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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한 공적비
윤병한(1873-1932)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대한제국의 육군참위로서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군대가 강제해산을 당하자 의병에 참여하여 일제에 항쟁하였다. 경술국치를 당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고향인 농민계몽에 힘 쓰던 중, 전국적으로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광혜원(廣惠院)의 정관옥(鄭寬玉), 오은영(吳殷泳)과 의논하여 자신이 경영해 오던 회죽리 일대의 면유림(面有林)에 나무를 심는 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일인 4월 2일 식목 작업 중에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의하고, 거사일에 제일 먼저 앞장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정운화(鄭雲和), 남계홍(南啓弘), 백선옥(白先玉), 이영호(李榮鎬) 등 200여 명이 독립만세를 따라서 외쳤다.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마을 안을 행진하다가, 만승면(萬升面) 사무소에 이르러 면서기에게 같은 조선 사람으로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면서 면사무소에 투석하고 곡괭이 등으로 파괴하는 동시에 인근에 새로이 건설 중이던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공사 현장의 건축자재 등을 폐기시키고 벽을 곡괭이로 헐어버리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이튿날 광혜원 장날을 이용하여 계속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꾀하여, 4월 2일 저녁에 광신사(廣信社)에서 만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라는 경고문 등을 면사무소 소사인 박수문(朴壽文)에게 20여 매를 인쇄하게 하였고, 이를 장터 곳곳에 붙여놓게 하였다. 4월 3일 장터에 모인 2천여 명의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하던 중, 진천에서 온 10여 명의 일본 헌병이 무차별 발포함으로써 유치선(柳致先)과 그의 어머니가 적탄에 맞아 현장에서 희생된 것을 비롯하여 10여 명이 순국하고 많은 부상자를 낸 채 시위군중이 해산하였다. 4월 4일에 진천에서 일본 헌병 20명을 파견하여 광혜원 독립만세시위 주동자의 검거를 시작하였다. 결국 윤병한도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그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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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동상
이상설(1870-1917)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 시절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1904년 6월 일본이 전국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에 선임되고 이준(李儁)이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이상설은 그 늑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거듭하여 올렸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4월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북간도의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8월경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숙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간도 일대의 교육 구국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다는 칙명을 받았다. 비록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세 밀사들은 6월 27일에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결국 1916년 중병에 걸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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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복 사적비
충청북도 진천에 위치한 채수복의 비이다. 채수복(1910-1945)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이다. 서울 협성실업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독립운동이 확대되면서 서울까지 파급되자 1939년 1월에 같은 학교 학생들을 주도하여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일경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했다가 일본으로 잠입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1943년경에 채수복은 경도신문사의 기자로 근무하던 중, 알 수 없는 죄명으로 일경에 다시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3월 11일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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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 항일의거비
한봉수(1883-1972)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근무하다가 1907년 조선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그해 음력 8월에 의병장 김규환 의진에 가담하여 일본군의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였다. 1907년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병진을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라 칭하였다. 이후 강원으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고, 의병장 조운식(趙雲植)과 적과 맞설 계획을 논의하고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식량과 무기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점점 강해짐에 결국 의병을 해산하고,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1910년 소위 내란죄 및 강도·살인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았으나, 경술국치가 이루어짐에 따라 1910년 8월 29일 사면을 받아 면소 판결되어 석방되었다.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 즈음에 홍명희,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 7일 청주의 서문장터(우시장)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 다시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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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서 구 묘
정춘서(1885-미상), 일명 춘서(春西)는 청주에서 한봉수 등과 의거하여 의병항쟁을 하다가 피체되어 순국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1907년 군대해산령이 내리자 고향 청주에서 한봉수(韓鳳洙)와 함께 의병으로 봉기하였다. 이 때 9명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하였는데 5월 10일(음력)에는 괴산군 서면 모래재[沙峙]에서 한봉수와 함께 일본 수비대 2명이 우편물을 호위하며 통과하는 것을 확인하고 습격하여 일본군 2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물품을 노획하였다. 한편 청주군 북강내이면 화죽리에 거주하는 박내천(朴來舛)이라는 자가 일경에게 의병활동을 밀고하자 8월 15일 그를 처단하였고, 10월 동리(東里)에서 김덕보(金德甫)·이주사(李主事)로부터 군자금 50원을 모금하였다. 12월에는 동료 이종칠(李鍾七) 외 1명과 총 2정으로 무장하고 16일에 청주군 북강외이면 양청리(陽淸里) 유주사(柳主事)집에서 44원 10전을 군자금으로 모금하였으며 계속해서 충남 목천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일제에 피체되어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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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팔균 집
