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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근거지 흥국사, 만일회비기 비석
흥국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661년에 창건한 사찰로 천년이 넘는 사적으로서 의병장 연기우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다. 의병장 연기우(1865 - 1910)는 경기도 삭령(朔寧) 출신으로 본래 강화 진위대에서 복무하던 군인이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이 강제 해산되면서 거의를 결심하고, 고양 지역에서 의병 조직을 체계화하여 경기도와 황해도 방면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의 순국에 대하여는 두 견해가 서로 엇갈리고 있다.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에는 1910년에 체포 피살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에는 매일신보 기사를 인용하면서 그의 부친 연성한(延成漢)과 함께 인제 일본헌병분대에 의하여 체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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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근 집
장효근(1867 - 1946)은 서울 출신으로 이종일(李鍾一)·오세창(吳世昌) 등과 같이 「제국신문(帝國新聞)」·「대한민보(大韓民報)」를 창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만세보(萬歲報)」를 발간하여 배일사상의 고취와 일진회의 반민족적 행위를 비판하였다. 그는 1898년(광무 2)에 이종일·심상익(沈相翊)·염중모(廉仲模) 등과 함께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중류이하의 민중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폐간될 때까지 언론계에서 활약하였다. 1906년(광무 10)부터 1907년(융희 1)까지는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의 제창으로 만세보를 창간하고, 당시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반민족적 행위를 맹렬히 비판하는 등 민족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다. 1919년 2월 27일에는 천도교 산하 보성사(普成社) 총무로 있으면서, 3·1독립선언서 21,000매를 인쇄하여 배포한 혐의로 3월 1일 체포되어,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5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2년 2월 6일 제2의 3·1운동을 계획하여 주도하였으나, 일본경찰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5년 이후 경기도 고양(高陽)으로 내려와 독립의 일념으로 일기와 시로 마음을 달래면서 여생을 보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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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순 송덕비
양곡 이가순(1867 - 1943)선생은 본래 황해도 출신으로 1867년 11월 출생했다. 이가순 선생은 본관이 완산인데 당시 고양군 지도면 토당리 삼성당 마을에 정착하여 현 농어촌기반공사 설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선생은 청년 시절부터 만주와 연해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원산 감리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3.1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원산에 대성학교와 신간회 원산지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의 주도자가 되어 옥고를 치른 후 고양군으로 이주하였다. 고양군으로 이주한 뒤 고양군 지도면 등의 토지가 한강에 제방이 없고 갈대밭과 갯벌, 가뭄에 취약하여 마치 황무지와 같았다. 이에 이가순 선생은 자신의 사재로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고 수리시설과 관개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리사업을 주관하던 중 1943년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이원재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양군수리조합을 건립하였다.1919년 3·1 만세운동과 1922년 제2의 3·1운동에도 참여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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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행주리 3.1운동만세시위지는 지도면 행주외리와 행주내리 주민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11일 고양군 신도면, 벽제면, 지도면 일대에서 수백 명의 주민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지도면 행주내리, 행주외리 시위대는 등불을 신호로 야간 시위를 벌였는데 일본 경찰이 출동하자 한강으로 배를 띄우고 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독립만세 시위는 계속 전개되어 3월 24일에는 800여 명, 28일에는 5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하였다. 28일의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 헌병들에게 주도자 38명이 체포되었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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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묘
이희승(1897 - 1989)는 경기도 개풍(開豊) 사람이다. 서기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1913년까지 주시경(周時經)의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에서 한글과 국문법을 학습하고 독립사상을 섭취하였다. 1929년에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중심이 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의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1935년의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朝鮮語標準語査定委員會)의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1월부터 1940년 6월까지 조선어학회(조선어연구회를 1931년 1월에 확대 개편)의 〈외래어 표기 및 보수문제 협의회〉의 책임위원으로 이극노(李克魯)·정인섭(鄭寅燮)과 함께 선임되어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하였다. 1934년 5월 국사와 국어국문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단체 진단학회(震檀學會)창립의 발기인이 되어 국학운동에 진력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와 한글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운동(朝鮮語學會運動)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의 선고를 받고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와 한글학회 이사를 역임하면서 국어국문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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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 가족묘소
이광(1879 - 1966)은 충북 청주 사람으로 1970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만주 지방에 민주 정부와 군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만주로 가서 독립기지 설치 및 군관 양성의 사업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다. 1912년에는 북경에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 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후, 1919년 2월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 대표 39명 중 1인으로 참가하였고,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어 상해 임시정부 설립에 공헌하였다. 북경과 남경에서 대한독립당주비회(大韓獨立黨籌備會)와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성암 이광의 묘는 전주이씨 가족묘지 내에 안장되어 있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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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순 기념비
