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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만 추모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산13-1 독립운동가마을 표지석 맞은편에 애국지사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덕촌리 독립운동가마을 표지석 앞에는 덕신학교옆 재실 앞에 있던 안내판과 추가로 만든 것이 서 있었다. 이 비는 정순만 선생과, 선생의 아들이 되는 정양필 선생, 그리고 정양필 선생의 부인이자 정순만 선생의 며느리가 되는 이화숙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세 분 모두 건국훈장을 수훈한 유공자이며, 이에 따라 이 곳은 독립운동가 마을로써 추모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독립운동가 정순만, 정순만 선생은 충북 청원 사람으로 1873년 옥산면 덕촌리에서 출생했다. 국내외에서 온 생애를 대한민국독립운동에 바쳤고, 상동교회에서는 간부로서 을사늑약 결사반대 상소운동을 주도하였다. 귀향후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육사업을 전개하며 집안 어른들을 설득 종재를 내어 덕신학교 설립을 발의 하였다. 1906년 국내에서 독립운동 한계를 절감 1906년 북간도로 망명 후 용정에서 이상설과 함께 최초의 신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이요 중국 조선족 교육사의 서막인 서전서숙을 설립 후 운영했다. 연해주(러시아 블라디보스코)로 옮겨 해조신문을 창간하였고 한인 사회 지도자로 활동하며 안중근 의사 의거 때에는 계획을 주도하였고, 안의사 구명 운동등 독립운동가로 격렬히 활약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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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정씨 부사직공파 세천비
충북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는 한말 국권회복 운동과 만주 및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정순만 선생이 태어나신 곳이다.마을 입구에 있는 하동정씨 세천비와 충렬문, 정확한 위치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20-4다.정순만 선생은 충북 청원(淸原) 사람이다. 1896년 3월에 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 창립에 참여하였다.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도총무부장으로 활약하다가 이승만(李承晩)·유근(柳瑾)·나철(羅喆)·안창호(安昌浩)·남궁억(南宮檍)·양기탁(梁起鐸) 등 367명과 함께 붙잡혔다.1902년부터 1904년 사이에 이승만(李承晩)·박용만(朴容萬) 등과 삼만(三萬)으로 결의하여 의형제를 맺고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간도(間島) 용정(龍井)에서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여준(呂準) 등과 함께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민족교육과 독립사상을 주입시켰다. 또한 독립군(獨立軍) 양성 등에 주력하였다. 1907년에는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해아(海牙) 밀사의 여비 1만 8천원을 교포로부터 모금하여 전달하였다.1909년에는 러일전쟁(露日戰爭) 및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전후하여 이범윤(李範允)·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박은식(朴殷植)·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노령(露領)에서 활약하였다. 1910년 연해주(沿海州) 지역에서 〈해조신문(海朝新聞)〉·〈대동공보(大東共報)〉 등을 발간하였다. 또한 13도 의군부(義軍府)·성명회(聲明會)·권업회(勸業會) 등을 창설하여 민족계몽 및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1년 6월 21일에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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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운 공적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장동리 319 마을회관 광장 애국지사 윤병운 선생 공적비를 찾았다. 마을회관 앞 광장, 장동 노인회 건물 앞에 세워져 있다. 해당 공적비는 윤병운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선생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다. 선생이 2018년 광복절 애국장을 수훈한 이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추진됐으며 파평 윤씨 장동문중 종친회 일동이 건립하였다. 윤병운 선생은 서울의 사립 성남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2년 4월 학우 박원배(朴源培)·박병양(朴秉陽)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진당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독서회 형태의 모임을 꾸려 한국역사를 공부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으로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또한 과거의 3.1운동과 같은 거국적인 대규모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며,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저격 등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2월에서 이듬해인 1943년 1월 사이에 윤병운을 비롯해 박원배와 박병양 등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내내 여러 차례 취조와 고문을 당하였으며, 9월 15일 부로 성남중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하였다. 같은 해 12월 18일 대전지방법원(大田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단기 2년, 장기 4년을 선고받았다. 인천소년형무소(仁川少年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4년 4월 11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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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운 집
