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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선 묘
윤응선(1853 - 1925)은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및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암 유인석(柳麟錫)이 조직한 호좌의진(湖左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제로 체결되자 월악산(月岳山) 용하동(用夏洞)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논의하다가, 제천시(堤川市) 덕산면(德山面) 광천(廣川)에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2015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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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강하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31일 양평군 강하면 주민 3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9일 강상면 시위와 3월 30일 용문면 시위에 이어서 3월 31일에는 강하면에서 만세시위가 펼쳐졌다. 고종 승하 이후 독립운동을 도모하고 있었던 최대현은 윤기영, 이보원, 신우균 등과 모의하여 3월 31일 오후 11시경 강하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300여 명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최대현은 4월 3일, 4개 면민이 합동으로 추진했던 고읍면 시위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최대현(1852~1931), 윤기영(1871~1941), 이보원(1870~1949), 신우균(1889~1921)은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3월 31일 오후 11시에 이들은 강상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3백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시위는 밤을 세워 다음날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다음 날인 4월 1일 양서면 도곡리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집합한 2천여 명과 함께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4월 3일 강상, 강하, 양서, 고읍 등 4면의 주민 약 4천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때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후 이들은 시위군중을 인솔하고 고읍면 옹암리와 용암리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는 등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최대현은 11월 7일 징역 10월 및 벌금 20원을 받았지만 이에 불복 공소하여, 11월 17일 징역 6월 및 벌금 2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신우균은 10월 5일에, 윤기영과 이보원은 1919년 10월 15일애 태형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최대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윤기영에게는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보원에게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신우균에게는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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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현 집 터
최대현(1852 - 1931)은 대한제국 시기 오위장 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1919년 3월 31일 양평군 강하면 사무소 앞에서 68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면민 30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음 날인 4월 1일 양서면 도곡리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집합한 2천여 명과 함께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4월 3일 강상·강하·양서·고읍 등 4면의 주민 약 4천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때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후 시위군중을 인솔하고 고읍면 옹암리와 용암리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는 등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11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및 벌금 20원을 받고 이에 불복 공소하여,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및 벌금 2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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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현 묘
최대현(1852 - 1931)은 대한제국 시기 오위장(五衛將) 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1919년 3월 31일 양평군 강하면(江下面) 사무소 앞에서 68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면민 30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음 날인 4월 1일 양서면(楊西面) 도곡리(陶谷里)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집합한 2천여 명과 함께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4월 3일 강상(江上)·강하·양서·고읍(古邑) 등 4면의 주민 약 4천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때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후 시위군중을 인솔하고 고읍면 옹암리(瓮岩里)와 용암리(龍岩里)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는 등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11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및 벌금 20원을 받고 이에 불복 공소하여,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및 벌금 2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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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마을 표지석(개군면 양덕리)
개군면은 애국애족(愛國愛族) 의병의 고장이라 칭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고종황제 폐위 후 전국적으로 의병 항쟁이 시작되었을 때, 기자 맥켄지(Fredric A. Mckenzie)가 양평지역을 방문해 지평의병의 모습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양평군 개군면 구미리 입구에 ‘구미리 호국충열, 의병에 고장’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옛 구미포 나루터에서 임진왜란 때 원호 장군이 향병(鄕兵)을 모아 왜군을 기습하여 향군이 승전한 나루터임을 알리는 ‘옛 구미포 나루터’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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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훈 묘
