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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조 묘
정운조(1888 - 1951)는 경남 창원(昌原) 출신으로, 1919년 4월 경남 창원군 웅동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웅동면 계광학교(啓光學校)의 직원인 주기용 등이 주도한 시위에 참여하였고, 400명의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후 체포되어 1919년 5월 21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 형을 받았으며, 1930년 웅천소작농조의 집행위원으로 소작료를 절감하고, 소작 조건을 개선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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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신 묘
정제신(1886 - 1928)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3.1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참여하여, 시위대를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하지만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강제해산 되었고, 일경에 체포되어 같은 해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1928년 5월 31일 계속되는 일경의 핍박과 박해에 견디다 못하여 1928년 5월 31일 자결로써 항거하였다.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정제신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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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맹선, 조천일, 조창선, 조만선 기념비
조창선(1897 - 193)은 황해 평산(平山) 출신으로, 1920년 7월 비밀결사 주비단(籌備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경고문을 자산가들에게 배포하였고, 1921년 4월에는 20여 명의 동지들과 협의하여 공채증서와 군자금 모집 통지서를 동장을 통해 평산군 고지면(古之面)의 동민들에게 배부토록 하여 평산군 일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수합하였다.그 후 밀정 처단 사건 이후 이만석의 자택에 은신하고 있던 중 일경에게 발각되어 치열한 교전 끝에 붙잡혀, 1923년 1월 3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5월 1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6월 11일 평양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애국지사 조창선 영모기념비는 후손들이 2015년에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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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석 묘
김중석(1883 - 1966)은 함남 함흥(咸興) 출신으로, 1919년 함흥군 함흥면에 있는 사립 영신학교 교사로 재직 중 함흥지역 3.1운동을 주동하여 독립선언서 3,000여 매를 등사하고 태극기 10여 매를 제작, 독립만세시위를 위한 자금을 조달하는 등 활동하다가 거사 당일 아침에 일경에게 시위 계획이 탄로되어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교편을 잡으면서 은밀히 한국 역사를 가르치고 민족 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으며, 1938년에는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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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집
김규식(1882 - 1931)은 대한제국 시기에 시위대 장교 등으로 재직하다가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의병 투쟁에 합류, 철원 지역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고 무기를 구입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기도 했으며, 1919년 12월 북로군정서가 조직되자 사단장으로 취임, 이후 교관 등으로 활동하며 청년 교육에 힘썼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같은 해 대한독립군단이 편성되자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1921년 자유시참변이 일어나자, 김규식은 부대를 재편성하면서 군사를 훈련하고 영농활동을 벌였다. 1925년 신민부, 1926년 고려혁명당 등에서 활동하고 장기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연길현에 학교를 설립하였고, 이후 1931년 3월 공산당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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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수 구 묘
이아수(1898 - 1968)는 정신여학교 3년생으로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가, 남대문역에서 학생 및 시민으로 구성된 대규모 시위대에 합류하여 독립기를 내세우고 적포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를 연호하며 시가행진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과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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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창의대군 수택리 집결지 기념비
'13도창의군’을 재조명하고, 의병들의 희생과 업적을 후세에 알리고자 2020년 12월에 구리시와 13도창의군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원수부 13도 창의대진 수택리 집결지 기념비’를 경기도 구리시 수택동 846-7, 장자호수생태체험관과 장자교 사이에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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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구리시 아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아천리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8일에 양주 구리면 아천리에서 면서기인 이강덕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심점봉 등 아천리 주민 수십 명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는 오후 5시 무렵에 이웃 동리인 토평리와 교문리까지 행진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또한 이들은 다음 날에도 인근 아차산에 올라가 태극기를 산꼭대기에 꽂고 만세를 불렀다. 이강덕, 심점봉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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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덕 묘
이강덕(1892 - 1955)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28·29일 심점봉(沈點奉)과 함께 구리면 아천리(九里面我川里)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당시 면서기로서 동료인 심점봉과 함께 이 날 오후 5시경 수십명의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여, 그들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인근의 토평리(土坪里)·교내리(橋內里) 일대를 시위 행진하였다. 이튿날 시위군중을 인근의 아차산으로 인솔하여 그 곳에 태극기를 꽂아 놓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이 해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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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 항일독립만세운동 기념탑
군포 항일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은 조국 독립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옛 군포 지역민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알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높이 11m의 기념탑은 세 개의 기둥 위에 항일의 혼을 의미하는 불꽃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형상으로 양옆으로는 독립운동을 펼치는 군포시민과 이들을 총으로 제압하려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2016년 3월 군포시에서 건립되어 5월 10일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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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장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동판
1919년 3월 31일에 시흥군 남면 주민과 수원군 의왕면 주민 2,000여 명이 연합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으로, 이것을 안내하는 동판이 바닥에 부착되어 있다. 군포장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시흥군 남면 주민들과 수원군 의왕면 주민들이 연합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31일에 시흥군 남면주민과 수원군 의왕면 주민 약 2,000여 명이 연합하여 군포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군포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군포장역 앞에 있는 경찰 주재소까지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과 군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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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장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군포장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시흥군 남면 주민들과 수원군 의왕면 주민들이 연합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31일에 시흥군 남면 주민과 수원군 의왕면 주민 약 2,000여 명이 연합하여 만세를 외치며 군포장역 앞에 있는 경찰 주재소까지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과 군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시위대는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