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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묘
이상설(1870-1917)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며 아버지는 이행우(李行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고 7세 때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었다.이상설은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 시절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1904년 6월 일본이 전국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에 선임되고 이준(李儁)이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이상설은 그 늑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거듭하여 올렸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4월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북간도의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8월경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숙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간도 일대의 교육 구국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다는 칙명을 받았다. 비록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세 밀사들은 6월 27일에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결국 1916년 중병에 걸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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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학교 터(삼수초)
문명학교는 이상설 선생의 사촌형제인 이상직 선생이 항일 구국 계몽 운동으로 세운 학교로 지금의 진천상산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이상직 선생은 어려서부터 서울의 큰아버지 댁에서 독립운동가인 이상설 선생과 숙식과 수학을 같이 하면서 기틀을 다졌고 이성훈, 이시영, 이회영, 정인보, 이범세 등과 사귀며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진천으로 낙향하여 사립·보통상산학교를 건립했다. 이상직 교장과 남진우 선생이 교육을 담당하여 학생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교실이 협소하여 향교의 명륜당으로 전전하며 재정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후 교명을 ‘널리 학생을 모집해 신학문을 가르치다’라는 뜻이 담긴 <광명학교> 또는 <문명학교>라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학교는 한일합방 후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으로 폐지되고 1911년 6월 진천군에 공립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그해 10월 진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게 된다. 1913년 현재의 삼수초등학교 부지에 교실2, 교무실 1개로 교사를 건축했다. 또 같은 해 제 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때 졸업생 수는 모두 19명이었다. 1941년 4월 1일에는 학교 이름을 <진천상산공립보통학교> 라 개칭하고 진천 지역 민족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1940년대 현재의 삼수초등학교 터에 있던 진천상산초등학교는 급격하게 늘어나는 학생 수를 감당하기 어려워 교사 증축이 시급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부지가 좁고 재정 형편에도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 같은 어려운 환경을 접한 당시 진천의 최대 갑부로 알려졌던 이호신 선생이 토지 500석 지기의 부지를 희사해 지금의 위치에 부지 7천 여 평을 마련했다. 선생이 내놓은 부지에 교사 2동과 부속 건물을 지어 1940년 11월 이사하게 된다. 이로써 비교적 제대로 된 교육시설이 갖춰진 새로운 배움의 전당을 마련하게 됐다. 당시 이호신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교정에 장학비가 현재의 은행나무 아래 세워져 있다. 이 후 1941년 진천상산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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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직 집
이상직(1878-1947)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목표로 1909년 진천에 문명학교(文明學校)를 설립하고 교육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상직은 3월 15일 진천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고자 자택에서 각 마을 대표 수십 명과 회합하여 준비했으나 이튿날 새벽에 일제 경찰에 구속되었고, 결국 이상직을 제외하고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석방된 후 4월 2일, 이상직은 제2차 진천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켜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다가 다시 일경에게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중병으로 석방되었다.1925년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리는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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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하 집
박승하(1900-1973)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이명은 박승복이며, 청주농업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충북 청주군 청주면(淸州面)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쏟던 중. 1919년 3월 9일 사전 발각되어 붙잡혔다. 청주에서의 만세운동은 일찍부터 모색되고 있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다음 날인 3월 2일에 독립선언서 286매가 전달되었다가 일경에 발각된 일이 있었다. 그리고 3월 7일에는 읍내 우시장에서 장꾼들에 의한 만세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의 장례에 참여하고자 상경했던 신영호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3월 9일 청주농업학교 학생 오석영에게 전달하면서 청주농업학교에서의 만세운동은 구체화되었고,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박승하는 이러한 사실을 접하면서 만세운동의 계획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3월 9일 김현구의 방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경고문 3백 매를 인쇄하면서 만세시위를 준비해 갔는데, 도중에 발각되어 박승하는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5일 대구복심법원과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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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하 추모비
박승하(1900-1973)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이명은 박승복이며, 청주농업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충북 청주군 청주면(淸州面)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쏟던 중. 1919년 3월 9일 사전 발각되어 붙잡혔다.청주에서의 만세운동은 일찍부터 모색되고 있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다음 날인 3월 2일에 독립선언서 286매가 전달되었다가 일경에 발각된 일이 있었다. 그리고 3월 7일에는 읍내 우시장에서 장꾼들에 의한 만세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의 장례에 참여하고자 상경했던 신영호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3월 9일 청주농업학교 학생 오석영에게 전달하면서 청주농업학교에서의 만세운동은 구체화되었고,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박승하는 이러한 사실을 접하면서 만세운동의 계획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3월 9일 김현구의 방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경고문 3백 매를 인쇄하면서 만세시위를 준비해 갔는데, 도중에 발각되어 박승하는 붙잡혔다.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5일 대구복심법원과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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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하 묘
박승하(1900-1973)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이명은 박승복이며, 청주농업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충북 청주군 청주면(淸州面)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쏟던 중. 1919년 3월 9일 사전 발각되어 붙잡혔다.청주에서의 만세운동은 일찍부터 모색되고 있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다음 날인 3월 2일에 독립선언서 286매가 전달되었다가 일경에 발각된 일이 있었다. 그리고 3월 7일에는 읍내 우시장에서 장꾼들에 의한 만세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의 장례에 참여하고자 상경했던 신영호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3월 9일 청주농업학교 학생 오석영에게 전달하면서 청주농업학교에서의 만세운동은 구체화되었고,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박승하는 이러한 사실을 접하면서 만세운동의 계획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3월 9일 김현구의 방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경고문 3백 매를 인쇄하면서 만세시위를 준비해 갔는데, 도중에 발각되어 박승하는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5일 대구복심법원과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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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명 의적비