양곡 이가순(1867 - 1943)선생은 본래 황해도 출신으로 1867년 11월 출생했다. 이가순 선생은 본관이 완산인데 당시 고양군 지도면 토당리 삼성당 마을에 정착하여 현 농어촌기반공사 설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선생은 청년 시절부터 만주와 연해주 등을 오고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원산 감리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3.1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원산에 대성학교와 신간회 원산지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의 주도자가 되어 옥고를 치른 후 고양군으로 이주하였다. 고양군으로 이주한 뒤 고양군 지도면 등의 토지가 한강에 제방이 없고 갈대밭과 갯벌, 가뭄에 취약하여 마치 황무지와 같았다. 이에 이가순 선생은 자신의 사재로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고 수리시설과 관개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리사업을 주관 하던 중 1943년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이원재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양군수리조합을 건립하였다. 1919년 3·1 만세운동과 1922년 제2의 3·1운동에도 참여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서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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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독립운동기념탑
고양독립운동기념탑은 고양시 일산문화광장에 있으며, ‘대한독립, 그날의 함성, 현재·미래의 평화 번영’을 부제를 지닌 높이 31m, 길이 8m×8m의 규모이다. 주탑의 형상은 고양의 5천 년 역사 가와지볍씨와 꽃봉오리, 비상하는 날개, 기도하는 손의 형상이 좌우 대칭 모양으로 표현돼 있다. 기념탑의 좌측 은색 파동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고양의 현재와 미래의 찬란한 모습을, 우측의 금색 파동은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고귀하고 뜨거운 애국심을 표현했다. 기념탑 하부에는 고양 출신 독립운동가 74인의 공적과 공훈을 표기한 ‘공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고양시, 광복회 고양시지회에서 2018년 8월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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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 공적비
김찬(1884 - 미상)의 이명은 김용흘(金庸屹)·김남(金男)이 있다. 도만(渡滿) 경위는 자료의 한계 상 알기 어려우나 1919년 중반 서간도(西間島) 창바이현(長白縣) 17도구(道溝)에서 윤덕보(尹德甫)·이희삼(李熙三) 등과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을 설립하였다. 창바이현은 함경도와 마주한 국경 지방이다.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부터 많은 함경도지역 민족운동가들이 이곳으로 건너갔다. 나아가 1919년 만세운동을 거치면서 민족 의식이 고조되자 이들이 중심이 되어 군비단을 설립하였다. 설립 초기에는 참모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11월 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의해 조직이 재정비되자 총무장이 되었다. 단장은 이한평(李漢平)이었고, 그 아래 재무·경무·외교 등의 부서가 편제되었다. 이때 창바이현 8·13·15·18도구 등에 지단(支團)과 지부(支部)를 배치하고 16도구 신창동(新昌洞)에는 통신사무국을 설치했다. 이 같이 짜임새 있는 조직을 갖춘 군비단은 험난한 창바이현의 지리를 십분 이용해 활발한 항일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4월 경에는 경호대장이 되어 본부가 있는 창바이현 17도구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부터 2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경신참변이 1921년 4월까지 이어졌다. 이들 일본군의 공격을 경계하기 위해 본부 경호 임무의 책임자가 되었던 것이다. 경신참변 이후 군비단은 일부 병력을 연해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 병력의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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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우조, 최선화 묘
양우조(1897 - 1964)는 평안남도 강서 사람으로 평양에서 성장하였으며 미국과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로, 상해의 흥사단(興士團)에서 활약 및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창립,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을 비롯한 여러 단체에 소속되어 활약하였고 임시정부에서 재무부 부원으로서 선전위원 겸임 및 예산결산위원장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다. 한국광복군 정령(正領)으로 정훈처 훈련과장의 직을 수행하다가, 광복 후 1946년에 귀국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최선화(1911 - 2003)는 인천 출신으로 애국지사 양우조의 부인이며, 1931년 이화여전(梨花女專)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6년 상해(上海)로 건너가 간호대학을 다니다 퇴학 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 임시정부 재무 차장이던 애국지사 양우조(楊宇朝)를 만나 그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것이 후에 두 사람이 결혼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독립당이 창립되자 가입하여 임시정부를 적극 뒷바라지하였으며,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등에 참여하여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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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탑(고양시현충공원)
고양시 현충공원 현충탑은 6·25전쟁 당시 고양시 출신으로 참전하였다가 전사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1년 고양시청이 건립하였다. 2010년 12월에 고양시는 현충탑 인근의 공원화 사업(고양현충공원)을 완료하고 기존의 현충탑을 헐고 재건립하였으며 위패실 설치와 태극단 묘역 정비도 마쳤다. 현충탑 재건립을 통해 현충시설로서의 목적뿐 아니라 고양시 출신으로 순국한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기 위해 위패실을 새로 설치, 400여 위를 안치하여 애향심 고취와 애국 애족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충공원의 위패실은 2010년 12월 준공하여 417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위패실 앞, 즉 현충탑의 뒷면에 ‘고양을 빛낸 독립운동가’ 74인의 명단이 명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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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중면사무소 3·1운동만세시위지는 당시 고양군 중면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에 고양 각지에서 만세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자, 중면 면장은 주민들에게 시위에 나서지 말 것을 종용하는 한편 일산리 헌병주재소에 주민들의 동향을 보고하였다. 이에 주민들 사이에서 면장과 면서기를 응징하자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고, 3월 25일 밤 주민 50여 명이 헌병주재소에 몰려가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일산 장날인 26일에는 500여 명이 밤에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외치는 한편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28일에도 150여 명의 주민이 횃불을 밝히고 만세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