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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건 행적비
이중건(李重乾. 생몰년도 미상)의 호는 백헌(白軒)이며, 1910년 11월 오봉 이연건과 함께 강마 서당 터에 동명 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였다. 본래 학교 이름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東明王)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측되는데, 교실 6동을 건립한 후 1913년에 개교하였다. 담당 교사들은 이연건과 이중건의 지인으로 구성되었고, 학교 설립 취지에 부합하여 모두가 민족의식이 투철하였다. 동명 학교는 1919년 3월 19일에 열린 함안읍 만세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함안읍 만세 운동 당시 사용된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는 동명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손수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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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흥 의거지
백사면사무소는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이자 이수흥이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습격한 곳으로,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의미있는 공간이다. ◇ 백사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 백사면 만세 시위는 송말에 사는 임덕재·임예재·임경순·임재순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1919년 4월 2일 마을 사람들을 인솔하고 송말리 앞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른 후 면 소재지가 있는 현방리로 행진하였다. 도중에 시위 참가자의 수가 점점 불어나 많은 수의 군중들이 현방리에 모여들었는데, 당시 백사면장인 이연의를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 애국지사 이수흥 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이다. 19세가 되던 해에 만주로 망명하여 김좌진(金佐鎭)이 사관양성을 목적으로 길림성(吉林省)에 세운 신명(新明)학교를 졸업하였다.1923년 7월경에는 대한통의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대한통의부가 의군부로 확대 개편되자 의군부 총재 채상덕(蔡相德)의 부하로서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그후 임시정부 직할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에 가담한 그는 1925년 새총독이 시찰여행을 하고 있을 때 압록강 상의 증기 란치(steam launch : 船載大型端艇)에서 총독에게 수류탄을 던지기도 하였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한편 그는 주만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特務正士)에 임명되어 1926년 5월에 모젤권총 1정과 동 실탄 147발, 부로닝 구식 권총 1정과 동 실탄 29발을 휴대하고 총독 및 일제 고관을 주살하기 위하여 국내로 들어왔다.그는 먼저 군자금이 필요했으므로, 동년 7월 6일 황해도 평산군 안성면 발참리(平山郡安城面發站里)에 사는 김상렬(金相烈)을 찾아가 요청하였으나 뜻일 이루지 못하였다.다시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중리(邑內面中里)에 사는 유택수(柳澤秀)의 집으로 가던 도중 동월 10일 서울 동소문(東小門)파출소를 습격하여 보초근무중인 일경 덕영승차(德永勝次)를 저격하여 중상을 입혔다. 동년 9월 9일에는 안성(安城)에서 유택수와 함께 군자금 요청을 거절하는 부호 박승육(朴承六)의 아들 박태병(朴泰秉)을 사살하였다.그리고 10월 20일에는 경기도 이천군 현방(玄方) 경찰주재소를 습격한 후 다시 백사(柏沙)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면서기 송천의(宋天義)를 사살하였다.그는 그후 새로운 계획을 위하여 변장하고 서울로 피신하였다. 동년 10월 25일에는 동지 유택수(柳澤秀)로 하여금 서울 수은동(授恩洞)에 있는 대성호(大成號) 전당포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부친의 부음(訃音)을 듣게된 그는 부득이 수원(水原)으로 내려가 발상하였다. 이때 이천경찰서장 하기(河岐)는 범인의 신장이 불과 5척이라는 말을 듣고 관내에 거주하는 신장이 5척되는 사람을 모조리 조사하게 하였다.이에 따라 일경 3천여명이 동원된 삼엄한 계엄상태의 3개월 동안, 4대사건을 신출귀몰한 수법으로 흔적도 없이 수행하던 그는 유택수와 함께 11월 6일 체포되어 3년의 예심 끝에 1928년 7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9년 2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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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기념비
3.1운동 100주년 기념비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비석이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는 장면과 옥고를 치른 이효덕의 사진을 해당 비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효덕(1895~1978)은 평남 용강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당시 평양 양무학교 교사로 있었던 이효덕은 밤을 새워가며 태극기를 만들고 학생 200여명과 함께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후 양무학교장의 선창에 따라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내로 행진시위를 하면서 주민들을 규합하며 경찰주재소까지 행진을 하였고 다음날에도 계속해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9월 2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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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대교 도주 상니 대성 유적비