윤병운 선생의 공훈록에 있는 생가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장동리 393번지를 찾았지만 주민에게 물으니 이곳이 아니라고 한다. 주민들이 알려주신 곳을 와보니 생가 표지석이 서 있다. 이 곳의 주소는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장동리 378이다. 서울의 사립 성남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2년 4월 학우 박원배(朴源培)·박병양(朴秉陽)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진당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독서회 형태의 모임을 꾸려 한국역사를 공부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으로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또한 과거의 3.1운동과 같은 거국적인 대규모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며,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저격 등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2월에서 이듬해인 1943년 1월 사이에 윤병운을 비롯해 박원배와 박병양 등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내내 여러 차례 취조와 고문을 당하였으며, 9월 15일 부로 성남중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하였다. 같은 해 12월 18일 대전지방법원(大田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단기 2년, 장기 4년을 선고받았다. 인천소년형무소(仁川少年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4년 4월 11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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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복 묘
정상복은 1919년 3월 충남 연기군(燕岐郡) 전의시장(全義市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28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보고 돌아온 이수욱(李秀郁)은 추경춘(秋敬春)ㆍ추득천(秋得天)ㆍ윤자훈(尹滋勳)ㆍ윤자벽(尹滋壁)ㆍ윤상원(尹相元)ㆍ윤상억(尹相億)ㆍ김재주(金在周) 등과 회합하고, 3월 13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全義面) 읍내리(邑內里)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를 하기로 협의하였다. 이수욱은 태극기 약 150본을 만들어 13일 오전 9시경 시장 통로인 갈정리(葛井里) 언덕에서 배포하고, 시장에 도착해 "내가 독립에 관하여 연설을 행할 시 일제히 국기를 꺼내 들고 만세를 고창하며 읍내를 순행할 것"을 제의하였다. 13일 오후, 시장에 도착한 군중에게 독립에 관한 연설과 독립만세를 주창하였다. 정상복은 옷 속에 은닉하여 둔 태극기를 꺼내어 군중과 화답하며 만세를 고창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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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응 묘
1932년에 충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에 서울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전문부 문학과에 진학하였으나 평소 일인들의 부당한 행위에 불만을 갖고 항일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입건되어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퇴학당한 후에 재일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독서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1939년 5월에 항일운동 혐의로 스가모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폐결핵으로 판정받아 1940년 6월 출옥하였다. 귀국하여 치료를 받던 중 병세가 악화되자, 고향인 충청북도 충주로 내려가 농업에 종사하였다. 농업에 종사하면서도 야학과 소인극(素人劇)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아동들에 깊은 애정을 갖고 동요 창작활동에도 매진하였다. 해방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 약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여 병세가 악화되어 1951년 3월에 별세하였다.1968년 5월 5일 제86회 어린이날에 윤석중 등의 후원으로 충청북도 충주의 탄금대 내에 감자꽃노래비를 세웠다. 한국문인협회 충주지부에서는 감자꽃노래비 앞에서 매년 10월 권태응을 기리는 ‘감자꽃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 2005년 항일운동의 공훈이 인정되어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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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추모비
