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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의병 전투지(용문사)
1907년 후기의병 당시 양평의병의 근거지였던 곳이다. 일제가 광무황제(고종)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의병의 대일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즈음 양평의병은 용문산의 용문사를 비롯하여 상원사, 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권득수 의병장은 의병을 모집하여 용문사에 식량과 무기를 비축해 놓고 항일활동을 펼쳤다. 조인환 의병장은 용문사를 근거지로 삼사 인근 지역의 관아와 파출소, 우편소 등을 습격하여 일제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양평의병이 활발하게 항일전을 전개하자, 일제는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양평의병은 1907년 8월 24일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와 용문사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때 용문사는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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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의병 전투지(상원사)
1907년 후기의병 당시 양평의병의 근거지였던 곳이다. 일제가 광무황제(고종)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의병의 대일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즈음 양평의병은 권득수·조인환 의병장의 지휘 아래 용문산의 상원사를 비롯하여 용문사, 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양평의병이 활발하게 항일전을 전개하자, 일제는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양평의병은 1907년 8월 24일 일본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가 용문사를 습격해오자 상원사로 후퇴하여 항쟁하였다. 이때 상원사는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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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지평의병 충혼비
1895년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 및 단발령 등 일제의 극악무도한 만행에 항거하기 위해 당시 지평현 곡수(曲水)에 살고 있던 이춘영이 중심이 되어 의병이 일어났고 이는 전국의 의병 봉기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본 비는 지평현 곡수리 의병 영웅들의 충혼과 고귀한 희생정신을 높이 기리기 위해 2021년 6월 6일 곡수1리 마을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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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지평면 곡수리 3.1만세운동 충혼비
양평군 지평면 곡수리 전 지역은 1919년 식민 통치 시국일 때 일제의 비인권적이고 반인륜적인 만행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난 3.1만세운동의 정신이 계승되어 지평면 곡수리 우시장을 거점으로 3천여 명의 인원이 집결하여 격렬하게 만세 시위를 하였으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본 비는 곡수리 3.1만세운동 영웅들의 충혼과 고귀한 희생정신을 높이 기리기 위해 2021년 6월 6일에 곡수1리 마을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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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영 기념비
지평면의 의병장 괴은 이춘영(1868 - 1896)은 본관 덕수(德水). 자 우삼(友三). 호 괴은(槐隱). 경기 양평(楊平) 출생.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원주(原州)에서 안승우(安承禹)와 함께 1895년 11월 28일 원주 안창에서 지평 의병을 일으켜, 지평 포군장 김백선과 그 부하 400여 명을 포섭, 단양(丹陽)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후 풍기(豊基)로 진격하다가 친척 이민옥(李敏玉)의 배신으로 관군의 습격을 받고 충주(忠州)로 피신, 유인석(柳麟錫)의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재차 의병활동을 하였다. 조령(鳥嶺)·달천(川)·수안보(水安堡)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28세에 충주에서 전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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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맥 지평의병발상지 표지석
을미의병 발생 118주년을 맞아 2013년에 지평면 입구 로터리에 국맥 지평의병발상지 표석을 세운 것이다. 지평의병은 1895년(을미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같은 해 11월에 공포된 단발령에 항거하여 지평 출신인 이춘영과 김백선 등이 일으킨 의병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창의된 을미의병의 발원지이다. 당시 포군 400여 명을 모집하여, 당시 관아의 반대를 피해 원주 안창으로 이동한 후 을미년 11월 28일 지평의병 창의를 선포한 후 원주·제천·단양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주변 지역 의병 봉기를 자극하는 한편, 제천 남산성 전투, 충주성 점령, 단양 장회협 대첩 등의 여러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다. 이후 간도와 만주로 건너가 임시정부 수립 때까지 싸움을 전개했고, 이후 독립군에 이어 광복군으로 편입되고 해방 후 국군으로 이어져 국맥 지평의병으로 불린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공격을 차단하여 재 반격의 기틀을 마련한 ‘지평리전투’ 역시 지평 의병이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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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원 추모비
금계 이근원(1840~1918)은 조선 말기 양평이 낳은 유림의 태두 화서 이항로의 후진 문하생으로, 화서 이항로 서거 후에 동문이었던 김평묵과 류중교 두 선생에게서 다시 수학해 화서학파의 구심점이 됐으며, 위정척사사상을 몸소 실천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유학자이다. 일제강점기하의 시대 속에서 직접 의병을 일으키는 데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면서 의병군 자금을 지원하는 등 정신적 항쟁을 하였다. 금계 이근원 선생의 추모비는 2009년 8월 15일 지평의병정신선양회가 양평군의 지원을 받아 건립하였으며, 비신이 2.1m 정도 규모, 비문은 약 2,400여 자로 이루어졌고, 비문은 벽계서당 훈장 정석현이 짓고, 두전(頭篆)은 사단법인 화서학회 이사장 이종익이 썼으며, 교정은 정삼현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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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원 묘
금계 이근원(1840~1918)은 조선 말기 양평이 낳은 유림의 태두 화서 이항로의 후진 문하생으로, 화서 이항로 서거 후에 동문이었던 김평묵과 류중교 두 선생에게서 다시 수학해 화서학파의 구심점이 됐으며, 위정척사사상을 몸소 실천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유학자이다. 일제강점기하의 시대 속에서 직접 의병을 일으키는 데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면서 의병군 자금을 지원하는 등 정신적 항쟁을 하였던 이근원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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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의병항쟁지 구둔치 표지석
구둔치는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울진까지 이어지는 옛 관동대로(평해로)로, 임진왜란 때 의병이 아홉 개의 진을 쳤다는 전설이 있으며, 1907년 정미의병 때에는 구둔치고개에서 의병과 일본군의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다. 3.1절의 97주년을 맞아 2016년에 구한말 의병과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를 중심으로 ‘기억의 징검다리’ 문화재 표석을 7개소에 설치했으며, 그중 한 곳이 구둔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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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기념비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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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의병, 지평리전투 기념관
1895년 을미의병 당시 양평군 지평면 출신의 김백선·이춘영 등의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켜 원주·제천·단양·충주 등지에서 벌인 ‘지평의병’의 항일운동을 기념하는 한편, 6·25전쟁 당시 1·4후퇴로 아군이 궁지에 몰렸을 때 한국·미국·프랑스 연합군 5,600여 명이 지평리 일대에서 5만여 중공군을 대항해 처음으로 승리함으로써 아군의 38선 회복을 위한 재반격 계기를 마련한 ‘지평리전투’를 기념하여 만든 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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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선 묘
의병장 김백선(1873 - 1896)은 양평군 청운면 출신으로, 기개와 용력이 비상하고 포수로서의 능력이 탁월해 1890년대부터 지평지역(현, 양평) 포군을 지휘하였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포수 400여 명을 이끌고 이춘영·안승우와 함께 1896년 1월 12일 구한말 최초의 을미의병인 지평의병을 거의하였다. 단양전투 승리 후 유인석 의병부대에 합류하였고 선봉장으로 활약 중 가흥전투 시 중군장인 안승우에게 병력 지원 요청을 하였으나 지원해주지 않아 패퇴하자 안승우에게 거센 항의를 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군율 위반으로 처형당하고 말았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