 이끌고 경성(鏡城) 서문 밖에 집합하여 동교생 300여 명과 함께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 시위대는 인근의 경성공립농업학교까지 행진하여 농업학교 학생들의 시위 참가를 촉구하는 한편 태극기를 건네준 뒤, 도처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를 제지하는 일경에 의해 시위대가 해산되고 시위의 앞장에 섰던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 일로 1930년 3월 6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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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사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외사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31일 용인군 외사면 주민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던 곳이다. 1919년 3월 31일 백암리를 비롯한 외사면 주민 3천여 명이 외사면사무소를 습격한 후, 헌병주재소까지 마저 습격하자 일제 헌병이 출동하여 발포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때 주민 1명이 죽고 여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백암리에서는 이외에도 4월 2일에 주민 50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했지만 해산당했고, 3일에도 시위운동을 벌이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되지 못하는 등 3·1운동의 열기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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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장터 경기지역 의병 활동지
백암장터 경기 지역 의병 활동지는 1907년 전후 경기지역 의병이 주로 활동했던 곳이다. 1906년 음력 2월 16일 죽산군수 남정면은 3~40명의 의병이 백암장으로 몰려온다며 군부에 지원을 요청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또 같은 해 12월 의병이 다시 나타나 장터에서 2,000냥을 빼앗아 달아나기도 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 직후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경기지역 의병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1907년 8월 12일 백암장에 전주의병이라 칭하는 50여 명의 의병이 나타나 일본인 1명을 총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9월 21일 일본군 나카하라(中原) 소대가 장호원에서 백암장으로 옮겨와 주둔하였다. 또한, 9월 13일 임옥여 의병이 백암장에 집결해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 각 1명씩을 총살하고 한국인 순사 1명을 생매장하였다. 1909년에도 5월 12일과 7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의병이 백암장에 출몰한 사실이 있었다. 백암장은 용인-이천과 죽산-안성 등지를 연결하는 주요 길목이었기 때문에, 경기지역 의병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것이다. 임옥여(1871~1907)는 경기도 용인 사람이다. 1907년 8월 이천창의소의 좌장이 되어 21일과 30일에 이천주재 일군 기병과 교전을 벌였으며 포군 12명을 인솔하고 광주군 실촌면에 이르러 다시 포군 70여명을 모집한 뒤 용인 굴암에서 일군과 접전을 벌였다. 같은 해 9월 14일에는 포군 18명을 인솔하여 양근, 안성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포군 36명을 인솔하고 죽산군 원일면으로 가 고초곡에서 일군과 교전을 벌였다. 이어 11월에는 광주군 상림의 길가에서 4명, 백암 장터에서 1명 등의 일진회원(一進會員)을 총살하였고, 또 죽산군 백암에서 순사와 순검 각 1명을 총살하는 등의 활동도 벌였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10일 자택에서 일군수비대의 습격을 받고 총살당해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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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공격대상지(송병준 별장)
용인지역 의병 공격 대상지는 1907년 용인지역 의병이 일본군과 일진회원 등을 처단하기 위해 공격했던 곳이다. 송병준의 별저는 일진회원들의 집합소였다. 송병준은 을사오적 가운데 한 명이자, 일진회장을 역임한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이런 까닭에 송병준의 별저는 용인지역 의병의 주요 공격대상지가 되었다. 1907년 8월 24일 양지군에서 용인지역 의병과 일본군이 전투를 벌였다. 이때 의병의 공격에 패한 일본군은 송병준의 별저로 도주하였고, 일제는 송병준의 별저에 수 십명의 일본인 순사를 배치해 용인지역 의병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런 사실은 용인지역 의병이 당시 괄목할만한 활약을 펼쳤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송병준의 별저는 당시 양지군의 대표적인 친일세력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용인지역 의병의 주요 공격대상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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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근 순교기념비
강종근(1901 - 1942) 목사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혹독한 고문으로 순교자가 된 첫 번째 목회자이다. 1930년 협성신학교 졸업 후 1937년 기독교 전도사가 되어 경기도 연천군 연천면에 있는 연천교회에서 근무하며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함양시키는 설교를 하였고, 1938년 5월 목사가 되어 강원도 금화군 창도면 창도교회(昌道敎會)로 옮겨서도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 결과 1940년 6월 철원 제일교회에서 목회 활동 중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붙잡혀서 1941년 10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후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2년 6월 고문으로 인한 신병의 악화로 순국하였다.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