강승태(姜昇泰. 1895.05.02.∼1960.02.29.) 지사는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 도주(道主)로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다. 다른 이름으로 承河, 升玉, 昇華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창씨개명할 때에는 岡本承河로 했다. 호는 龍江, 도호(道號)는 尙尼이다. 全羅南道 濟州島 中文面 下猊里 231번지가 본적으로 되어 있으나, 안덕면 上川里에서 姜彛鎬의 서자로 태어나 上猊里 2276번지에서 살았다. 1903년부터 약 2년 동안 한문을 수학했다. 1908년에는 목포에 가서 한의학을 공부했으며 농사도 지으면서 살다가 1917년에는 태을도(보천교)를 믿었으나 특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1924년부터 全北 金堤로 가서 修道 생활을 했는데 1930년 꿈에 증산천사(강일순)를 만나 ‘너는 이후 10년간 크게 성공할 때까지 맹목적으로 오로지 수도를 하라’는 신명(神命)을 받아 繼統(법통을 이어받음)하였으며, 1931∼1935년에는 하예리에서 後天大道起運禮를 致誠으로 奉行하며 修道에 정진하였다. 이 시기에 시력을 잃었다. 1936년 1월 27일(음력 1월 4일) 오후 9시경 제주도 안덕면 동광리 강위경(姜渭慶) 집에서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를 창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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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학교 터(상산초)
문명학교는 이상설 선생의 사촌형제인 이상직 선생이 항일 구국 계몽 운동으로 세운 학교로 지금의 진천상산초등학교의 전신이다. 독립운동가 이상설, 이상직 선생이 항일구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1909년 세운 것이 문명학교이다. 이상직 선생은 어려서부터 서울의 큰아버지 댁에서 독립운동가인 이상설 선생과 숙식과 수학을 같이 하면서 기틀을 다졌고 이성훈, 이시영, 이회영, 정인보, 이범세 등과 사귀며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진천으로 낙향하여 사립·보통상산학교를 건립했다. 이상직 교장과 남진우 선생이 교육을 담당하여 학생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교실이 협소하여 향교의 명륜당으로 전전하며 재정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후 교명을 ‘널리 학생을 모집해 신학문을 가르치다’라는 뜻이 담긴 <광명학교> 또는 <문명학교>라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학교는 한일합방 후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으로 폐지되고 1911년 6월 진천군에 공립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그해 10월 진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게 된다. 1913년 현재의 삼수초등학교 부지에 교실2, 교무실 1개로 교사를 건축했다. 또 같은 해 제 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때 졸업생 수는 모두 19명이었다. 1941년 4월 1일에는 학교 이름을 <진천상산공립보통학교> 라 개칭하고 진천 지역 민족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1940년대 현재의 삼수초등학교 터에 있던 진천상산초등학교는 급격하게 늘어나는 학생 수를 감당하기 어려워 교사 증축이 시급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부지가 좁고 재정 형편에도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 같은 어려운 환경을 접한 당시 진천의 최대 갑부로 알려졌던 이호신 선생이 토지 500석 지기의 부지를 희사해 지금의 위치에 부지 7천 여 평을 마련했다. 선생이 내놓은 부지에 교사 2동과 부속 건물을 지어 1940년 11월 이사하게 된다. 이로써 비교적 제대로 된 교육시설이 갖춰진 새로운 배움의 전당을 마련하게 됐다. 당시 이호신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교정에 장학비가 현재의 은행나무 아래 세워져 있다. 이 후 1941년 진천상산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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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덕 공적비
원암 문원덕(1915-1986) 선생은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에서 태어났다. 남평 문씨의 집성촌으로 집안 모두가 동학에 입교하였는데 문원덕 지사의 조부가 문장로 의사이다. 문장로 의사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당시 태안접주로 태안관아, 승전곡, 신례원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해미, 매현, 홍주성의 전투를 치렀다. 문원덕 의사의 부친은 장남 문병석 의사인데 기미년 3·1혁명 당시 예산 등지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섰다. 문원덕 선생의 양부가 차남인 문귀(거북 구)석 지사가 되신다. 문귀석 지사는 태안관아에서 문장로 의사를 체포하기위해 혈안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 대신 나를 잡아가라"외쳐 자진체포, 총살을 당하였다. 문원덕 선생은 1965년 서산, 태안 지역의 동학 후손들을 찾아다니며 충청 내포지역 동학농민군 288명의 희생자와 유족의 명단을 발굴했는데 거의 유일한 기록에 가깝다.또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기록인 <문장준 역사>와 <조석헌 역사>를 알렸다. 문원덕 선생의 집안은 위, 아래 4대에 걸쳐 동학정신 선양사업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문원덕 선생의 딸인 문영식 회장 역시 동학농민혁명태안군유족회 회장으로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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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지역 동학전래비
