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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화 묘
경기도 가평(加平) 사람으로 1919년 3월 15일 이윤석(李胤錫)·정흥교(鄭興敎)·장기영(張基榮)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가평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이곳 독립만세 시위지는 3월 14일 서울로부터 우송으로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정흥교가 이윤석 등과 만나 만세시위 계획을 상의하면 시작되었으며, 3월 15일 오전 9시 북면(北面) 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5일 그는 이장인 홍세구(洪世拘)의 집에서 동리사람들과 일차 모임을 한 후, 이들을 인솔하고 면사무소 앞으로 가서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10여 개의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청으로 행진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학교·면사무소 등지로 시위 행진하였다. 이 때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이 주동자 이윤석과 정흥교 등 10여 명을 헌병대 분견소로 강제 연행하였다. 이튿날, 체포된 동지들을 석방하기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2백여 명의 시위군중이 다시 서낭당 고개에 모였다.이날 그도 다시 참여하여, 선두에 서서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분견소로 행진하던 중, 긴급 출동한 헌병 2명과 보조원 4명의 제지를 받았다. 이때 선두에 서서 지휘하던 장기영이 헌병과 승강이를 벌였는데, 헌병은 공포를 쏘아대며 응원병을 요청하여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벌였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이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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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화 묘
경기도 가평(加平) 사람으로, 1919년 3월 15일 정흥교(鄭興敎)·이윤석(李胤錫)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가평군 북면사무소 앞 광장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가평읍내까지 행진시위를 하던 중 정흥교·이윤석이 일군헌병대에 끌려가자, 피검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활동하다가 붙잡혔다.같은 해 4월 26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7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로 감형되자 다시 상고하였으나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6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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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근 사적비
1919년 3·1운동 때 덕천(德川) 서문시장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1924년 경기도 가평(加平)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1934년 11월 12일 임일봉(林一奉)과 오일보(吳一寶)의 권유로 태극교(太極敎)에 입교했다. 태극교는 겉으로 종교를 표방했으나, 명칭에서 보듯이 민족적 성격이 짙은 단체였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태극교에 입교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는 한편 조선 독립을 이루기 위해 동지 규합을 위한 포교 활동을 벌였다. 1934년 11월 15일, 그는 정태용(鄭泰鏞)에게 “조선은 언제까지나 일본에 예속하는 것이 아니라, 4·5년 후에는 악질이 유행하고 병란·재앙이 일어나 현재 인민의 대부분은 사망하고 그때 정왕(鄭王)이 나타나 조선을 독립시키고 충청도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여 왕위에 즉위하고 태극교도는 정왕을 섬기어 영귀한 생활을 하게 되는 고로 태극교에 입교하여 독신해야한다”고 권유하여 입교시켰다.이후 차원익(車元翼) 등을 대상으로 “태극교는 천의에 기초하는 것으로 태극의 세(조선 독립)도 가깝고 성천을 통하여 모국을 얻어 교도는 고위로 나아가 영원히 영귀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포교를 통해 동지들을 규합했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현학근은 1939년 1월 10일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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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목리 공동생활유적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창씨개명, 종교탄압과 강제징용을 피해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광복이 될 때까지 산기슭 곳곳에 반지하식 움집을 짓고 공동생활을 하면서 숯 생산과 벌목 등을 하며 생활한 공동생활유적이다. 본래 1986년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 13호로 지정되었으나 동일한 번지내에 유적이 추가로 확인되면서 2015년에 제 13-1호, 13-2호로 지정되었다. 적목리 공동생활유적 2(가평군 향토문화재 제13-2호)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 적목리 공동생활유적 1(가평군 향토문화재 제13-211호)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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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복 묘
이홍복(1881 - 1945)은 경기도 가평 출신으로, 북면 이곡리(北面 梨谷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최종화(崔宗和)·장순현(張順賢)·장기영(張基榮)·정성교(鄭聖敎) 등 16명과 함께 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15일 북면사무소 앞에서 수백 명의 군중을 모아놓고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더욱 공고하게 단결하기 위하여 무리를 지어 가평읍내 군청으로 행진하였다. 군중은 군청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면서 기세를 올렸는데, 이때 읍내에 있던 많은 사람이 호응하여 군청·학교·면사무소 등지로 시위행진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가평독립운동의 특징은 지극히 평화적이어서 군수나 면장, 혹은 경찰이나 헌병에게 위해(威害)를 가하지 않았고 관공서에 대하여도 밖에서 시위하였을 뿐 내부로 들어가 기물을 파괴하는 등의 일은 없었고 질서정연하였다. 그는 이해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7월 14일 경성복심법원과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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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추모비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에 있는 현등사 삼충단에 설치된 비석으로, 1986년 6월 19일 가평군의 향토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가평 삼충단은 1910년 일제의 무단 침략에 항거하다 자결한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세 분 충신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제단이다. 민영환(1861 - 1905)은 대한제국기 내부대신, 군법교정총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성균관 대사성 재직 시 임오군란으로 부친 민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했다가 복직했다. 러시아 황제 대관식 특명 전권공사, 유럽 6개국 특명 전권공사를 지내며 서양의 문물과 근대화된 모습을 직접 체험했다. 독립협회를 적극 지지했고 일본의 내정간섭에 항거하면서 한직을 전전했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파기를 요구하며 항의했다. 이어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시킬 것을 결심하고 본가에서 자결했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喆),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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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세 추모비