서정기 선생은 충청북도 중원(中原) 사람이다. 1925년 1월에 충주에서 서우순(徐宇淳) 등 3명의 동지와 회합하고 서울에서 무정부주의 계통의 항일비밀결사인 흑기연맹(黑旗聯盟)을 조직하여 무정부주의의 연구와 선전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5년 11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1929년 2월 18일 충청북도 충주(忠州)군 충주면 읍내리 금성여관(金星旅舘)에서 권오순(權五淳)·안동규(安東奎)·김학원(金學元)·정진복(鄭鎭福)·서상경(徐相庚)·김현국(金顯國) 등 동지들과 함께 문예운동사(文藝運動史)라는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잡지 「문예운동(文藝運動)」을 간행하려고 활동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1930년 3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1930년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유자명 선생은 1919년 3·1운동 당시 충주 간이농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 중심의 시위를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 탐지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비밀참모로 국내외 일본인과 친일파 처단활동에 성과를 올렸다. 1927년 중국 난징에서 김규식(金奎植), 중국인 목광록(睦光錄), 인도인 간다싱 등과 함께 일본에 대한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공동투쟁을 강화할 목적으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념적으로 무정부주의를 견지하여 1927년 조선혁명자연맹 간부로 활동하며 무창(武昌)주1 입달학원(立達學院)에서 강의했고, 1930년 상해 강만(江灣)의 농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장도선(張道善)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했다. 1931년 무정부주의자인 유기석(柳基石) 등과 불멸구락부(不滅俱樂部)를 조직해 활동했다. 1942년 약헌개정기초위원, 1943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을 지냈고, 해방 이전까지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한편 중국 국민당(國民黨)의 거물급 인사와도 꾸준히 교류하며 항일독립운동 연합전선을 펴나갔다.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에서 대학교수 생활을 했다. 윈난[雲南]고원지대에서 최초로 특수벼 재배에 성공하여 농학박사가 되었고, 특히 독립운동가 출신 원예학자로 중국인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만년에는 후난농업대학 원예학과 명예주임으로, 중국 원예학회 명예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일신 선생은 충북 충주(忠州) 사람이다. 1929년 12월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 재학시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확산에 계기가 되었던 서울지역 동맹휴교(同盟休校)에 동참하였다. 이일신은 강대성(姜大成) 등과 함께 조선학생전위동맹(朝鮮學生前衛同盟)을 조직하여 격문의 인쇄 배부 및 동맹휴학·만세시위 등을 주동하였다. 이일신은 이 조직의 주요 관계자로 주시영(朱時永)·김형석(金炯錫) 등과 함께 동년 12월 7일 동교 교실에서 "동지제군이여,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교육을 배척하는 싸움에 분기(奮起)하라"는 취지의 격문 내용을 학생들에게 연설하여 동맹휴학과 만세시위를 촉구하였다. 이 사건으로 1년 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0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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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만세운동유적비
충북 충주시 대소원면 본리 569-15 대소원초등학교 입구 충주독립만세운동유적비 대소원면은 이류면이 이름이 변경된 곳이었다. 해당 사적에 대한 독립기념관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대소원보통학교 학생만세운동유적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여 1930년 2월 7일 충북 충주에서 전개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비이다. 1929년 11월 일본 학생들의 한국인 여학생 희롱에서 촉발된 광주학생에 동조하여 충북 충주의 대소원보통학교 학생들과 대소원성공회 소속 문화소년 단원이 중심이 된 100여명의 군중은 1930년 2월 7일 장날에 한인학생에 대한 차별 철폐 등을 주장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가 15명이 체포되고 6명이 순국하였다 하지만 독립기념관 사이트에는 6명 순국이라고 나오고, 앞의 설명판에는 6명이 옥고를 치룬 것으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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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추모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개천안 마을을 찾아가고 있다. 마을 앞 정토사 법경대사자등탑비가 있는 곳에 추모비를 비롯해 많은 솟대가 있었다.독립유공자 명와 이기진 선생 추모비는 그 중에 있었다. 정확한 주소는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173-4다. 이기진 선생은 충북 충주 사람이다. 1895년 12월 유인석(柳麟錫)이 제천을 중심으로 거의, 화좌의병진(湖左義兵陣)을 조직하였을 때 여기에 참가해 홍선표(洪善杓)·정화용(鄭華鎔) 등과 함께 종사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얼마 뒤 호좌 의병이 관군에게 패해 북상길에 올라 낭천(狼川)에 이르게 되었을 때 소토장 서상렬(徐相烈)은 관군과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에 그는 유인석의 명을 받고 동지 송현구(宋鉉九)와 함께 서상렬의 시신을 수습해 3백 여 리나 떨어진 제천으로 반장(返葬)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 뒤 병고(病苦)로 인하여 의진에 합류치 못하고 충주 하곡(荷谷)으로 귀향하여 국권침탈의 시국을 개탄하면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후학 양성과 도의(道義) 구현에 진력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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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희 홍승로 추모비
