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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수 사적비
최명수(1881-1951)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1907년에 충청남도의 목천(木川)교회 전도사로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 김동삼과 함께 경학사(耕學社)와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재만한인의 경제적 지위 향상에 노력하였다. 동시에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에도 참여하였다. 1919년에는 한족회(韓族會)에 참가하여 헌병과장, 검무감 등으로 친일분자 처단에 앞장섰으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중앙의회 의장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재만독립운동단체가 통합되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하게 되자 검무국장(檢務局長)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다시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대표로서 정의부(正義府)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정의부가 조직된 후에는 검무감(檢務監)에 임명되어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28년 8월에는 3부(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통합 운동이 일어나게 됨에 따라 정의부 제5회 정기중앙의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최명수는 시국 문제 토의 중 혼란이 일어나자, 민족유일당재만촉성회(民族唯一黨在滿促成會)를 지지하는 중앙집행위원 이청천, 이종건, 김원식, 이규동, 김상덕, 김동삼 등과 함께 퇴장하게 됨으로써 3부 통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최명수는 1928년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자 간부에 임명되어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일제가 만주를 석권하게 됨에 따라 이청천과 함께 상해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상해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 2월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평안환(平安丸, 헤이센마루) 배편으로 인천을 거쳐 신의주로 압송되었으며, 1935년 6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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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현 묘
송태현(1874-1945)은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밤 충북 청주군(靑州郡) 북일면(北一面) 우산리(牛山里)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송태현은 3월 1일 이래 전국적으로 산 위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만세 시위가 전개되는 사실을 알고 고향에서도 이런 형태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심하였다. 4월 1일 밤, 그는 동리 주민들에게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을 권유하여, 수십 명의 주민들과 함께 우산리 뒷산 꼭대기에 올라가 모닥불을 피워 놓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에 따라 송태현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20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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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묘
박준규(1863-1919)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에 홍일선, 김교선, 한동규, 이순구, 조인원, 유관순 등이 갈전면(葛田面)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 명의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여세를 몰아 시위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본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일본 헌병이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하어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하였다. 이때 박준규도 일본 군경의 발포로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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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유적비
박준규(1863-1919)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에 홍일선, 김교선, 한동규, 이순구, 조인원, 유관순 등이 갈전면(葛田面)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 명의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여세를 몰아 시위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본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일본 헌병이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하어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하였다. 이때 박준규도 일본 군경의 발포로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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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형 묘
김재형(1890-1966)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기독교인이다. 당시 매일신보 판매업을 하고 있었으며, 1919년 3월 1일 국장(國葬)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을 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직접 보고 귀향하여 본인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은밀하게 거사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강내면(江內面)에서 매일 산 위에서 봉화를 올리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어 거사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서울의 박동완 민족대표로부터 수령하여 감추어 두었던 독립선언문 500여 매 중 연기군(燕岐郡) 조치원(鳥致院)에 사는 김재석에게 350여 매를 주어, 문의면(文義面), 미원면(米院面), 보은읍(報恩邑) 등지에 나누어주게 하였다. 또 나머지 150매는 50매씩 봉투에 넣어 강내면에 살고 있는 조동식, 김봉회, 박준평 등에게 각각 나누어주어 각지에 배부하도록 하여, 인근 주민의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6월 7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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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충혼비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애국지사 충혼비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됨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 독립을 위해 몸 바쳐 투쟁한 애국지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58년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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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식 집
