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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환 3.1운동기념비
김세환(1889-1945) 선생은 3·1운동 때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이다.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를 졸업한 후 일본 중앙대학으로 유학하여 새로운 학문을 배운 후 다시 귀국하여 수원 상업회의소(水原商業會議所)에 근무하다가. 교육사업에 종사하기로 결심하고 사직한 후 미국 선교사 「밀리」의 후원을 받아, 수원 삼일남녀학교(三一男女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또 기독교 청년회에 가입하여 조국독립을 위하여 노력하던 중, 조국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11일 서울 당주동(唐珠洞)의 박희도(朴熙道)로부터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달 21일에는 이갑성(李甲成)의 집에서 독립선언의 방법으로 천도교측과 연합하는 문제에 대해 토의하기 위한 기독교측 대표들의 철야회합에 참가하였다. 이 때 그는 이 문제를 이인환(李寅煥)과 함태영(咸台永)에게 일임하고 지방의 동지 규합을 위해 22일 서울을 출발하여, 충청남도와 고향인 수원·이천(利川)지역에서 활동하였다. 24일 일단 서울로 올라와서 결과를 보고한 후,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동지 규합에 온 힘을 기울였다.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일경에 체포되었고, 그도 주도급 인물로 3월 13일 체포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친 재판 끝에 다음 해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출감한 뒤에도 교육사업을 위하여 재산가인 홍사훈(洪思勳)을 설득하여, 수원 상업학교를 설립하여 2세 교육을 통한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조국의 광복과 함께 자신이 건립한 수원 상업학교 사택에서 5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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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학교 아담스기념관
수원의 삼일학교는 1903년 수원 출신 애국지사이자 기독교인인 이하영(李夏榮), 임면수(林冕洙) 선생 등이 주동이 되어 당시 수원군 보시동 북감리교회에서 문을 연 매일학교가 삼일학교의 전신이다. 삼일학교는 만세운동 이전인 1915년 삼일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아담스 기념관은 1923년 삼일학교의 새 교사로 지어졌다. 삼일학교라는 교명은 기독교 교리의 삼위일체를 뜻하고 아담스(Adams)는 삼일학교 신축 교사를 지으라고 헌금을 모아 보내준 미국 교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삼일이 기미년의 3·1운동을 계속 연상시킨다는 사유로 1938년 결국 팔달심상소학교로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당시 교무주임 유부영(柳富榮) 선생은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창씨개명을 거부하다 강제 징용되었고, 돌아오지 못했다. 삼일이라는 학교 이름은 해방 후 1946년이 되어서야 되찾을 수 있었다. 아담스 기념관은 중국인 시공 책임자인 왕영덕의 감독 아래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이다. 아담스 기념관은 한국전쟁 시기에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전쟁 당시 아담스 기념관은 네덜란드 군의 막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담스 기념관은 현재도 도서열람실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기도기념물 제 175호로 지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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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민단 주요활동지(매향중학교)
매항중학교는 학생독립운동단체 구국민단의 주요 활동지였던 삼일여학교의 후신이다. 본 사적은 매향중학교 정문에 위치하고 있다. 구국민단(救國民團)은 1920년 수원에 조직되었던 독립운동결사단체로 1919년 9월 수원군 동면 남창리에 거주하던 학생 박선태(朴善泰)는 같은 수원군 일형면 하광교리에 거주하던 학생 이종상(李種祥)·이득수(李得壽) 등과 회합하여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펴기로 하고, 1920년 7월경까지 수원일대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창가집과 『대한민보』 등 다수를 반포하였다. 한편, 1920년 6월 삼일여학교 여교사 차인재(1895-1971)의 소개로 졸업생 임순남, 최문순(1903-미상) 등이 활동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6월 20일에 임순남(林順南)·최문순(崔文順)·이선경(李善卿) 등 여학생을 동지로 포섭하여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박선태는 단장, 이득수는 부단장이 되어, 조선독립국가의 실현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입옥 또는 순국한 지사의 가족 및 유족의 구조를 목표로 삼아 활동하였다. 이들은 수원의 서호(西湖) 또는 삼일학교에서 비밀회합을 하며 목표달성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특히 여학생들은 장차 간호부가 되어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 이들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실형 또는 집행유예선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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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환 집
