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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비마 묘
천비마는 김백선장군의 말의 이름이다. 김백선(金伯善, 1873~1896)은 양평군 출신으로 지평 군수 맹영재와 동학농민군을 무찌른 공으로 절충장군에 임명되었다. 일본이 침략해 오자 맹영재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말했으나 거절당하자, 지평 동향인 안승우와 이춘영 등과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포군 400여 명을 이끌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가흥전투 중 병력 지원 요청을 하였으나 응해주지 않은 안승우에게 항의를 하다가 군령으로 처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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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리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
용두리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23일 양평군 청운면 주민 2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청운면에서의 만세시위는 장날이었던 1919년 3월 23일 용두리시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용두리시장 만세시위는 단월면 덕수리의 신재원, 부안리의 김종학, 앙동면 쌍학리의 정경시, 청운면 갈운리의 민주혁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여물리에 있는 다리 위에서 시위 계획을 논의하고 신재원이 제공한 광목으로 태극기 3개를 제작하여 품에 넣고 시장으로 들어갔다. 신재원과 김종학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주변에서 2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어 시위대를 형성하며 행진하였다.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시위군중과 충돌하였으나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신재원(1860~1920), 정경시(1855~1929), 김종학(1876~미상), 민주혁(1870~미상)은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이들은 1919년 3월 23일 청운면 용두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신재원은 3월 1일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을 한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정경시와 만나 용두리 장날인 3월 23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23일 그들은 용두리 시장으로 가던 중 김종학과 민주혁을 만나 그들의 거사계획을 말했고 찬성을 얻게 된다. 여물리 다리 밑에서 신재원은 김종학과 민주혁에게 자신이 사 가지고 온 흰 천으로 조선 독립기라고 쓴 깃발 3개를 만들게 하였다. 장터에 이르러 150여 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그 선두에 서서 신재원과 김종학은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 해 6월 21일 신재원과 정경시는 징역 2년형, 김종학은 징역 1년 6월, 민주혁은 4월 24일에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게 된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신재원에게는 1977년, 정경시에게는 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신재원과 정경시에게, 2006년에는 민주혁에게, 2010년에는 김종학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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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용팔 묘
원용팔(1862 - 1906)은 구한말 충청도와 강원도 등 중부지방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 1차 전기의병 시기인 1896년 여주 일대에서 봉기한 심상희의진에 참여한 뒤 다시 의암 유인석 휘하의 제천의병에 가담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하였다. 2차 중기의병 시기인 러일전쟁이 끝나던 1905년 8월 강원도 원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2~3백 명 정도에 이르는 의진을 이끌고 원주를 점령하고자 횡성을 거쳐 원주로 들어가고 있었으나, 원주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의진은 무너지고 원용팔은 횡성에서 체포되어 원주로 압송된 뒤 10월 7일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인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심문을 받았지만, 대한 의사의 올곧은 기상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경성감옥에 수감된 뒤 옥고를 이기지 못하고 1906년 3월 45세에 옥중 순국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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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론 동학유적지
이곳은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도전2리 전거론(全巨論)은 동학의 2세 교조인 해월신사(海月神師)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이 1897년 8월부터 1898년 1월까지 5개월간 은거하던 곳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좌절 이후 강원도와 경기 북부, 경상도 일원의 산간 마을을 전전하다가, 제자인 임순호가 이곳에 집을 마련하고 모시게 되었으며, 최시형은 「이천식천(以天食天)」, 「이심치심(以心治心)」 등의 법설을 펼쳤다. 또한, 1897년 12월 24일 의암 손병희에게 동학의 도통(道統)을 전수한 곳이자, 최시형의 차남이자 항일투쟁에 앞장서며 3·1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2년 형의 옥고를 치르고 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한 독립운동가인 최동호(崔東昊, 1897~1923)가 태어난, 유서 깊은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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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호 거주지, 최시형 은거지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최동호는 서울 출신이며 천도교인으로, 천도교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차남이자 고려혁명당수(高麗革命黨首) 최동희의 동생이다. 1915년 이래 형과 함께 국권회복 운동을 통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는데, 1919년 3월 1일 천도교도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5월 27일 일경에게 체포되어, 이듬해 10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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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포리 헌병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이포리 헌병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4월 1일 금사면 이포리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으로 여주에서는 최초로 3.1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이다. 여주에서는 1919년 4월 1일 이포리를 비롯하여 인근 지역에서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포헌병주재소 앞에 모인 주민 3,000여 명은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시위 군중들은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는 등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헌병들의 발포로 독립만세시위 군중들은 해산하였으며, 이때 만세시위를 이끌던 지도자 10명이 체포되었다. 4월 2일에도 만세시위가 벌어져 37명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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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만식 묘