조동식(1873-1949)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월 23일부터 3일간에 걸쳐 밤마다 강내면(江內面) 대성리(臺城里)에 있는 대성산상(?)에서 부락민 수십 명과 함께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사기를 올렸다. 첫날인 23일에는 면내의 18개 부락과 인접한 강외(江外), 옥산(玉山), 남이면(南二面) 등지에서도 호응하여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제는 청주와 조치원 등지의 경찰과 헌병, 수비대까지 동원시켜 시위행렬을 제지하고 총기를 휘두르며 여러 사람을 잡아 연행하여 새벽 1시경에야 시위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튿날인 24일과 26일에도 횃불시위는 계속되어 충남 연기군(燕岐郡) 동면(東面) 응암리(應岩里)에서 이에 호응하였고, 27일에도 동면의 예양리(禮養里)에서 횃불시위가 전개되었으며, 4월 1일에는 청주, 오창, 강의, 부용면에서 횃불시위가 벌어지고, 또한 북일, 북이, 강내, 오산면에서도 일어남으로써 도합 8개 면, 즉 청주군의 서북쪽 태반이 모두 불바다와 만세 소리로 진동케 되었다. 또한 조동식은 3월 25일 김재형이 보낸 사람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을 고취시키는 비밀 격문 약 50매를 받아서 허영대로 하여금 화정리(華亭里) 일대에 배포시키는 등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그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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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식 묘
조동식(1873-1949)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월 23일부터 3일간에 걸쳐 밤마다 강내면(江內面) 대성리(臺城里)에 있는 대성산상(?)에서 부락민 수십 명과 함께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사기를 올렸다. 첫날인 23일에는 면내의 18개 부락과 인접한 강외(江外), 옥산(玉山), 남이면(南二面) 등지에서도 호응하여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제는 청주와 조치원 등지의 경찰과 헌병, 수비대까지 동원시켜 시위행렬을 제지하고 총기를 휘두르며 여러 사람을 잡아 연행하여 새벽 1시경에야 시위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튿날인 24일과 26일에도 횃불시위는 계속되어 충남 연기군(燕岐郡) 동면(東面) 응암리(應岩里)에서 이에 호응하였고, 27일에도 동면의 예양리(禮養里)에서 횃불시위가 전개되었으며, 4월 1일에는 청주, 오창, 강의, 부용면에서 횃불시위가 벌어지고, 또한 북일, 북이, 강내, 오산면에서도 일어남으로써 도합 8개 면, 즉 청주군의 서북쪽 태반이 모두 불바다와 만세 소리로 진동케 되었다. 또한 조동식은 3월 25일 김재형이 보낸 사람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을 고취시키는 비밀 격문 약 50매를 받아서 허영대로 하여금 화정리(華亭里) 일대에 배포시키는 등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그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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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동상
신채호(1880-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단재(丹齋)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1]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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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 공적비
연병호(1894-1963)는 충청북도 괴산(현 증평) 사람으로, 1919년 4월에 서울에서 이병철과 협의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조용주, 안재홍, 김홍식, 김연우, 김태규, 이의경, 조소앙 등이 합류하여 역할을 맡았다. 그중 연병호는 조용주와 함께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창립된 최초의 단체로, 임시정부에 대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통신하여 주는 것,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 그리고 선전활동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경상북도 도 경찰은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애국부인회와 연계하여 서울에 본부, 각 지방에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때 연병호도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상해로 탈출한 그는 1921년 4월 한인대동(韓人大同)을 목적으로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世界韓人同盟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 김현구, 조소앙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수습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로의 의견이 부합되지 않자, 조소앙, 김용철, 조완, 이기룡 등과 함께 탈퇴하였다.1929년 말에는 안창호, 이동녕, 김구, 엄항섭, 이시영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연계하여 조국광복운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2월에는 윤기섭과 함께 재남경(在南京) 한국혁명당 대표로서 재만(在滿)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홍면희, 김원식 등과 회합하고 독립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양 단체를 통합하여 새로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였다. 1935년 1월 재남경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집행위원이던 연병호는 정무(政務)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어, 의열단(義烈團)을 다시 통합하여 1935년 7월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그는 또한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 무렵에 독립공론(獨立公論)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그는 일제 앞잡이인 이갑녕(李甲寧)의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총영사관의 경찰의 추적을 받아 1937년 1월 7일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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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마을 표지석(덕촌리)
덕촌리 독립운동가 마을은 독립운동가 정순만 선생의 고향 마을인 덕촌리에 선생의 독립운동사와 충북·청주의 독립운동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조성된 마을이다.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위원회 주관 기념사업 공모에 선정되어 청주시의 1호 마을 아카이브 사업으로 조성되었다. 독립운동가 마을 표지석, 태극기 거리, 애국의 길, 정순만 선생 기념관, 3.1운동 만세 광장 등 다양한 콘텐츠로 꾸며져 있다. 정순만 선생은 상동청년회에서 을사조약 반대투쟁을 주도하다 실패하고 일제에 대한 실효성 있는 투쟁을 위해서는 국민의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 것이 최선책이라 결의하고 고향 덕촌으로 낙향하였다. 이 때 하동 정씨 문중에게 발의하여 설립한 것이 덕신학교이다. 덕신학교는 농민을 대상으로 교육 계몽 및 생활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구한말 민족적 자각이 증대하고 근대 의식이 성장할 즈음에 경제력을 가진 지방 유지 및 선각자들은 민족교육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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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신학교
덕신학교는 청주 옥산면 덕촌리를 중심으로 당시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하동 정씨 가문에서 독립협회와 상동청년회 간부로 활동하던 정순만 선생을 중심으로 1906년 5월 15일 설립한 학교이다. 초대 이사장은 초대 이사장 정재봉이었다. 개교 당시 당시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사립학교 중 하나였으며 1909년 8월 정식 인가를 받았고 1911년에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하였다. 한편, 덕신학교는 2016년 독립운동가마을이 조성되면서 그 안에 복원된 형태의 건물로 세워졌다. 덕신학교에는 정순만 선생의 일대기와 청주 항일 독립운동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덕신학교 뒤편에는 조선시대 설립된 문절 영당이 있고, 문절 영당은 1769년에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 3등으로 책록 되고 하원군에 봉해진 문절공 좌찬성 정수충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영당 내부는 개방되지 않으며 외부에서만 둘러볼 수 있다. 또한 주민들이 만세 횃불 시위를 벌였던 응봉산이 뒷산에 있고 1km 길이의 애국의 길과 횃불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