태안지역 동학전래비는 2000년 10월 10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에서 태안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내용을 후대에 알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태안 지역에 동학이 전해진 것은 1890년으로 서산시 지곡면 장현리에서 살던 최형순에 의해서였다. 최형순은 1890년 3월 16일 경주에서 제2대 교조인 해월 최시형 선생을 만나 동학에 입도하였다. 최형순은 고향으로 돌아와 서태안 지역을 중심으로 충청도 전역에 걸쳐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포교는 매우 빠르게 이뤄졌으며 이원면 포지리를 지나 원북면 방갈리에까지 이뤄졌다. 특히 방갈리는 태안지역 동학의 핵심 거점이 되었는데 1894년 9월 그믐날 자정에 예산 본포에서 기포하여 당시 태안 감옥에 투옥되었던 동학의 지도자를 30여명 구출하였으며 이 때 기포한 동학군 중에 태안 출신은 수백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 뒤 10월 15일 태안, 서산, 해미지역에서 재기포한 수 만명의 동학혁명군은 해미승전곡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맞아 격전 끝에 동학군이 승리하고, 다시 동월 26일의 예산 신례원 전투에서도 동학혁명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0월 28일 홍주전투에서의 패전으로 인해 동학 혁명의 관련 인물과 유가족들은 혹독한 보복을 겪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은 오랫동안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민란으로 평가되다가 1960년부터 재조명되기 시작하여, 1994년 대중적인 인식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 그 결실로 2004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2019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이 되었다. 본 전래비 역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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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렬 묘
서상렬(徐相烈, 1854~1896)은 화서학파의 유학자이며 한말의병장으로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까지 지냈으나 묄렌도르프(Mollendorf,P. G. von, 穆麟德)가 조정에 입사하게 되자 이를 통탄하고 벼슬을 하지 않고 낙향을 했다. 이후 화서학파인 김평묵과 유중교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나중에 제천의 장담에서 살며 유중교의 강단에 동참하였다. 유중교의 사후에는 그의 문집인 『성재집』의 편찬을 주도하며 현실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나, 1894년 가을, 재종제인 서상철(徐相轍)의 봉기 때에는 이단으로 여겼던 동학과 연루되는 것을 피하여 참여하지 않았다. 동학과 연대하지 않은 것은 의병항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95년 말, 단발령 이후 이춘영, 안승우, 김백선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군사(軍師)로 참여하여 실질적인 지도자 구실을 하였다. 이춘영 등과 의병으로 가담한 날도 “국가의 변고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하 된 자로서 어찌 차마 앉아서 보고만 있으랴” 하며, 거병할 뜻을 밝히고 포천 선영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원주에서 지평의병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갔다. 그러나 제천으로 갔다는 소문을 듣고 제천에서 합류하였다. 나중에 유인석을 중심으로 하는 호좌의진으로 재편된 이후에는 영월에서 포군을 모았으며, 1896년 음력 1월 중순에는 영남에 진출했다. 이는 영남과 공동으로 투쟁하기 위한 것이었고, 의병봉기 직후에 좌절하고 있던 영남 의병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두 달 남짓 소토진(召討陣)을 이끈 서상렬은 영남의 여러 의진을 강경투쟁 노선으로 집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영남 일곱 고을의 의진을 예천에 모아 회맹(會盟)을 주도하였고, 태봉 전투에서 일본군과 직접 격전을 치렀다. 그러나 태봉 전투에서 실패하였고, 안동 관찰사의 부임을 허용할 것인가를 둘러싼 영남 북부 지역 의진의 내부 갈등 속에서 그것을 하나로 묶기 위한 노력은 결국 실패했다. 서상렬은 음력 4월 초 예천 전투의 패전을 계기로 단양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중부권을 장악하던 호좌의진이 제천을 빼앗긴 후 재기를 위해 노력할 즈음,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으로의 이동, 즉 서행(西行)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했다. 이후 서상렬은 대장진의 서쪽 행렬에 앞장서서 길을 열다가 낭천(지금의 화천)에서 전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서상렬의 공적을 기려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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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바위(동학농민군 지도자 피체지)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백화산에 위치한 교장바위에 세운 표지석이다. 