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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근원지 오산장터 표지석
오산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4일 오산장(우시장)에서 시작되어 3월말까지 진행되었다. 1919년 33인의 조선독립선언으로 시작된 3.1독립만세운동 현장을 목격한 오산의 세교동 출신 유진흥은 감격하여 오산에서도 이와같이 실행할 것을 결심하게된다. 곧 오산으로 내려와 이성구, 김경도, 이규선, 정규환, 김용준, 안낙순, 공칠보 등의 동지를 규합한 후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 준비하였다. 3월 29일 오산장날을 거사 일로 정하고 동지들에게 각 동리에 연락을 취하게 하였다. 3월 25일 오산리의 만세운동이 젊은 학생들과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해 금융조합과 일본인, 중국인 가옥을 파괴하며 전개되었다. 이후 이산리에서 3월 29일 오후 5시경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이 대규모로 벌어졌다. 시장에 모여있던 300여명의 군중들은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는 유진흥과 안낙순 등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현장에 있던 오산주재소의 순사 오오키(大木)가 유진흥 등 3명의 주동자를 체포하자 안낙순을 위시한 시위 군중들은 석방을 요구하며 기세를 더욱 높였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의 수는 더욱 늘어 500여명이 됐고, 이들은 이성구, 이규선, 김경도, 정규환, 김용준, 유진흥 등과 함께 면사무소에 몰려가 투석전을 하였다. 군중은 더욱 늘어 7~800명에 이르렀고, 오산역을 파괴한다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때 일본 경찰과 보병이 합세하여 발포하자 무기에 대항할 수 없자 해산하게 되었다. 오산3.1운동 주모자로 몰려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 농민들이며 성호면(오산)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이들의 만세운동에 대해 일제는 징역6월에서 1년8월까지 형을 선고했다. 그 중 공칠보, 김경도, 김용준, 안낙순, 유진흥, 이규선, 이성구, 정규환 이 8분의 의사를 8의사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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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지
1926년 5월 3일 수원군에 위치한 오산공립보통학교 6학년 학생 71명은 담임교사 후루카와(古山誠治)의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다나카(田中) 교장에게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후루카와 교사가 학생들에게 모욕적인 언행과 과도한 구타를 일삼고 순종의 망곡제를 저지하자 학생들은 이와 같은 교사 밑에서 수업을 받을 수 없으니 처벌해 달라고 동맹휴학을 단행한 것이다. 이에 오산공립보통학교 후원회 회장 한필호가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후루카와 교사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자 학생들은 다시 집단 휴학하는 등 반발을 일으켰다. 결국 학교 당국이 학생들에게 더 이상 후루카와 교사의 수업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하여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해주자 5월 7일 학생들은 수업에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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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면 경찰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오산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4일 오산장(우시장)에서 시작되어 3월말까지 진행되었다. 1919년 33인의 조선독립선언으로 시작된 3.1독립만세운동 현장을 목격한 오산의 세교동 출신 유진흥은 감격하여 오산에서도 이와같이 실행할 것을 결심하게된다. 곧 오산으로 내려와 이성구, 김경도, 이규선, 정규환, 김용준, 안낙순, 공칠보 등의 동지를 규합한 후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 준비하였다. 3월 29일 오산장날을 거사 일로 정하고 동지들에게 각 동리에 연락을 취하게 하였다. 3월 25일 오산리의 만세운동이 젊은 학생들과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해 금융조합과 일본인, 중국인 가옥을 파괴하며 전개되었다. 이후 이산리에서 3월 29일 오후 5시경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이 대규모로 벌어졌다. 시장에 모여있던 300여명의 군중들은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는 유진흥과 안낙순 등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현장에 있던 오산주재소의 순사 오오키(大木)가 유진흥 등 3명의 주동자를 체포하자 안낙순을 위시한 시위 군중들은 석방을 요구하며 기세를 더욱 높였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의 수는 더욱 늘어 500여명이 됐고, 이들은 이성구, 이규선, 김경도, 정규환, 김용준, 유진흥 등과 함께 면사무소에 몰려가 투석전을 하였다. 군중은 더욱 늘어 7~800명에 이르렀고, 오산역을 파괴한다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때 일본 경찰과 보병이 합세하여 발포하자 무기에 대항할 수 없자 해산하게 되었다. 오산3.1운동 주모자로 몰려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 농민들이며 성호면(오산)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이들의 만세운동에 대해 일제는 징역6월에서 1년8월까지 형을 선고했다. 그 중 공칠보, 김경도, 김용준, 안낙순, 유진흥, 이규선, 이성구, 정규환 이 8분의 의사를 8의사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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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독립운동기념비