윤태훈(1874 - 1908)은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1907년 음 10월 박장호의진(朴長浩義陣)에 소속되어 의병 30여 명을 거느리고 강원도 평창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박장호는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으로 호는 화남(華南)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되자 강원도 홍천에서 관동의병(關東義兵)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말에는 이강년(李康秊)과 연합하여 경기·강원지역을 넘나들며 일본 군경과 맞서 싸우며,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의병부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박장호의진에 속한 윤태훈은 1907년 12월 20일 자신이 지휘하고 있는 부하 30명과 박성춘(朴聖春)이 거느리고 있는 부하 30여 명을 규합하여 평창군 연평면(蓮坪面) 녹산(鹿山)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다가 패주하였다. 이때 윤태훈은 가지고 있던 총을 묻어 두었다. 또 윤태훈은 1908년 음력 정월 15일 윤응원(尹應元) 등과 합세하여 강원도 홍천 일대에서 항전을 벌였다. 1908년 음 6월경 녹산에 묻어두었던 총을 찾아 가지고 돌아오던 윤태훈은 일본군 울진수비대(蔚珍守備隊)에 체포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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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응 공적비
이만응(1857 - 1938)은 경기 여주(驪州) 사람으로, 1894년 일제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및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일제의 침략 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자, 의병을 봉기하여 일본 세력을 축출하고자 하였다. 1896년 1월 20일 춘천에서 거의하고 이소응(李昭應) 의진의 아장(亞將, 두 번째로 높은 장수)으로 활약하며 의진의 중요한 일을 함께 의논하고 추진하였으며, 1896년 1월 관찰사 겸 선유사로 부임하는 조인승을 처단하고, 서울 진격 중 가평 벌업산 전투에서 교전을 치르면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2002년 10월 20일에 그의 묘 아래쪽에 공적비가 세워졌다.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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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응 묘
이만응(1857 - 1938)은 경기 여주(驪州) 사람으로, 1894년 일제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및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 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자, 이만응은 의병을 봉기하여 일본 세력을 축출하고자 하였다. 1896년 1월 20일 춘천에서 거의하고 이소응(李昭應) 의진의 아장(亞將, 두 번째로 높은 장수)으로 활약하며 의진의 중요한 일을 함께 의논하고 추진하였으며, 1896년 1월 관찰사 겸 선유사로 부임하는 조인승을 처단하고 서울 진격 중 가평 벌업산 전투에서 교전을 치루면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타계 후 대신면 무촌리 원통산하에 자리 잡았으나, 다음 해에 양평군 개군면 앙덕리로 이장하였고, 그 후 1999년 부친의 묘 아래인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2002년 10월 20일에 그의 묘 아래쪽에 공적비가 세워졌다.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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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조씨 송덕비(이만응 어머니)
춘천 의병장 삼 형제(의병장 이만응의 어머니)의 어머니인 백천조씨의 평소 가르침인 “효도는 마땅히 힘을 다하는 것이요, 충성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야 한다. (孝當竭力 忠則盡命: 효당갈력 충칙진명)”라는 뜻에 따라 슬하의 삼 형제가 을미 춘천의병에 참여하였다, 본 비는 백천조씨의 높으신 사상을 기리고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2002년 10월 20일 후손들이 세웠다. 이진응(1991, 애국장), 이만응(2002, 애족장), 이경응(2000,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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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 유적지
구한말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대표한 화서(華西) 이항로(1792~1868)의 유적지이다. 유학자인 김형묵, 최익현, 양헌수, 유인석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항로의 위정척사론은 김평묵이 발전적으로 집대성하였고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에 의해 실천적 차원에서 의병 항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에 의해 의병 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해 나갔는데, 화서학파들은 을미사변 후부터 대한제국 멸망 직전까지 국내의 제천, 평산, 춘천, 홍천과 국외의 간도 지방과 연해주 등지에서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화서학파의 반개화(反開化), 항일(抗日)운동은 최대 규모로 장기간 지속되어 이후 일제강점기 국내외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곳에는 위정척사사상의 화서학파의 창시자인 화서 이항로의 생가를 비롯하여 묘소와 신도비, 후학을 가르쳤던 벽계강당, 이항로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노산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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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호 친필비 - 사군이충
박장호(1850 - 1922)는 1876년 의암 유인석 등과 병자수호조약 반대 상소를 올리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홍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동의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10년 나라가 강제 합병되자 만주로 망명하였고 1919년 3.1운동 후 만주에서 여러 독립운동 단체 대표 등 5백여 명이 결성한 대한독립단의 도총재로 선출되어 항일 독립투쟁에 전념하였다. 독립투쟁하던 선생은 1922년 4월 2일 일제가 파견한 밀정에 의해 이국땅에서 순국하였다. 화남 박장호의 서거 90주기를 맞아 2012년에 세워진 친필비 事君以忠(사군이충)과 함께, 주위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옥중 휘호비와 백범 김구 휘호비가 같이 서 있다. 事君以忠(사군이충)은 화남 박장호의 친필로,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섬겨라’하는 가르침을 나타낸 것이다. 1962년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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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면 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
1919년 3월 10일에 백낙기, 최학순 등이 주민들에게 문호리 장날에 문상학교(현, 문호초등학교)로 모이라는 내용의 통문을 비밀리에 돌렸다. 통문을 받은 주민 수백여 명은 문호리 장날에 모여 함께 만세를 불렀으며 날이 저물도록 행진을 계속하였다. 일본 경찰이 발포하여 시위대를 진압하였고 주민 여러 명을 체포하였다. 체포된 최학순은 양주헌병대를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