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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우 집
원태근(1882-1950)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그는 일제의 침략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응징하여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등박문과 임권조(林權助)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수렵을 한 뒤 경부선(京釜線) 철도열차에 승차하여 오후 6시 13분경 안양(安陽 : 지금의 安養)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된 때에 이등박문을 목표로 투석하여 이등의 왼쪽눈과 안면에 부상을 입혔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05년 11월 하순 경성헌병사령부(京城憲兵司令部)에서 태(笞) 10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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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가래비3.1운동기념비
가래비 3·1운동기념비는 1919년 3월 28일 만세배미에서 일어난 가래비 3·1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86년에 12월에 건립되었다. 앞면에는 ‘가래비삼일운동기념비(가래비三一運動紀念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건립 후기와 추모비, 그리고 취지문과 건립 위원회 명단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변태섭이 지었고, 글씨는 근당(槿堂) 양택동(梁澤東)이 썼다. 건립 후기문은 경기도 학예연구관 강대욱이 붙였다. 2007년 10월 16일 인근 만세배미 자리에 새롭게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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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
양주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는 양주 가래비에서 일제에 저항하다 희생된 백남식·이용화·김진성 열사 등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1986년 건립된 가래비 3·1운동기념비의 위치가 협소하고 도로에 인접해 있어 접근성이 떨어지므로, 2007년 10월 16일 가래비 3·1 만세 운동의 현장인 만세배미에 새로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횃불 모양 순국 기념비의 좌대 폭 4.1m, 좌대 높이 2.5m, 비신 너비 1.1m, 비 높이 6m, 봉화 폭 1.2m, 봉화 높이 1.5m이며, 옆면에는 후기문과 독립선언문 등이 새겨져 있다. 양주시 지원과 민간의 성금 협찬으로 설립된 순국 기념비 양옆에는 가래비 3·1 만세운동 당시 순국한 백남식·이용화·김진성의 흉상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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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태 묘
안종태(1883~1920)는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에 살면서 3.1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1919년 3월 27일 밤, 동생인 안종규와 함께 연곡리의 주민들에게 연설을 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고, 28일에도 인근 주민 600여 명을 규합하여 백석면 오산리 들판에서 대규모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시위대열을 이끌고 백석면사무소까지 진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5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고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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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순 묘
윤인순(1880 - 1909)은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양주에서 의진을 형성하여 양주, 파주, 적성, 포천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양주에서 의진을 형성하여 양주·파주·적성·포천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1907년 말경 13도연합의진에 참여하여 서울진공작전을 폈으나 좌절되었다. 그후 허위(許蔿)를 대장으로 하여 임진강 일대에서 잔류 의병들을 규합하여 부장으로 활약하다가, 1908년 6월 허위가 잡힌 뒤 30∼40명의 소규모 의병을 인솔하고 파주·적성·양주 등지를 전전하면서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1909년 연합부대를 형성하여 양주·파주·포천·영평·연천·삭녕·김천·배천·연안·장단을 연결하는 육상과 해상 도서지방 등지에서 활약하며 항전을 계속하다가 1909년 3월 17일 양주 북방 40리 지점에서 삭녕수비대와 전투 중 부하 16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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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화 묘
이용화(1879 - 1919)는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출신으로, 김진성·백남식 등과 함께 3월 28일 양주군 광적면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마을을 돌며 주민들에게 시위계획을 알리고, 일장기를 고쳐 태극기를 제작 후, 3월 28일 가납리에서 만세를 부른 후 해산하던 광적·백석면민들과 합세하였다. 총 950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는 논 가운데에 모여 오후 4시경 시위를 재개하였는데, 의정부에서 급파된 헌병과 광적면장이 주모자를 찾자 이들을 크게 꾸짖었다. 시위대의 기세에 눌린 면장이 도망가자, 시위대는 일본 헌병과 면장에게 돌팔매질을 시작하였고 시위대의 선두에서 만세 시위를 이끌던 이용화는 일본 헌병의 무차별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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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대 묘
의암 정용대(1882 - 1910)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 출신으로, 대한제국 때에 적성, 풍덕, 김포, 통진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한국군 특무정교(特務正校)였던 그는 군대 강제 해산에 대한 의분으로 스스로 창의좌장군(倡義左將軍)이 되어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경기도 양주를 비롯한 적성·풍덕·교하·통진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2월 27일에서 3월 2일에 걸쳐 일본 헌병대 및 경찰대와 교전하였으며,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군자금 조달을 풍족히 하여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김포와 적성 등지에서 군량미와 금품을 징발하며 전투를 준비하다가 경기도 일대의 의병소탕전을 전개한 일본 토벌대에 의하여 1909년(순종 3) 10월 28일 체포되어 경성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1월 26일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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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집
조소앙(1887 - 1958)은 파주 교하에서 출생한 것으로 전해지며, 일본 유학 시절인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동료 유학생들과 함께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에서 을사오적 등 매국노를 규탄하는 대회를 개최하고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에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규식, 박은식, 홍명희 등과 함께 박달학원에서 청년 혁명가를 양성하였다. 1917년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의제로 제출하여 국제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19년 2월에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39명 명의의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고,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에 사회당을 창당하고, 1950년 총선에서 당선되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1958년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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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 묘
조용하(1882 - 1937)는 상해임시정부 외무총장 조소앙의 형이며, 일제강점기 경학사(耕學社), 하와이 한국독립단(韓國獨立團), 한인협회(韓人協會) 등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자 외교관이다. 조용한은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는데, 이에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른 뒤, 출옥 후 1928년 5월 다시 중국 상하이로 도항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 외교총장인 친형 조소앙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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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필선 추모비
조필선(1888 - 1965)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27일 양주군 백석면(百石面) 연곡리(連谷里)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였으며, 이튿날인 3월 28일에도 6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오산리(梧山里) 들판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백석면사무소 앞까지 시위행진 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그해 5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갸월 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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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규 묘
안종규(1889 - 1946)는 경기도 양주(楊州)군 백석면 연곡리 구장(區長)이었다. 1919년 3월 초순 민족대표들이 조선독립선언을 하자 이에 찬동하여 양주군 백석면에서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3월 27일 다수의 지역 주민들을 규합하여 친형인 안종태와 함께 군중에 대하여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어 3월 28일에도 오산리 들판에서 인근 주민 600여 명을 규합하여 면사무소 앞까지 진출하여 만세시위를 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5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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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필선 묘
조필선(1888 - 1965)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27일 양주군 백석면(百石面) 연곡리(連谷里)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였으며, 이튿날인 3월 28일에도 6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오산리(梧山里) 들판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백석면사무소 앞까지 시위행진 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그해 5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