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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항일의병비
심원사는 연천지역에서 활동한 의병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1907년 의병장 허위가 이끄는 의병부대 800여 명이 심원사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김화수비대가 의병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심원사로 접근하였는데, 이를 알아차린 의병부대는 서로 분산하여 이동하던 중 250여 명의 의병들이 신서면 대광리에서 1907년 9월 27일 오후 3시 김화수비대와 재경보병 50연대 6중대 1소대의 연합토벌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희생되었다. 이 중 6명의 시신이 대광리역에서 약 600미터 떨어진 야산 구릉에 안치되었다. 2012년 대광리의 6인묘와 도신리 일대에서 무명 의병묘로 전해오던 3인의 주검을 수습하여 이 곳 심원사 경내로 안치하였다. 2016년에 일제강점기 때 구국의 신념으로 연천에서 활동하다 순국한 수많은 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연천 항일의병묘역을 조성하고 위령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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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동 의병 전투지
법화동 의병 전투지는 1907~8년 경기북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1907년 9월 27일 오전 3시경 경기북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약 150명의 의병은 연천의 법화동에서 일제의 니시카와중대(西川中隊)와 전투를 벌였다. 일제측 자료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의병은 20여 명이 사망했으며, 나머지 병력은 인근지역으로 후퇴한 것으로 확인된다. 일제의 니시카와 중대는 원래 철원 남쪽의 심원사에 집결한 800여 명의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연천의 법화동을 지나던 길이었다. 이때 법화동에서 의병과 교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제의 니시카와 중대가 같은 날 오전 5시경 심원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집결해 있던 의병은 이미 1시간 전에 모두 피신한 상태였다. 즉, 법화동에서 의병이 일본군과 교전했기 때문에 심원사에 있던 대규모 의병이 모두 피신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1908년 4월 23일에도 법화동에서는 한 차례의 전투가 더 있었다. 이날 밤 의병 약 15명이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12명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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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우, 이근배 의병 전투지
연기우, 이근배 의병 전투지는 연기우, 이근배 등이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한 곳이다. 1908년 2월 24일 의병장 연기우와 이근배 등 의병 20여 명은 신서면에서 일제 헌병 모기 게이키치(茂木敬吉). 모리야스 지로(守安治郞) 등과 마주쳤다. 연기우와 의병 20여 명은 이들을 향해 사격하였고, 잠시 후 의병 약 30명이 나타나 연기우 의병 부대를 지원하였다. 모리야스는 지원 병력을 요청하기 위해 철원으로, 모기는 복막리로 향하다가 모두 의병들에게 사살되었다. 급보를 듣고 철원 분견소장 오오타(太田) 대위가 일본군 하사 이하 12명을 거느리고 현장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의병은 없고, 모기의 시체와 부상당한 말을 발견하였다. 모기가 휴대한 물품은 의병이 노획해 간 상태였다. 연기우(1865~1910)는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강화진위대에서 부교로 복무하던 중 1907년 8월 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덕물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60여 명을 소모한 뒤 동한창의대장이 되어 연천·적성·삭녕·마전 등지에 출몰하며 양주·포천 방면의 강기동 의병부대와 연결하여 여러 곳에서 일본군수비대와 경찰을 공격하였다.1908년말 원수부13도총대장인 이인영(李麟榮)의 휘하에 들어가 서울 공략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양주에서 패한 뒤 창의한북대장이 되어 다시 의병을 이끌고 고양·연천·마전·삭녕·강화·교동 방면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2월에 삭녕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자 9명과 피금자 43명을 내고 많은 병기를 빼앗기는 패전을 당하였다. 그뒤 나머지 부하 수십명을 거느리고 안협으로 들어가 철원·평강·이천 등지를 전전하다가 5월에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다가 탈출하였다. 그뒤에도 활동을 계속하다가 국권상실 후 일본군에게 잡혀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근배(1882~1910)는 강원도 철원(鐵原) 사람이다. 1908년 2월 24일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연기우 의병장 의진에 참여하여 그 부하 50명과 함께 철원군 신서면 목포에서 활동하던 중 철원 헌병분견소 일헌병 무목경길(茂木敬吉)을 저격하여 살해하여 총검 각 1정과 실태 20발 외 잡품 8점을 노획하였다. 그후 동년 12월 2일에 연기우 의진의 20여 명과 함께 철원군 동변면 장흥산에 거주하는 일인의 집을 습격하여 일인 문곡일랑(文谷一郞)과 중야영조(中野寧造)를 살해하고 중야건치(仲野乾治)에게 상처를 입힌 뒤 붙잡혔다. 그로 인하여 1910년 2월 1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 및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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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 묘
이종근(1868 - 1943)은 경기도 통진(通津, 지금의 김포) 사람으로, 1908년 4월 23일(음력) 향리인 경기도 통진군에서 정용대(鄭容大) 의진에서 활약하였다. 18명의 동료 의병과 함께 통진군내 3개면의 동장들을 모아놓고 1만 5천냥의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계속해서 군도와 양총(洋銃)으로 무장하여 교하군(交河郡) 민판서(閔判書)로부터 양총 7자루와 탄환 200발, 군도 2자루 등을 모집하는 등 활약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1908년 10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형 5년을 선고받고 정배생활을 하였다.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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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명, 소은숙 기념상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 배화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소은명(1905 - 미상)·소은숙(1903 - 미상) 열사 자매는 1920년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학교 뒷산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연천군 항일 독립운동가 69명 중 유일한 여성이다. 2018년 8월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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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곶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삼곶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삼곶리 주민 4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31일 나용기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마을 서당 교사 이홍식을 자기 집으로 불러 면내의 각 동리 구장에게 보낼 격문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작성된 격문 6통을 한씨동·나성돈·나개동을 통해 중면 중사리·횡산리·합수리·삼곶리 등 5개 동리 구장에게 배부하였다. 4월 1일 오전 7시, 삼곶리에 약 400명의 주민이 모이자 나용기는 선두에 서서 옥양목으로 만든 태극기를 들고 연천읍내로 진출하여 시위행진을 시작했으나 일본 헌병에게 저지당하여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후 약 100명의 군중이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삼곶리헌병주재소에 몰려갔지만 헌병으로 인해 해산되었다. 