김세환(1889-1945) 선생은 3·1운동 때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이다.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를 졸업한 후 일본 중앙대학으로 유학하여 새로운 학문을 배운 후 다시 귀국하여 수원 상업회의소(水原商業會議所)에 근무하다가. 교육사업에 종사하기로 결심하고 사직한 후 미국 선교사 「밀리」의 후원을 받아, 수원 삼일남녀학교(三一男女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또 기독교 청년회에 가입하여 조국독립을 위하여 노력하던 중, 조국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11일 서울 당주동(唐珠洞)의 박희도(朴熙道)로부터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달 21일에는 이갑성(李甲成)의 집에서 독립선언의 방법으로 천도교측과 연합하는 문제에 대해 토의하기 위한 기독교측 대표들의 철야회합에 참가하였다. 이 때 그는 이 문제를 이인환(李寅煥)과 함태영(咸台永)에게 일임하고 지방의 동지 규합을 위해 22일 서울을 출발하여, 충청남도와 고향인 수원·이천(利川)지역에서 활동하였다. 24일 일단 서울로 올라와서 결과를 보고한 후,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동지 규합에 온 힘을 기울였다.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일경에 체포되었고, 그도 주도급 인물로 3월 13일 체포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친 재판 끝에 다음 해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출감한 뒤에도 교육사업을 위하여 재산가인 홍사훈(洪思勳)을 설득하여, 수원 상업학교를 설립하여 2세 교육을 통한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조국의 광복과 함께 자신이 건립한 수원 상업학교 사택에서 5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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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시 삼일독립운동기념비
시흥시 삼일독립운동기념비는 조국 광복에 대한 민족적 염원을 후세에 기리고 1919년 시흥시 지역 3.1만세운동 참여자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군자면 만세 시위의 현장이었던 곳에 시민들의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주탑은 자주독립의 의지와 광복을 향한 염원을 담아 솟아오르는 불꽃을 형상화하고, 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민족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태극기를 새겨 넣었다. 전면에는 시흥시 지역 3.1만세운동의 함성을 상징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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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모리 경찰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이 고장에서 있었던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터에 안내판을 세운 것이다. 거모리 경찰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는 강은식(1885-미상) 등의 주도로 시흥군 군자면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4월 3일에 "거모 경찰관 주재소 및 군자면사무소를 불질러 부숴버리자."라는 격문이 각 동리에 배포되었다.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지키기 위해 무장한 순사 6명과 군인 7명이 영등포에서 거모리로 파견되었다. 그럼에도 1919년 4월 4일 오전 11시 무렵에 경찰주재소 부근에는 1,0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였다. 강은식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위를 이끌었다. 경찰과 군인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으나 시위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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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군자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4월 4일 시흥군 군자면 면민 수백 명이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4월 3일에 거모경찰관주재소 및 군자면사무소를 불질러 부숴버린다는 격문이 군자면 각 동리에 배포되었다. 그러나 이 첩지가 하루 전 일경에게 발각되면서 면사무소 주변에는 영등포로부터 파견된 순사 6명, 군인 7명이 무장 경계하고 있었다. 4월 4일 오전 11시경 경찰관주재소 부근에는 군자면 면민 수백 명이 모였다. 그리고 군자면사무소 앞에서 원곡리에 사는 강은식이 군중 속으로 들어가 태극기를 휘두르며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격렬한 기세로 주민들이 시위를 벌이자 당황한 일제 경찰은 총을 쏘아 이를 해산시키고자 했지만 일부만이 흩어졌을 뿐 시위는 계속되었다.같은 시각 죽율리에 사는 김천복도 죽율리 주민들을 설득하여서 거모리로 향하였다. 거모리로 가는 도중 총소리가 나자 일부가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김천복과 몇몇 사람들은 길을 우회하여 만세시위에 합세하였다. 김천복과 죽율리 주민들도 면사무소 및 주재소 부근에 집합한 수백 명의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천복(1897~1968)은 시흥군 군자면 죽율리에서 강은식(1885~미상)은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거모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김천복이 민족대표의 조선독립선언 발표 이후 이에 호응하기 위하여 1919년 4월 4일 군자면 죽률리 주민들을 대상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하여 거모리에 있는 면사무소 부근에 집합하라고 권하였다. 김찬복은 이장 집에 주민 수십 여 명을 모아 거모리를 향하여 행진하였으나 행진 도중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시위 대열은 흩어졌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찬복 등은 계속 전진하여 거모리 면사무소 및 경찰관주재소 부근에 이르렀다. 한편, 강은식도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하여 거모리로 향하였다. 면사무소와 주재소 부근에 수백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대열에 합류한 강은식은 태극기를 흔들고 군중을 독려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붙잡힌 김천복은 1919년 5월 2일에, 강은식은 1919년 7월 31일 징역 1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김천복에게는 2008년에, 강은식에게는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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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산 묘