김혁(1875 - 1939)은 1919년 3월, 용인 신갈지역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그 후 신민부(新民府) 집행위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 교장 등을 역임하면서 김좌진 장군 등과 함께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1928년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평양감옥을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 병환이 위독해 가출옥했으나 9년 여 동안의 모진 옥고의 여독을 견디지 못하고 순국, 현재 서울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132에 안장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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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독립운동유적(민영환 묘, 신도비)
충정공 민영환(1861 - 1905)이 안장된 묘역으로, 그는 당시 최고 세도가였던 여흥민씨 척족의 일원으로 187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진을 거듭해 도승지·형조판서·한성부윤 등 요직을 맡았다. 이후 1897년 특명전권공사로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당시 여러 열강을 방문해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 이후 독립협회 후원 및 근대적 개혁을 시도했지만 친일세력에 의해 실패하고, 파직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대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일제에 의해 실패하고, 동포와 각국 공사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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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삼거리 앞 3.1운동 만세 시위지
수지면 고기리 이장이었던 이덕균은 1919년 3월 28일 안종각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들은 다음날인 3월 29일 100여명의 주민들을 선도하여 만세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동천리를 지나면서 300명의 규모로 커져갔고, 풍덕천 수지면사무소에 다다르자 주변지역 주민들까지 운집하였다. 안종각이 수지면사무소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시위대는 기세를 더욱 떨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최우돌이 보정리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와서 합류하였고, 마북리(삼거리)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경계를 치고 있던 일본군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시위대를 주도했던 안종각과 최우돌은 일본군의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순국하였다. 시위대는 결국 해산하고 말았으며, 이 과정에서 이덕균 역시 체포되었다. 이덕균(1879~1955)은 경기 용인 사람이다. 1919년 3월 28일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이장으로서 동지 안종각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이튿날인 3월 29일 8시경에 동민 100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동천리에서 주민 100여명과 합류하여 동일 오후 2시경까지 수지면 일대를 돌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동년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동년 5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안종각(1888~1919)은 경기 용인 사람이다. 1919년 3월 28일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이장 이덕균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튿날인 3월 29일 부락민 100여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 진행중에 인근 동천리 주민 100여명과 합세되어 계속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선도하였다. 오후 2시경에는 수지면사무소 광장에서 면민 6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그런뒤에 기흥면 소재 일본인 마을을 습격코저 행진하던 중에 일군의 무차별한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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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흥 3.30만세운동 기념표석
이곳은 (구)기흥면사무소 있던 곳으로, 101년 전 지역주민들이 일제로부터 독립과 나라의 주인공임을 선언하며 집결하고자 했던 기흥지역 만세운동의 역사 현장이다. 1919년 3월 30일 오전 기흥 주민들은 공세리 탑안골과 하갈리 개울번던에 모여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오후에는 구성 주민들이 “대한민국만세”를 외치며 신갈리로 향하였다. 『3.30 기흥 만세운동 기념 표석』은 101년 전 용인 기흥지역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기흥독립운동 개요와 만세운동 당시 주민들이 시위를 벌이며 행진했던 「만세길」을 형상화하여, 화강암 재질의 가로 80㎝×세로 130㎝ 크기로 2020년 8월 15일 세웠으며, 신갈동행정복지센터 앞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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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학교(용인독립운동유적지)
명륜학교는 용인시 향토유적 제1호인 용인향교(일명 구성향교) 내에 설립되었던 용인 최초의 신식학교로 구한말 나라의 위기를 근대교육으로 극복하자는 애국사업의 일환에서 1906년 개교하였다. 명륜학교의 초대 교장은 학부대신을 역임한 이도재(李道宰)로, 당시 명륜학교에서 가르치던 과목은 서당, 또는 향교나 서원에서 행해졌던 전통 한학교과와 역사·과학 등 근대적인 교과가 혼합된 것이었다. 이를 통해 명륜학교가 전통교육 기관에서 근대학교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학교였음을 알 수 있다. 명륜학교의 설립자인 동전(東田) 맹보순(孟輔淳, 1862~1933)은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한 구한말 대학자로, 명륜학교 제자들은 모두 민족의식이 투철한 인재로 성장하였는데 제자들 중에는 만주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김혁과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영선, 3·1운동 때 파고다공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피체되어 옥사한 어대선(魚大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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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면 독립만세운동 표지석
