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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공립보통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양성공립보통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3월 11일 양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으로 안성에서 최초로 만세 시위가 벌어진 곳이다. 1919년 3월 11일 양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는 소식을 들고 학교 운동장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에서 양성면 덕봉리 출신의 보성전문학교 학생이었던 남진우는 오전 11시경 조회시간에 학교에 와서 일본인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국인 교사 및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 양성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는 이후 4월 1일 일어난 원곡면·양성면 2,000여 주민에 의한 격렬한 시위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남진우(1899~1933)는 이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2월 4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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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3.1독립운동발상지비
양성의 3․1운동은 안성군 양성공립보통학교 전교생이 기미년(1919년) 3월 11일 오전 11시 돌연 교정에서 부른 독립 만세가 기폭제가 되어 4월 1일 밤 양성면과 원곡면민 2천여 명의 군중이 동항리에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외친 사건이다. 경찰관 주재소가 지척에 있었으며 일본인 교장과 교사가 제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정과 뒷동산에서 독립만세를 여러 날 외쳤고, 추후 이것이 양성지역은 물론 안성지역 3.1 독립만세운동의 계기가 되었기에 선배들의 고귀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31회 졸업생이 양성초등학교 내에 1997년 5월 5일 세운 표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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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선 묘
오창선(1884 - 1974)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며, 1919년 양성과 원곡 지역의 3.1운동 선봉 주동자이다. 그는 원곡면, 양성면 주민 2천여 명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일경 주재소와 우편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방화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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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근 묘
오정근(1886 - 1954)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양성면(陽城面) 및 원곡면(元谷面)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원곡면과 양성면 주민 2천여 명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일경 주재소와 우편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방화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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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선 묘
오윤선(1893 - 1960)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양성면(陽城面) 및 원곡면(元谷面)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주민 2천여 명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일경 주재소와 우편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기물과 건물을 파괴, 방화하는 등 앞장서서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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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삼 묘
윤영삼(1891 - 1919)은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양성면(陽城面) 및 원곡면(元谷面)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주민 2천여 명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일경 주재소와 우편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기물과 건물을 파괴, 방화하는 등 격렬한 만세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취조받던 중 모진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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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봉 묘
손정봉(1896 - 1971)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양성면(陽城面) 및 원곡면(元谷面)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주민 2천여 명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일경 주재소와 우편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기물과 건물을 파괴, 방화하는 등 앞장서서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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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만흥 묘
염만흥(1878 - 1928)은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원곡에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후 양성으로 옮겨가 양성면민과 합류하여 양성주재소 앞에서도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세 번의 재판 끝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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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독립만세항쟁 2일간 해방지 동상
안성의 원곡·양성면은 일제 식민통치기관에 저항하며 가장 격렬한 만세운동을 펼쳐 일제의 통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2일간의 해방'을 이루었다.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과 함께 3·1운동 전국 3대 실력 항쟁지로 손꼽히고 민족대표의 재판에 인용되기도 하였다. 본 사적은 3·1운동 당시 원곡·양성면에 주재 중인 경찰주재소, 통신선, 우편소, 면사무소와 일본인 대금업자 집 등과 함께 면사무소를 모조리 방화 및 파괴하여 일제 통치기관을 몰아내고 2일간의 해방 공간을 만든 항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조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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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항쟁동상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원곡면민 1,000여 명은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현재의 원곡파출소 앞 만세광장에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면장과 면서기를 앞세우고 양성면으로 돌진하였다. 때마침 양성 주재소 앞에서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이고 해산하려던 양성주민 1,000여 명과 조우하여, 연합한 2,000여 명의 시위대는 양성 주재소, 우편소, 일본인 가옥과 상점, 그리고 면사무소를 차례로 돌면서 파괴 및 방화함으로써, 서부 안성을 일제의 통치로부터 2일간 해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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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항쟁지비(원곡면)
이 곳은 1919년 원곡·양성 3·1운동의 진원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원곡면사무소 앞에 세워진 비석이다. 이 지역은 3·1운동 때 전국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지역으로 황해도 수안, 평북 의주와 더불어 전국 3대 실력 항쟁지로 꼽히고 있다. 실제 이 지역 주민의 용감한 항쟁으로 경기 안성 서부지역을 2일간 해방시킨 기록도 가지고 있다. 원곡면 주민들은 1919년 3월 25일부터 매일 이곳에 모여 만세시위를 거듭하다 4월 1일 저녁 이유석·홍창섭·이덕순·이근수,·이희룡·최은식 등의 주도로 1천여 명이 대열을 지어 이웃 양성면으로 돌진 그곳 주민들과 합세하여 경찰관 주재소·면사무소 등 일제 통치기관과 일인 상점들을 방화·파괴하고 일본인들을 몰아냈다. 이어 4월 2일 새벽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원곡면사무소를 불태웠다. 또한 시위대는 평택의 경부선 철도를 차단하고 부근 남산에서 실력항쟁을 벌리고자 준비하다 일본군의 잔혹한 탄압을 받았다. 피검 361명, 순국 24위, 옥고 117명, 태형 40명, 민가 소실 9동의 피해를 입었으며, 공공시설 훼손 배상 및 취학방해 등 전국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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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필 묘
송재필(1888 - 1965)은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원곡의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 시위를 벌이고, 양성으로 옮겨가 양성면민과 합류하여 양성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의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