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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집
신석구(1875-1950)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919년 2월 27일 당시 기독교 남감리파 목사로 있던 신석구는 같은 남감리파 목사인 오화영(吳華英)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이 있음을 듣고, 오화영, 이승훈(李昇薰),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함태영(咸台永), 김창준(金昌俊), 박동완(朴東完) 등 10명의 기독교인과 함께 함태영이 최 린(崔麟)으로부터 받아 온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돌려보고, 모두 그 취지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중 함태영만이 다른 연명자가 체포될 경우 그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제외되고,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제출할 문서에 날인하기 위하여 9명의 인장을 모두 함태영에게 맡겨서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28일 밤에는 다른 민족대표들과 손병희의 집에 모여서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대한 최종 협의를 마쳤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급거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 및 연행되어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춘천(春川), 원산(元山) 등지에서 일본 경찰에 여러 번 체포되었다. 천안(天安)에서는 신사참배(神社參拜)와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하다가 검거되어 복역 중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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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안장터 3.1만세운동 시발지 동판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쌀안장터 3.1만세운동 시발지 동판이다.이 동판은 1919년 3월 30일 오후 2시경 쌀안장터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동판이 세워진 위치가 그 시발지이다. 2019년 4월, 쌀안장터 3.1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장일환 지사의 손자인 장기영이 기증하여 쌀안장터 3.1만세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본 동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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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안장터 만세운동기념비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30일 미원면 쌀안장터에서 신경구·이용실 등의 주도로 1천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헌병이 출동하여 신경구를 연행하자 이용실·윤인보·이성호 등이 시위대를 이끌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러자 청주에서 일본군 지원대까지 출동하여 발포하고, 주동자를 검거하였다. 이 때 이병선·장일환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숨지고, 최봉원은 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순국하거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분들은 다음과 같다. 김순구(金舜九, 1867~1919), 김재형(金在衡, 1890~1966), 김진환(金振煥, 1879~1934), 서정렬(徐正烈, 1882~1944), 성규원(成奎垣, 1862~1927), 신경구(申敬求, 1887~1948), 신성휴(申聖休, 1891~1955), 신정식(申鼎植, 1869~미상), 신학구(申學求, 1877~1968), 오교선(吳敎善, 1883~1948), 윤인보(尹仁甫, 1878~1951), 이병선(李秉善, 1882~1919), 이성호(李聖浩, 1873~1943), 이수란(李水蘭, 1862~1926), 이용실(李容實, 1878~1964), 장일환(張一煥, 1882~1919), 정무섭(鄭武燮, 1886~1960), 최봉원(崔鳳源, 1879~미상) 쌀안장터 만세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6년 3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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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곡마을 자랑비
용곡마을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에 앞장서서 1919년 3월 30일 미원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신경구를 비롯하여 이용실, 정무섭, 윤인보 등 많은 애국지사가 태어난 고장이다. 용곡마을 자랑비는 용곡마을의 자랑스러운 애국지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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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구 묘
신경구(1887-1948)는 충청북도 청원으로, 1919년 3월 30일 청주군 내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미원면(米院面) 독립만세운동을 이용실, 이수란과 함께 주도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부터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본 경찰은 태극기를 빼앗으며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제지가 심할수록 더욱 거세게 독립만세시위를 계속하자, 일본 경찰은 선두에 서서 지휘하던 신경구를 주재소에 감금시켰다. 이에 격분한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은 더욱 분개하여 주재소로 몰려들어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고 고창하며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유리창과 장지문을 부수고, 정문 기둥을 쓰러뜨리고 담을 헐어버리는 등 시위는 격렬해졌다. 이에 미원 주재소에서는 청주경찰서에 구원을 요청하여 응원부대가 도착해서야 겨우 시위가 중단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이수란은, 가지고 있던 담뱃대로 주재소장을 때리려고 대들었고, 성규원은 양민 학살을 항의하였으며, 윤인보는 헌병이 가지고 있던 칼을 빼앗으려고 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위급함을 느낀 일본 헌병의 발포로, 즉사 1명, 부상자 3명이 생겼고, 현장에서 주도자 등 14명이 체포되었다. 결국 신경구는 그해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확정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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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 묘