수지면 고기리 이장이었던 이덕균은 1919년 3월 28일 안종각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들은 다음날인 3월 29일 100여명의 주민들을 선도하여 만세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동천리를 지나면서 300명의 규모로 커져갔고, 풍덕천 수지면사무소에 다다르자 주변지역 주민들까지 운집하였다. 안종각이 수지면사무소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시위대는 기세를 더욱 떨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최우돌이 보정리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와서 합류하였고, 마북리(삼거리)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경계를 치고 있던 일본군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시위대를 주도했던 안종각과 최우돌은 일본군의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순국하였다. 시위대는 결국 해산하고 말았으며, 이 과정에서 이덕균 역시 체포되었다. 이덕균(1879~1955)은 경기 용인 사람이다. 1919년 3월 28일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이장으로서 동지 안종각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이튿날인 3월 29일 8시경에 동민 100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동천리에서 주민 100여명과 합류하여 동일 오후 2시경까지 수지면 일대를 돌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동년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동년 5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안종각(1888~1919)은 경기 용인 사람이다. 1919년 3월 28일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이장 이덕균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튿날인 3월 29일 부락민 100여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 진행중에 인근 동천리 주민 100여명과 합세되어 계속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선도하였다. 오후 2시경에는 수지면사무소 광장에서 면민 6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그런뒤에 기흥면 소재 일본인 마을을 습격코저 행진하던 중에 일군의 무차별한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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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흥독립만세운동 표지석
기흥구 영덕동 개울번던은 1919년 3월 30일 당시 용인군 기흥면에서 가장 먼저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자 주변 지역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위해 모인 집결지이다. 1919년 3월 23일 갈천리에서 시위대가 태극기를 들고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3월 30일에는 하갈리에 거주하는 김구식이 탑안골 강변에 모인 3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대한제국 장교 출신인 김혁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기흥면사무소로 이동하는 동안 계속 불어났으며, 면사무소 앞에서 면 직원들이 태극기를 치우려 하자 면사무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일본 헌병이 출동하자 시위대는 읍삼면으로 이동하여 연합 시위를 벌였다. 김구식(1881~1947)은 경기도 용인 사람이다. 용인군 일대에서 만세시위가 각 면·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자신이 살던 하갈리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3월 30일 하갈리 강가에서 주동이 되어 수십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4월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6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고하였으나 기각되었고 이해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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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식 구 묘
김구식(1881 - 1947)은 1919년 당시 용인군 기흥면 하갈리(器興面 下葛里) 사람으로, 용인군 일대에서도 만세시위가 각 면·리에서 일어나자 자신이 살던 하갈리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3월 30일 하갈리 강가에서 주동이 되어 수십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체포되어 같은 해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6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고하였으나 기각, 이해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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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내만세운동 표지석(홍재택)
이 곳은 머내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홍재택이 살았던 곳으로, 1919년 3월 28일 수지면 고기리 구장 이덕균, 안종각 등과 함께 머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며, 수지(동천리, 풍덕천리), 구성(보정리, 마북리, 언남리), 낙생 등 인근 지역들을 사전에 연결하고 연락을 분담시키는 등 시위계획을 사전에 조율하고 역할을 분담했다. 이 곳에 거주하던 홍재택은 이러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4월 16일 용인헌병분대에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2019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