조병세는 본관 양주(楊州). 자 치현(穉顯). 호 산재(山齋). 시호 충정(忠正). 노론파의 명문에서 태어나 음관(蔭官)으로 참봉(參奉)이 되고, 185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을 거쳐 1864년 실록청도청낭청(實錄廳都廳郞廳)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874년 함경도 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에 승진되었고,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을 거쳐 1887년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예조·이조의 판서가 되고, 1889년 한성부판윤·우의정을 거쳐 1893년 좌의정이 되었다. 1894년 중추원 좌의장(中樞院左議長)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은거하였다. 1896년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위하여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였고, 1898년 재상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900년 다시 입궐하여 국정의 개혁을 건의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과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청하기 위하여 고종을 만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거절당하였다. 이어 민영환(閔泳煥) 등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고 입궐하여 조약의 무효와 을사오적의 처형 등을 연소(聯疏)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당하고 표훈원(表勳院)에 연금되었다. 곧 풀려났으나 다시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석고대죄하며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가 또다시 일본헌병에 강제연행되었다. 그 후 가평 향제로 추방되었으나 다시 상경하여 표훈원에서 유소(遺疏)와 각국 공사와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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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추모비
추모비는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에 있는 가평 삼충단에 설치된 비석으로, 1986년 6월 19일 가평군의 향토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가평 삼충단은 1910년 일제의 무단 침략에 항거하다 자결한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세 분 충신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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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곡산 3.1운동 만세 시위지
가장곡산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고양군 벽제면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1919년 3월 27일 밤 9시 무렵 벽제면 관산리 주민인 김자근봉, 정재점, 정의양, 정태용, 최숙석 등은 주민 30여 명과 함께 가장골 마을 뒷산 정상에서 횃불을 올리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김종환, 한기원 등도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횃불이 오르자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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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철 묘
이해철(1878 - 1956)은 경기도 고양(高陽) 출신으로, 1919년 3월 26∼27일 고양군 벽제면(碧蹄面) 대자리(大慈里) 응봉산(鷹峰山)에 올라가서 같은 마을에 사는 권선용(權先用)·이상돌(李上乭) 등의 주도로 30여 명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는 다음날까지 계속되어 독립을 요구하는 함성이 인근 마을까지 파급하게 되자 일경에 의해 시위는 해산되고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이해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5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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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대 3.1운동 암각문
이 암각문은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새긴 기록문이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네 글자와 함께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은 기미년(己未年) 2월 10일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이 작성하였으며 3월 1일 탑동공원(塔洞公園)에서 자신이 독립선언(獨立宣言) 만세를 도창(導唱) 했다.'라는 내용을 새겼다. 이 글을 새긴 시기는 3·1운동 이후로 추정되며, 그 목적은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암각문을 새긴 정재용(1886 - 1976)은 1886년 해주(海州)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로, 1919년 2월 19일 해주에서 상경해 3·1운동의 불을 당겼던 장본인이다. 3.1운동 암각문은 고양시 향토유적 제 3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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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현 묘
송용현(1894 - 1967)은 경기도 개성(開城) 사람이다. 1919년 개성군 중서면 곡령리(中西面 鵠嶺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같은 동리에 사는 허내삼의 주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 4월 1일 허내삼은 자기 동리 주민을 모아 놓고 몽둥이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처음부터 경찰과의 충돌을 각오한 준비였고 몽둥이를 손에 든 수십 명의 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개성 시내로 행진하였다. 이때 그는 몽둥이로 무장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경을 구타하는 등 시위대열을 막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개성경찰서 경찰들과 맞섰다. 이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한 청년행동대로 일경도 망설였으나 끝내 정면 대결로 충돌하여 주동자들이 붙잡히는 바람에 결국 해산되었다. 그 후 그는 이날의 만세시위 주동혐의로 일경에 붙잡혀 이해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죄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항고했으나 10월 4일 경성복심법원과 11월 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됨으로써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