어윤희는 서울에서 송달된 독립선언서를 개성(開城) 일대에 배포함으로써 개성의 만세운동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기독교 남감리파의 전도사인 그는 1919년 2월 26일 개성읍내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好壽敦女子高等普通學校) 기숙사에서 개성 충교(忠橋) 예배당 유치원 교사인 권애라(權愛羅)로부터 독립선언서 80여 매를 받아 개성 지역 주요인사들에게 전달하였다. 아울러 그는 만세운동을 추진하면서 서울에서 배포한 것과 같은 독립선언서를 2천 부 정도 인쇄하여 읍내 각지에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신관빈(申寬彬)과 함께 읍내의 만월정(滿月町)·북본정(北本町)·동본정(東本町) 등 각 거리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로써 개성에서는 3월 3일에 개성 호수돈여자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으며, 여기에 1천 5백 명의 시민이 만세시위에 참가함으로써 대대적인 시위행진이 이루어졌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일경에 붙잡혀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승로는 일본 중앙대학에 재학중인 1920년에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東京朝鮮苦學生同友會)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동회를 재일고학생의 통합적 조직체로 발전시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했다. 동년 4월에 영친왕(英親王) 이 은(李垠)과 일본의 이본궁녀(梨本宮女)와의 성혼이 있게되자 이들 회원들은 이를 조국독립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결혼식을 저지하는 한편 식장에 참석하기로 된 조선총독을 비롯하여 일인고관을 처단하고 또 일제기관을 폭파하여 한국독립의 기세를 올리고자 했다. 따라서 이들은 거사에 앞서 폭탄을 제조하여 2차례에 걸쳐 폭탄의 성능을 시험해보면서 준비를 추진하였으나 사전에 이러한 계획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한편 동년 9월, 미의원단 일행이 동경에 체류할 때,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미의원단 일행이 숙소인 제국호텔로 향하는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그는 동우회란 이름으로 30여명 규모의 순회연극단을 조직하고 1921년 6월에 귀국하여 전국각지를 돌면서 연극을 통한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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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희 공훈비
어윤희는 서울에서 송달된 독립선언서를 개성(開城) 일대에 배포함으로써 개성의 만세운동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기독교 남감리파의 전도사인 그는 1919년 2월 26일 개성읍내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好壽敦女子高等普通學校) 기숙사에서 개성 충교(忠橋) 예배당 유치원 교사인 권애라(權愛羅)로부터 독립선언서 80여 매를 받아 개성 지역 주요인사들에게 전달하였다. 아울러 그는 만세운동을 추진하면서 서울에서 배포한 것과 같은 독립선언서를 2천 부 정도 인쇄하여 읍내 각지에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신관빈(申寬彬)과 함께 읍내의 만월정(滿月町)·북본정(北本町)·동본정(東本町) 등 각 거리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로써 개성에서는 3월 3일에 개성 호수돈여자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으며, 여기에 1천 5백 명의 시민이 만세시위에 참가함으로써 대대적인 시위행진이 이루어졌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일경에 붙잡혀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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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로 묘
홍승로는 일본 중앙대학에 재학중인 1920년에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東京朝鮮苦學生同友會)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동회를 재일고학생의 통합적 조직체로 발전시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했다. 동년 4월에 영친왕(英親王) 이 은(李垠)과 일본의 이본궁녀(梨本宮女)와의 성혼이 있게되자 이들 회원들은 이를 조국독립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결혼식을 저지하는 한편 식장에 참석하기로 된 조선총독을 비롯하여 일인고관을 처단하고 또 일제기관을 폭파하여 한국독립의 기세를 올리고자 했다. 따라서 이들은 거사에 앞서 폭탄을 제조하여 2차례에 걸쳐 폭탄의 성능을 시험해보면서 준비를 추진하였으나 사전에 이러한 계획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한편 동년 9월, 미의원단 일행이 동경에 체류할 때,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미의원단 일행이 숙소인 제국호텔로 향하는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그는 동우회란 이름으로 30여명 규모의 순회연극단을 조직하고 1921년 6월에 귀국하여 전국각지를 돌면서 연극을 통한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