홍만식(1842 - 1905)은 1866년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참판에 있을 때인 1884년 아우 홍영식이 갑신정변을 일으키다가 실패,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하자, 아버지 홍순목은 자살을 하였고 그도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때에 부친과 그에게 사면령이 내려지고 다음 해에 춘천관찰사에 제수되어 여러 번 부임하라는 독촉을 받았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았으며, 1895년 8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음독자결코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해주관찰사를 비롯한 의정부 찬정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상소 때마다 직함을 쓰지 않고 「미사신(未死臣)」의 세 자만을 썼으며, 나라의 기울어져 감을 통탄했다.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음독 자결 순국하였으며,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그 충의를 높이 평가, 숭정대부 참정대신(崇政大夫參政大臣)에 증직하고, 장례를 후히 지내게 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홍만식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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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항섭 집
엄항섭(1898 - 1962)은 보성법률상업 전문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9년 9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부 참사가 되었으며, 1924년 4월에 상해한인청년동맹회를 조직하고 재정부장을 수행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26년 12월에는 임시의정원 헌법 기초위원으로 선임되어 1917년 4월에 제정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약헌을 수립하는 데 일조하였고, 1936년 11월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을 거쳐, 1941년 11월에는 외무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 5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의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고, 김구의 판공비서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 1945년 11월 23일에 귀국하여 김구와 함께 활동하다가 6.25 당시 1950년 9월 납북되었으며 1962년 7월 30일에 사망하였다. 1989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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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묘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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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준 구 묘
곽영준(1899 - 1932)은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 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십 매를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배포하고, 1,0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을 위해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을 위해 활동하다가 1920년 7월 다시 체포되어 1922년 1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 을 받았고, 동년 3월 29일 공소기각 되었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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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 집 터
조성환(1875 - 1948)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과 군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거쳐 1919년 4월에는 노령지역 대표위원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군무부 대표위원이 되었다. 1919년 8월 7일 만주에서 대한군정부를 조직하고, 12월 북로군정서로 개편하여 군사부장에 취임하고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였으며, 1931년에 임시의정원 경기도 위원, 1934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36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총장을 거쳐, 1937년에 한국 광복 전선 결성에 참가하였으며, 193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되었고, 11월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중국 시안(西安)에 파견되어 한국광복군 창설에 기여하였다. 현재 보통리고택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은 조성환의 부친인 조병희가 독립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산과 함께 매각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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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용팔 집 터
원용팔(1862 - 1906)은 구한말 충청도와 강원도 등 중부지방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 1차 전기의병 시기인 1896년 여주 일대에서 봉기한 심상희의진에 참여한 뒤 다시 의암 유인석 휘하의 제천의병에 가담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하였다. 2차 중기의병 시기인 러일전쟁이 끝나던 1905년 8월 강원도 원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2~3백 명 정도에 이르는 의진을 이끌고 원주를 점령하고자 횡성을 거쳐 원주로 들어가고 있었으나, 원주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의진은 무너지고 원용팔은 횡성에서 체포되어 원주로 압송된 뒤 10월 7일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인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심문을 받았지만, 대한 의사의 올곧은 기상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경성감옥에 수감된 뒤 옥고를 이기지 못하고 1906년 3월 45세에 옥중 순국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