김태희(1877-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이명은 이세기이며, 일찍이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4년에 충청북도 청주에 청남학교(淸南學校)를 설립하고 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남형우, 안희제, 이원식, 신백우, 김동삼, 이시열, 박중화, 배천택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 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적극 지원하여 1920년 9월 10일 연통제(聯通制)의 충청북도 독판부(督辦府) 참사(參事)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문서들의 배포 등 국내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또한 국민회(國民會) 충청북도 지회를 조직하여 그 책임자가 되었으며, 청주청년회(淸州靑年會)를 조직하여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21년 전국의 청년회들을 연합하려는 운동에 참여하여 동지 정규택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창립총회에 청주청년회 대표로 참석하여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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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여성독립유공자 흉상
충청남도 청주에 위치한 충북여성독립유공자 흉상은 일제강점기 외세의 침략과 국권 강탈의 민족 위기 앞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힘쓴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한 사적이다. 총 10명의 독립운동가 흉상이 있으며, 윤희순, 어윤희, 박자혜, 임수명, 이화숙, 연미당, 오건해, 신순호, 신정숙, 박재복이 그 주인공이다. 그들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금가락지를 내놓았고, 3.1만세운동에 앞장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조선 독립이라는 목표 하나를 쟁취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친 인물들이다. 본 사적은 충북미래여성플라자 내, 충북여성독립운동가 전시실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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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필영 공적기념비
유필영(1841-1924)은 경상북도 안동 사람으로,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 등이 유림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는, 김복한)을 중심으로 한 호서 유림과 곽종석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와 광무황제(光武皇帝, 고종)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 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편으로 전달되었다. 그런데 서명자 중 송회근이 붙잡히는 바람에 이 일은 발각되었고, 이로써 유필영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하지 않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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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식 동상
신홍식(1872-1939)은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기독교인이다. 34세에 기독교에 입교한 후, 1913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공주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으며, 1917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로 전임되어 포교와 교육사업에 정진하였다. 1919년 2월 14일,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였던 신홍식은 동지 규합을 위해 평양에 온 이인환(李寅煥)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2월 20일 이인환의 집에서 오화영(吳華英), 정춘수(鄭春洙), 오기선(吳基善) 등의 동지와 모여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모아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협의하고, 이인환, 이필주(李弼柱),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오화영, 최성모(崔聖模),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박동완(朴東完),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길선주(吉善宙), 정춘수 등의 동지와 함께 기독교 측 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8일 밤에는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 총감부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인천, 원주 등지에서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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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충북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충청북도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민족혼을 기리고자, 2013년에 항일독립운동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 건립되었다. 현재 청주시 상당구 수동 삼일공원 내의 애국지사 동상 앞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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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학생의거기념비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항일학생의거기념비는 1929년 항일 학생운동을 주도한 청주고등보통학교(현재 청주중학교) 학생 7명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사적이다. 이범승, 이인찬, 김찬호, 구연행, 박우양, 함귀봉, 홍성일이 그 주동자로, 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1년 11월에 비가 건립되었다. 현재 청주중학교 내부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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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 기념비
김태희(1877-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이명은 이세기이며, 일찍이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4년에 충청북도 청주에 청남학교(淸南學校)를 설립하고 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남형우, 안희제, 이원식, 신백우, 김동삼, 이시열, 박중화, 배천택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 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적극 지원하여 1920년 9월 10일 연통제(聯通制)의 충청북도 독판부(督辦府) 참사(參事)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문서들의 배포 등 국내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또한 국민회(國民會) 충청북도 지회를 조직하여 그 책임자가 되었으며, 청주청년회(淸州靑年會)를 조직하여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21년 전국의 청년회들을 연합하려는 운동에 참여하여 동지 정규택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창립총회에 청주청년회 대표로 참석하여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