신팔균(1882-1924)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2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로서 강계진위대에서 활약하다가, 같은 해 7월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낙향하여 후진 육성에 진력하였다. 1909년에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안희제, 이원식, 윤세복, 서상일, 김동삼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 해외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에는 동삼성의 지도자로서 여준, 정안립, 박성태, 박찬익, 정신, 김동삼, 손일민, 김좌진, 서일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오광선, 이범석, 김경천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2년에는 의군부, 광복단, 광한단, 흥업단 등 8개 단체가 합류하여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에는 사령관에 취임하여 양세봉, 문학빈, 심용준, 박응백 등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 300여 명이 통의부사령부 소재지인 왕청문 이도구를 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1924년 7월 부하들을 이도구 높은 산에 매복시킨 후 그들과 결전을 행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전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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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팔균 사적비
신팔균(1882-1924)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2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로서 강계진위대에서 활약하다가, 같은 해 7월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낙향하여 후진 육성에 진력하였다. 1909년에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안희제, 이원식, 윤세복, 서상일, 김동삼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 해외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에는 동삼성의 지도자로서 여준, 정안립, 박성태, 박찬익, 정신, 김동삼, 손일민, 김좌진, 서일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오광선, 이범석, 김경천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2년에는 의군부, 광복단, 광한단, 흥업단 등 8개 단체가 합류하여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에는 사령관에 취임하여 양세봉, 문학빈, 심용준, 박응백 등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 300여 명이 통의부사령부 소재지인 왕청문 이도구를 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1924년 7월 부하들을 이도구 높은 산에 매복시킨 후 그들과 결전을 행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전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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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직 묘
이상직(1878-1947)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목표로 1909년 진천에 문명학교(文明學校)를 설립하고 교육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상직은 3월 15일 진천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고자 자택에서 각 마을 대표 수십 명과 회합하여 준비했으나 이튿날 새벽에 일제 경찰에 구속되었고, 결국 이상직을 제외하고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석방된 후 4월 2일, 이상직은 제2차 진천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켜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다가 다시 일경에게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중병으로 석방되었다. 1925년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리는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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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집
조명희(1894-1938)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호는 포석(砲石) 또는 조생이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1919년 가을경 일본 도쿄 연교학관에 들어갔고, 일본 유학생 모임이 동우회에서 활동했다. 1921년 여름방학 때는 문화선전을 목적으로 연극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각 지역을 순회하며 연설가로 활동했다. 12월 17일 조명희는 황석우 등이 소속된 의권단(義拳團)에 가입했는데, 의권단은 사회주의자와 연계를 맺어 재경친일자(在京親日者)와 밀정(密偵) 등을 징계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조명희는 희곡 작가, 연극운동가, 시인, 소설가로 작품 활동을 하며, 1925년 여름에는 무산계급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몸담았다. 1927년 7월에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낙동강」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일제의 수탈과 착취로 고향과 농토를 빼앗기고 도시근로자로 흘러가거나 북간도 등으로 유랑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한국 농촌의 궁핍한 생활상을 날카롭게 묘사하였다.1928년 6월 5일 자신의 창작집 『낙동강(洛東江)』과 이기영의 작품집 『민촌(民村)』이 출판되자, 한국 최초로 창작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또한 7월 27일에는 서울 공평동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회관에서, 본 동맹의 경성지회 설립대회 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항일과 카프 활동을 계속하자 일제의 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생활상의 곤란도 심하였다. 결국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교원이 되었다. 1928년 10월에는 연해주에서 「짓밟힌 고려」라는 산문시를 발표했다. 「짓밟힌 고려」는 일제 식민지하에 한국인의 궁핍과 민족의 비참상을 묘사했다. 항일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서 계급해방의식을 형상화했다. 1929년에는 연해주 푸칠로프카(육성촌) 농업화훼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쳤다. 한글 신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 등을 통해서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다. 1935년 7월에 연해주 스꼬또브 구역 뽀두쓰까 초급 중등학교가 10년제의 중등학교로 승격되자, 조명희는 이 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었다. 조명희는 연해주 지역 학교에서 교원으로 한인 2세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소비에트 문사 동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6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었을 때, 매월 6일에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였다. 9월 27일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자 이곳에서도 문인들을 지도했다. 스탈린 대 탄압이 시작되면서 1937년 9월 18일 일본 첩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조명희는 1938년 5월 11일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후 1956년 7월 20일 극동주 군법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조명희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사형을 당하였지만, 연해주에서 문학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수많은 문학인을 길러낸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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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문학비