장수산(1900-1981)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으로, 1919년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는데, 동리 사람들을 계몽하여 독립만세시위를 펼 것을 계획하고 1919년 4월 6일 '비밀통고문(秘密通告文)'을 제작하여 각 동리의 구장(區長)에게 전달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같은 해 5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 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였으나 7월 17일 경성복심법원과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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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정호 송덕비
소작인들의 곤궁함을 알고 당시로는 드물게 금전적인 부조를 해주어 칭송받은 낭정호(미상-미상)의 덕을 기려 일제강점기에 소작인들이 세운 비로, 시흥군 군자면 장현리에서 권희(權憘) 외 37명의 소작인이 돈을 모아 송덕비를 건립하였는데, 소작인 중 한 사람이었던 권희는 1919년 4월 7일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장현리 만세 시위 계획을 주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된 독립유공자이다. 만세운동 이후 가세가 기울어 경성 지주 낭정호의 소작농이 되었으며, 1932년 여민동락(與民同樂) 소작인회 대표를 맡아 소작료 고정세율을 받아내 10년간 변동이 없게 되자 선의에 보답하는 낭정호 송덕비 건립을 추진하여 비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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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욱 기념비
윤동욱(尹東旭, 1891-1968)은 1891년(고종 28)에 산현리에서 출생하였다. 29세가 되던 1919년 3월 30일, 1,000여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전개되었던 시흥군 수암면 비석거리의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시위를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는데, 이날의 만세운동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송치되었고 1919년 5월, 경성법원으로부터 8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았으며, 결국 태형 90도에 처해졌다.1923년 이후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고, 해방 후에는 5년간 산현리 구장을 역임, 지역 재건에 힘쓰다가 1968년 77세의 일기로 산현리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1996년 8월 15일,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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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산 기념비(매꼴공원)
장수산(1900-1981)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으로, 1919년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는데, 동리 사람들을 계몽하여 독립만세시위를 펼 것을 계획하고 1919년 4월 6일 '비밀통고문(秘密通告文)'을 제작하여 각 동리의 구장(區長)에게 전달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같은 해 5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 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였으나 7월 17일 경성복심법원과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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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욱 부조
윤동욱(尹東旭, 1891-1968)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으로 1919년 3월 30일 수암면(秀岩面) 수암리(秀岩里)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수암면 면내 18개 동리(洞里) 주민이 3월 30일 오전 10시에 비립동(碑立洞)에 모두 모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작정한데서 비롯되었다. 이날 모이기로 한 비립동에는 2,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여들었는데, 윤동욱은 마을 주민을 이끌고 여기에 참가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유익수(柳益秀)·윤병소(尹秉昭) 등이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그 뒤를 시위군중은 만세를 고창하며 따랐다. 이들은 주재소·보통학교·향교 등을 돌여 행진을 벌였다. 윤동욱은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며 보통학교 앞을 지날 때, 순사 임건호(任健鎬)를 만나 만세시위에 가담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그는 불응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이해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8월을 받았으나, 공소하여 같은 해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태(笞)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