이곳은 동학농민군이 주둔하였고 그 지도자들이 체포된 곳이다. 1894년 11월 이곳 태안 백화산에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관군이 몰려와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유규회 최성서 최성일 안순칠 피만석을 체포하고 그들을 압송해 갔다. 이 내용은 순무영 선봉장 이규태가 정리한 「순무사정보첩」에 기록되어 있다. 교장바위라는 이름의 유래는 당시 태안 동학농민군들이 붙잡혀 포승줄에 묶여서 교장바위에서 학살을 당하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잡으면 목을 졸라 죽이기도 하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하고 창과 칼로 찔러 죽이기도 하고 생매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살(絞殺: 목졸라 죽임)하거나 장살(杖殺: 때려 죽임)하였다 하여 교장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2011년 태안군에서 비석을 세워 동학농민군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이 비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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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서 송덕비
충청남도 태안 백화산에 위치한 천도교도 청암(淸菴) 김학서(金鶴瑞)의 송덕비이다. 청암 김학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으며 이 비문은 원암 문원덕이 1970년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문에 따르면 김학서의 도호는 청암(淸菴)이며, 도정(道正:천도교단 내의 직책 이름 중 하나)이었다. 김학서는 포덕 35년(1829) 예포 대장 박덕칠의 지휘로 봉기하였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또한 김학서는 백화산에서 집단으로 처형당했던 많은 동학 농민들의 영령을 추모하여 합동위령제 올리도록 시작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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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 동상(상당구)
한봉수(1883-1972)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근무하다가 1907년 조선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그해 음력 8월에 의병장 김규환 의진에 가담하여 일본군의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였다. 1907년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병진을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라 칭하였다. 이후 강원으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고, 의병장 조운식(趙雲植)과 적과 맞설 계획을 논의하고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식량과 무기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점점 강해짐에 결국 의병을 해산하고,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1910년 소위 내란죄 및 강도·살인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았으나, 경술국치가 이루어짐에 따라 1910년 8월 29일 사면을 받아 면소 판결되어 석방되었다.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 즈음에 홍명희,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 7일 청주의 서문장터(우시장)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 다시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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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덕 동상
1894년 동학운동 때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6만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당한 뒤 전국 각지를 방랑하였다. 1908년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입교했다. 이후 천도교의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館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 참배를 위하여 상경했을 때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에게, 3·1운동 계획을 들었다.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달 27일에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과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고,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사람 중에서 29인이 모였다. 이 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자진해 붙잡혀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감사원장·선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22년 말 천도교 신파가 ‘천도교 연합회’를 설립하여 분립하자, 천도교에서 탈퇴하여 수운교와 상제교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1927년 이후 신간회에서 활동하다가, 신간회가 해체되자 다시 천도교 구파로 돌아왔다. 저서로는 『조선총사(朝鮮總史)』·『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궁중비사(宮中秘史)』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