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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촌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실촌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실촌면 이선리의 구장이었던 오수식이 주도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4월 6일 오전 7시 무렵에 오수식은 오흥운, 오세인 등 이선리 주민 50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선리로 행진하였다. 이후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오후 2시 무렵 200여 명, 4시 무렵 400여 명으로 그 수가 늘어났다. 시위대는 독립 만세를 외치며 오향리에 있는 면사무소를 거쳐 곤지암으로 행진하였다. 그러나 오수식, 오흥운 등 7명이 곤지암리 헌병주재소의 진압 병력에 체포되었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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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식 묘
오수식(1858 - 1938)은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동년 4월 6일 실촌면 이선리(實村面 二仙里) 구장(區長)으로서 이선리 주민 50명과 만선리 주민 200명을 규합하여 곤지암까지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주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치안을 방해한 죄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주모자로 곤지암 헌병주재소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 1920년 퇴소 후 만주에서 4년여 간의 망명 생활 후 귀향, 1938년 별세하였다. 1990년 8월 15일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오수식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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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추모비
해공 신익희(1894 - 1956) 선생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1919년 김시학,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다가, 4월 10일에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6월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 선생은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되어 조소앙, 엄항섭, 유림 등과 함께 선전 계획 수립, 선전 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회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한 해공 신익희 선생의 추모비는 해공 신익희 선생 추모비 건립위원회에서 1985년에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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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항일운동기념탑
광주시 항일운동기념탑은 남한산성을 기점으로 진행되었던 광주지역 항일운동의 특성을 반영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이 모여 일제에 저항하던 의지를 묘사하였으며 광주, 이천, 양근 등 세 진영이 주축으로 연합하여 남한산성 성벽을 넘어 국가를 수호하고자 하는 모습 자체를 상징하도록 하였다. 남한산성을 의미하는 부조벽 좌측에는 3.1운동 모습을 연출하고, 우측에는 남한산성에서의 의병항쟁 장면을 연출하였다.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광주 출신으로 구한말 의병 춘경 구연영 의병장,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신 정암 이종훈 선생, 임시정부를 대표한 해공 신익희 선생 3인을 재조명하며, 항일운동사에 중요한 격전지이자 역사적인 장소인 남한산성에 항일운동을 재조명하는 뜻을 담아 2020년에 광주시 항일운동기념탑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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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중부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광주군 중부면 주민 200여 명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서의 시위는 1919년 3월 27일 새벽 남한산에 횃불이 오르는 것을 신호로 시작되었다. 이날 오전에 중부면 단대리, 탄리, 수진리 주민 300여 명이 남한산성 남문 아래에 있는 계곡에 모였다. 이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며 산성 안에 있는 옛 중부면사무소(현재 남한산성 행궁) 앞까지 들어갔다. 시위대 중 일부는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온 중부면장을 사무소에서 끌어내어 면장의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쳐 실신시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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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기념관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불교인이자 저항 시인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 운동을 하다가,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겸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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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영 집
구연영(1864-1907)은 경기 광주사람이고 호는 춘경(春景)이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한때 정부관리로 재직하였으나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관직을 사임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에 격분한 그는, 1895년 12월 31일 김하락, 조성학, 김태원 등과 함께 거의하여 경기도 이천에서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하였다. 이천수창의소는 경기도 연합의진의 성격을 띠었으며, 전투적이고 대규모적인 조직편제를 갖추어 1896년 1월 백현(魄峴)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는데, 백현전투는 을미의병사상 최초의 대규모 승리였을 뿐 아니라 의병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한 쾌거였다. 이어 2월 이현(梨峴)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폈으며 전열을 재정비하여 2천여 명으로 군세를 증강한 후 심진원(沈鎭元)의 광주의진(廣州義陣), 이석용(李錫容)의 양근의진(陽根義陣)과 함께 남한산성의진(南漢山城義陣)을 형성하여 남한산성을 공략, 입성하였다. 구연영은 1897년 기독교에 입문하여 1898년 서울 상동교회에서 웹엣청년회를 조직,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02년에는 전도사로서 이천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장춘명(張春明)·한창섭(韓昌燮)·차화춘(車化春) 등 수십명의 동지와 함께 구국회(救國會)를 조직하고 신도대회를 통해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며 항일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구국계몽활동을 폈다. 또한 이천·여주(驪州)·광주(廣州) 일대를 순회하며 상인들의 철시투쟁을 유도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던 중 1907년 7월 16일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구국회 지도자들이 붙잡힐 때 피살·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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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영, 구정서 전투지
1895년 10월 일본이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을미사변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구연영(1864- 1907) 중군장은 서울의 우국지사 김하락, 조성학, 김태원, 신용희 등 여러 장수와 획책하여 양근, 지평, 광주, 안성, 음죽 등지를 중심으로 모병 화포군을 조직하고 이천수창의진을 만들었다. 13년간 남한산성을 비롯한 각지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우고 구국회, 독립협회, 자강회, 친일일진회 타도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진회원들에 밀고로 선생의 장남 구정서와 함께, 부자가 동시에 이천읍에서 총살당하여 44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구정서(1882 - 1907)는 1904년 보안회와 1907년 대한자강회에 가입하여 배일운동에 활동하다가 1907년 경기도 광주에서 부친 구연영이 조직한 구국회에 참여하여 일진회의 친일행위를 성토하며 항일운동을 하던 중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군에게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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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수창의소 의병 전투지(노루목 장터)
1896년 1월에 이천 수창의소 의병이 백현전투에서 패하고 도망가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곳이다. 이천 수창의소(首倡義所)는 김하락을 중심으로 경기도 이천에서 편성된 의병 부대이다. 이천 수창의소 의병은 1896년 1월 18일 일본군 수비대 100여 명이 이천으로 공격해오자 백현(魄峴, 광현(廣峴)으로도 불림)에서 매복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들 의병은 경기도 광주 방면으로 퇴각하는 일본군 수비대를 1월 19일 새벽까지 추격하여 노루목 장터에서 거의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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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장터 이천 의병 전투지
장항장터 이천 의병 전투지는 연합 의병부대가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둔 곳이다. 1896년 1월 17일 일본군 수비대 100여 명이 이천 지역 의병을 토벌하고자 공격해왔다. 이때 이천수창의소 의병진은 백현으로 이들을 유인하여 밤낮으로 협공을 가한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서, 전투에 패하여 달아나는 일본군을 밤새도록 추격한 의병진은 광주 노루목(장항) 장터에서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이 전투는 경기도 각 지역 의병진의 연합부대 성격을 가진 이천수창의소가 조직된 이후 첫 번째 대승리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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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안역 의병 전투지
경안역 의병 전투지는 의병 부대가 광주 순사 및 일본 헌병 연합 토벌대와 전투를 벌인 곳이다. 경안역은 옛날에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관리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말을 갈아탈 수 있도록 광주지역에 설치한 일종의 교통 통신 시설이며, 지금의 역동이라는 지명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1908년 1월 8일에 20여 명의 의병부대가 경안역 부근에 출동하여 이천수비대 장교 척후와 전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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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철수 묘
설철수(1914 - 1981)은 경남 창원(昌原) 출신으로, 1934년 경남 창원군 소학교 학생들에게 항일독립사상을 고취시켰고, 1934년 9월 삼동공립보통학교(三東公立普通學校) 훈도(訓導)로 임명된 후 역사 수업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 후 통영제일공립심상소학교(統營第一公立尋常小學校)에서도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다 일경에 붙잡혀 1938년 12월 2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출판법으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설철수는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