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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 송공비
한봉수(1883-1972)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근무하다가 1907년 조선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그해 음력 8월에 의병장 김규환 의진에 가담하여 일본군의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였다. 1907년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병진을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라 칭하였다. 이후 강원으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고, 의병장 조운식(趙雲植)과 적과 맞설 계획을 논의하고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식량과 무기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점점 강해짐에 결국 의병을 해산하고,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1910년 소위 내란죄 및 강도·살인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았으나, 경술국치가 이루어짐에 따라 1910년 8월 29일 사면을 받아 면소 판결되어 석방되었다.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 즈음에 홍명희,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 7일 청주의 서문장터(우시장)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 다시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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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교선 묘
오교선(1883-1948)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1919년 당시 청원군 낭성면 성대리(琅城面 城坮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미원면(米院面)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동하였다. 1919년 3월 30일, 오교선은 같은 동리에 거주하는 박우동과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격문을 각 동리에 회송하며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4월 1일 거사 당일에 청원군 미원면 장터에서 인근 주민 다수를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오교선은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해 4월 2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6월 9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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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3.1운동 표지석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3.1운동 표지석이다. 본 비는 1919년 청주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으로, 2009년에 3.1운동 9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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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구 집
신학구(1877-1968)는 1919년 3월 30일 미원 장터에서 오후 1시부터 1,000여명의 군중이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앞장서서 시위운동을 주도한 14명이 붙잡히는 바람에 군중은 더욱 격앙되어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를 습격·파괴하였다. 신학구는 신정식(申鼎植)·서정열(徐正烈)등과 함께 장꾼들에게 정의의 독립만세운동 대열에 참가할 것을 설득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며,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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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백우 사적비
신백우(1889-1962)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1907년 4월에 양기탁, 안창호, 전덕기, 이회영 등을 중심으로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족친인 신채호(申采浩)의 권유로 이에 가입하여 서울과 충청북도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에는 합법적 외곽 청년단체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가 설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청년학우회 한성연회(漢城聯會)의 서기로서 활동하였다. 또한 1909년, 신민회 계열의 비합법적 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이 조직되자 남형우, 안희제, 박중화 등 80여 명과 함께 국권 회복을 위한 지하활동을 하였다. 1910년 8월, 결국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1911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奉天)성 일대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조부의 별세로 1918년에 귀국하였다가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한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부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에 귀국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윤덕병 등과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를 발기하여 조직하고 그 기관지 『노동(勞動)』의 편집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3년 7월에는 홍명희, 윤덕병 등과 함께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후에 火曜會로 개칭)를 조직하였으며, 1924년 윤덕병, 차금봉 등과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을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가 코민테른에의 대표파견사건으로 체포되어 6개월간 투옥당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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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묘
신채호(1880-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단재(丹齋)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1]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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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휴 구 묘
신성휴(1891-1955)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1919년 3월 30일 청주군 미원면(米院面) 장터 사가리(四街里)에서 1,000여 명의 장꾼들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다 주동자 신경술(申敬述)이 일경에 연행되자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그해 5월 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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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사(낭성사)
김제환(1867-1916)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호는 소당이고, 청주 지방의 유생이었다. 교육을 통한 배일사상(排日思想) 고취와 구국교육운동을 펼쳤던 김제환은 평소 배일의식이 강하며 일제의 호적에 기입을 거부하고 이른바 '경절'에 일장기를 달지 않으며 납세 및 부역 등을 거절하는 등 항일투쟁을 하였다. 1913년 2월 배일항거운동(排日抗拒運動)으로 일본 헌병에 붙잡혔으나 단식투쟁으로 같은 해 3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곧이어 5월, 청원군(淸原郡) 오창면(梧倉面) 이산리(里山里)에서 '성산대강회(星山大講會)'를 개최하여 의거할 것을 주창(主唱)하다가 일경에 다시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조선 총독이던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항일 유서를 송부한 후 단식하여 순절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성환(1875~1958)은 충청북도 청주군 산내이상면 문박리에 서당을 설치하고 한학을 가르쳤다. 1910년 8월 한국과 일본 양국 합병식을 보고 분노하여 생도 등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5월 1일 평소의 언동에 대해 청주경찰서에서 설유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도 일본 경찰에게 병합의 부당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경찰서를 나와서도 생도 수십 명에게 “현시의 관리는 모두 난신적자(亂臣賊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병을 일으켜 그들을 박멸하고자 밤낮으로 오랫동안 고심하여 왔으나 아직 그 시기를 얻지 못하였다. 너희는 항상 이 뜻을 가슴에 품고 우리 대한국 신민(臣民)의 의무를 잊으면 안 된다.”고 설파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1913년 6월 12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반’으로 금고 1월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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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환 유허비
김제환(1867-1916)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호는 소당(素堂)이고, 청주 지방의 유생이었다. 교육을 통한 배일사상(排日思想) 고취와 구국교육운동을 펼쳤던 김제환은 평소 배일의식이 강하며 일제의 호적에 기입을 거부하고 이른바 '경절'에 일장기를 달지 않으며 납세 및 부역 등을 거절하는 등 항일투쟁을 하였다. 1913년 2월 배일항거운동(排日抗拒運動)으로 일본 헌병에 붙잡혔으나 단식투쟁으로 같은 해 3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곧이어 5월, 청원군(淸原郡) 오창면(梧倉面) 이산리(里山里)에서 '성산대강회(星山大講會)'를 개최하여 의거할 것을 주창(主唱)하다가 일경에 다시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선 총독이던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항일 유서를 송부한 후 단식하여 순절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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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유허비
김성환(1875-1958)은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정당(定堂)이다. 청주군 산내이상면(山內二上面) 문박리(文博里)에 서당(書堂)을 설치하고 한학을 가르쳤다. 1910년 8월 한국과 일본 양국 합병식(合倂式)을 보고 분노하여 생도 등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5월 1일, 평소의 언동에 대해 청주경찰서(淸州警察署)에서 설유(說諭)를 받았으나, 김성환은 이 과정에서도 일본 경찰에게 병합의 부당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경찰서를 나와서도 생도 수십 명에게 “현시의 관리는 모두 난신적자(亂臣賊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병(義兵)을 일으켜 그들을 박멸하고자 밤낮으로 오랫동안 고심하여 왔으나 아직 그 시기를 얻지 못하였다. 너희는 항상 이 뜻을 가슴에 품고 우리 대한국 신민(臣民)의 의무를 잊으면 안 된다.”고 설파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1913년 6월 12일 공주지방법원(公州地方法院) 청주지청(淸州支廳)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금고(禁錮) 1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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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동상(충북)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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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하 사적비
조장하(1847-1910)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죽음으로써 항의하기로 하고 의관을 깨끗이 갈아입은 다음 단식을 결행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