다시 한 번 400여 명이 모여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시위를 벌이고 주재소를 습격했지만 헌병이 시위대를 체포하고 해산시켰다. 이로 인해 시위를 주도한 나용기는 징역 2년형, 이홍식은 태형 90대에 처해지고, 태극기는 압수되었다. 나용기(1858~1920)는 기도 연천(漣川)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연천 일원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그는 3월 31일 같은 동네의 서당 교사인 이홍식(李洪植)을 자기 집으로 불러 독립만세 시위계획을 논의하고, 그에게 연천면내의 각 이장에게 4월 1일 오전 7시에 세얄골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할 테니 동네 사람들에게 연락하라고 하는 내용의 격문 6매를 작성케 하였다. 격문은 작성 즉시 한씨동(韓氏童)·나개동(羅開童)에게 주어 면내 중사리 등의 이장에게 전하게 하였다. 4월 1일 오전 7시 삼곶리에 4백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자신이 제작한 태극기를 들고 선두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연천읍내를 행진하였다. 그는 결국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이 해 6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홍식(1886~1935)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연천군 중면 삼곶리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나용기(羅龍基)와 함께 계획하였다. 당시 서당 교사였던 이홍식은 3월 31일 중면 나용기와 논의하여 4월 1일 오전 7시에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나용기의 지시를 받아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격문 6통을 작성하여 이를 한씨동(韓氏童) 이외 1명으로 하여금 중사리를 비롯하여 5개 마을의 구장에게 전달케 하였다. 이와 같은 이홍식의 활동으로 4월 1일 중면 삼곶리에서 약 4백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일 수 있었다. 이 일로 이홍식은 1919년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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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조 추모비
김병조(1877 - 1948)는 평북 정주군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로 1919년 3월 1일 항일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서명하고 3월 1일부터 평북 일원을 순행하며 각처에 격문을 보내고 궐기를 독려하다 3월 25일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3년 6월 만주로 옮겨 항일운동과 교육사업 등 15년간 활동하다 1933년 귀국하여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후 반탁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1946년 12월 24일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 중 1950년 9월경 순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동시에 한국교회 순교자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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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룡 추모비
이명룡(1873 - 1956)은 평북 정주군 출신으로, 1902년 정주군 상업회의소 소장이 된 그는 일제가 식민지배를 목적으로 설립한 동양척식회사의 토지매수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6년 형을 받아 3년간 복역하였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 때에도 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서 손병희 등과 만세를 외치다 왜경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 조만식 등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조직,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사재를 모두 털어 평동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47년 4월 공산당의 탄압으로 월남한 후에는 반공연맹 이사, 이준열사 기념사업회,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3.1정신선양회 등의 고문을 역임하였다. 1956년 11월 12일 서거하여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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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추모비
이승훈(1864 - 1930)은 평북 정주군 출신으로, 을사조약에 이어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자 망국의 한을 느끼며 모든 것을 정리 후 고향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했으며, 신민회 총감과 태극서관 관장을 역임하는 등 애국활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에 무관학교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으며, 105인 사건에도 주모자라 하여 계속 투옥되었으나 5년 만에 출옥 후, 이듬해에 오산교회 장로가 되어 기독교 활동과 함께 사회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에는 33인의 대표로 3.1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에 체포되어 세번째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조선교육협회 창립, 제4대 동아일보 사장 역임, 물산장려운동 확산 등 사회운동과 이상향 실현을 위해서 힘쓰다가 1930년 5월 9일에 67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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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명흠 묘
백명흠(1909 - 1936)은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으로, 1927년 신간회의 창립에 감화되어 1930년 항일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35년 투쟁자금 확보를 위해 서울 종로3가의 중앙병원을 구입 운영하였고,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감행하였다. 항일투쟁 활동 중 일제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다 1936년 7월 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되었으나, 그날 오후 순국하였다.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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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항쟁의사추모비
1919년 3월 28일 오산장날을 기하여 오산역 광장에서 8의사 주도하에 800여명 군중이 집결하여 오산역사, 우편소, 주재소, 면사무소, 금융조합, 일본인 상점, 주택 등 다수를 습격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몰아냄으로써 일본 경찰에 체포, 고문 및 징역을 받았다. 이는 일제의 치욕적인 무단통치에 항거하여 우리의 민족정신을 드높인 역사적 사건으로, 오산의 3.1독립만세운동을 기리고 항쟁의사들의 구국정신을 후예들에게 길이 물려주기 위해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 84주년을 맞이하여 위대한 선열들의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영원히 기념하고자 2003년 3월 28일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오산의 3.1독립만세운동 발상지인 오산역 광장에 건립되었으며, 이후 오산대역 건너편에 위치한 공원으로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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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돌베개공원
장준하(1915 - 1975) 선생은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됐다 탈영해 1945년 광복군에 가담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등을 역임했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