임수명(1894-1924)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이다. 1912년 서울의 어느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환자로 위장하고 입원하고 있던, 통의부 군사 위원장 겸 사령관 신팔균과 알게 되어 1914년 결혼하였다. 그 후 북경으로 망명한 부군의 비밀문서 연락 등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1921년 밀명을 띠고 입국한 부군을 따라 만주로 가서 계속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1924년, 음력 8월 1일 신팔균이 통의부 사령관 소재지를 습격한 중국 마적과 전투 중 전사하자, 귀국하여 서울 종로구 사직동 자택에서 딸과 함께 자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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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식 흉상
신홍식(1872-1939)은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기독교인이다. 34세에 기독교에 입교한 후, 1913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공주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으며, 1917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로 전임되어 포교와 교육사업에 정진하였다. 1919년 2월 14일,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였던 신홍식은 동지 규합을 위해 평양에 온 이인환(李寅煥)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2월 20일 이인환의 집에서 오화영(吳華英), 정춘수(鄭春洙), 오기선(吳基善) 등의 동지와 모여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모아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협의하고, 이인환, 이필주(李弼柱),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오화영, 최성모(崔聖模),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박동완(朴東完),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길선주(吉善宙), 정춘수 등의 동지와 함께 기독교 측 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8일 밤에는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 총감부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인천, 원주 등지에서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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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취선 묘
어취선(1870-1936)은 1896년 을미의병 당시 유홍석의 의진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1911년 4월 의병 가족 50여 가구와 함께 중국 신빈현(新賓縣) 평정산(平頂山) 난천자(暖泉子)로 이주하여 의암 유인석이 추진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이어서 11월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중락 유봉석, 김경달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제천의진(堤川義陳)이 형성되어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자 이에 합류하여 사무를 관장하였다. 또한 유홍석의 휘하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05년 1월 춘천 가정(柯亭) 지역에서 유인석을 만나 그 문하에 들어갔으며, 을사늑약 이후 운강 이강년을 비롯하여 김상태 등 각처 의병장들과 교류하였다. 1911년 4월 평정산 난천자로 이주하여 유인석과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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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신건식 집
신규식(1880-1922)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대한제국의 군인, 한국의 공화주의 독립혁명가이다. 대한제국에서 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경술국치를 맞자, 이듬해인 1911년에 청나라 상해로 망명해 쑨원과 천치메이 등의 중국 동맹회 간부들과 친교를 맺어 중국 동맹회에 가입한 뒤 신해혁명에도 참여했다. 이어, 1912년에 7월에 '동주공제'(同舟共濟)라는 뜻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공화주의 독립혁명을 총괄 지도하였으며, 동해에 신해혁명계 인사들과 친교를 맺기 위해 신아동제사를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의 총재 박은식을 비롯해 김규식과 신채호 및 조소앙, 홍명희, 여운형, 조동호, 장건상 등이 가입해 있었다. 이들은 1917년 7월에 공화주의 독립선언서인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1918년에 여운형을 지도하여 신한청년당의 조직을 지원했다. 이듬해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이 되어 1921년 11월 3일에 쑨원이 이끄는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임정의 승인과 지원을 얻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2년에 단식으로 몸이 악화된 상태에서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신건식(1889-1963)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1912년 4월에 중국 절강성(浙江省) 성립(省立)의 항주 의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예관 신규식, 단재 신채호, 박찬익 등과 함께 생활부조와 국사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 만든 동제사(同濟社)와 대동보국단(大東輔國團)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3년 4월, 신건식은 중국군(中國軍) 중교(中校)로 항주 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중국군으로 복무하면서 우리 동포를 지원하여 임시정부의 활동을 조력하였다.1939년에 중경(重慶)으로 이전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에서 충청도 대표 의원으로 선임되어, 1945년 광복 때까지 입법 활동을 통하여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데 심혈을 경주하였다.1941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원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는데 진력하였고, 1943년 3월 4일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차장에 임명되었다. 1944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감찰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5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문제의 확충과 운영에 기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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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호 집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신영호의 고택이다. 1919년 당시 경성중앙학교(京城中央學校) 재학생의 신분으로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귀향하였다. 3월 9일에는 청주농업학교 기숙사(淸州農業學校)로 가서 학생들에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청주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제의하여, 독립선언문과 경고문 등을 제작하고 인쇄하는 등 거사 준비를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해 4월 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고 항고했으나 5월 5일 대구복심법원과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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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가묘
신규식(1880-1922)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대한제국의 군인, 한국의 공화주의 독립혁명가이다. 대한제국에서 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경술국치를 맞자, 이듬해인 1911년에 청나라 상해로 망명해 쑨원과 천치메이 등의 중국 동맹회 간부들과 친교를 맺어 중국 동맹회에 가입한 뒤 신해혁명에도 참여했다. 이어, 1912년에 7월에 '동주공제'(同舟共濟)라는 뜻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공화주의 독립혁명을 총괄 지도하였으며, 동해에 신해혁명계 인사들과 친교를 맺기 위해 신아동제사를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의 총재 박은식을 비롯해 김규식과 신채호 및 조소앙, 홍명희, 여운형, 조동호, 장건상 등이 가입해 있었다. 이들은 1917년 7월에 공화주의 독립선언서인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1918년에 여운형을 지도하여 신한청년당의 조직을 지원했다. 이듬해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이 되어 1921년 11월 3일에 쑨원이 이끄는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임정의 승인과 지원을 얻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2년에 단식으로 몸이 악화된 상태에서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