조명희(1894-1938)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호는 포석(砲石) 또는 조생이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1919년 가을경 일본 도쿄 연교학관에 들어갔고, 일본 유학생 모임이 동우회에서 활동했다. 1921년 여름방학 때는 문화선전을 목적으로 연극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각 지역을 순회하며 연설가로 활동했다. 12월 17일 조명희는 황석우(黃錫禹) 등이 소속된 의권단(義拳團)에 가입했는데, 의권단은 사회주의자와 연계를 맺어 재경친일자(在京親日者)와 밀정(密偵) 등을 징계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조명희는 희곡 작가, 연극운동가, 시인, 소설가로 작품 활동을 하며, 1925년 여름에는 무산계급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몸담았다. 1927년 7월에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낙동강」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일제의 수탈과 착취로 고향과 농토를 빼앗기고 도시근로자로 흘러가거나 북간도 등으로 유랑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한국 농촌의 궁핍한 생활상을 날카롭게 묘사하였다. 1928년 6월 5일 자신의 창작집 『낙동강(洛東江)』과 이기영의 작품집 『민촌(民村)』이 출판되자, 한국 최초로 창작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또한 7월 27일에는 서울 공평동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회관에서, 본 동맹의 경성지회 설립대회 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항일과 카프 활동을 계속하자 일제의 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생활상의 곤란도 심하였다. 결국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교원이 되었다. 1928년 10월에는 연해주에서 「짓밟힌 고려」라는 산문시를 발표했다. 「짓밟힌 고려」는 일제 식민지하에 한국인의 궁핍과 민족의 비참상을 묘사했다. 항일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서 계급해방의식을 형상화했다. 1929년에는 연해주 푸칠로프카(육성촌) 농업화훼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쳤다. 한글 신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 등을 통해서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다. 1935년 7월에 연해주 스꼬또브 구역 뽀두쓰까 초급 중등학교가 10년제의 중등학교로 승격되자, 조명희는 이 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었다. 조명희는 연해주 지역 학교에서 교원으로 한인 2세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소비에트 문사 동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6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었을 때, 매월 6일에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였다. 9월 27일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자 이곳에서도 문인들을 지도했다. 스탈린 대 탄압이 시작되면서 1937년 9월 18일 일본 첩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조명희는 1938년 5월 11일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후 1956년 7월 20일 극동주 군법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조명희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사형을 당하였지만, 연해주에서 문학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수많은 문학인을 길러낸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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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시비
조명희(1894-1938)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호는 포석(砲石) 또는 조생이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1919년 가을경 일본 도쿄 연교학관에 들어갔고, 일본 유학생 모임이 동우회에서 활동했다. 1921년 여름방학 때는 문화선전을 목적으로 연극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각 지역을 순회하며 연설가로 활동했다. 12월 17일 조명희는 황석우(黃錫禹) 등이 소속된 의권단(義拳團)에 가입했는데, 의권단은 사회주의자와 연계를 맺어 재경친일자(在京親日者)와 밀정(密偵) 등을 징계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조명희는 희곡 작가, 연극운동가, 시인, 소설가로 작품 활동을 하며, 1925년 여름에는 무산계급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몸담았다. 1927년 7월에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낙동강」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일제의 수탈과 착취로 고향과 농토를 빼앗기고 도시근로자로 흘러가거나 북간도 등으로 유랑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한국 농촌의 궁핍한 생활상을 날카롭게 묘사하였다. 1928년 6월 5일 자신의 창작집 『낙동강(洛東江)』과 이기영의 작품집 『민촌(民村)』이 출판되자, 한국 최초로 창작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또한 7월 27일에는 서울 공평동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회관에서, 본 동맹의 경성지회 설립대회 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항일과 카프 활동을 계속하자 일제의 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생활상의 곤란도 심하였다. 결국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교원이 되었다. 1928년 10월에는 연해주에서 「짓밟힌 고려」라는 산문시를 발표했다. 「짓밟힌 고려」는 일제 식민지하에 한국인의 궁핍과 민족의 비참상을 묘사했다. 항일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서 계급해방의식을 형상화했다. 1929년에는 연해주 푸칠로프카(육성촌) 농업화훼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쳤다. 한글 신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 등을 통해서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다. 1935년 7월에 연해주 스꼬또브 구역 뽀두쓰까 초급 중등학교가 10년제의 중등학교로 승격되자, 조명희는 이 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었다. 조명희는 연해주 지역 학교에서 교원으로 한인 2세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소비에트 문사 동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6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었을 때, 매월 6일에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였다. 9월 27일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자 이곳에서도 문인들을 지도했다. 스탈린 대 탄압이 시작되면서 1937년 9월 18일 일본 첩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조명희는 1938년 5월 11일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후 1956년 7월 20일 극동주 군법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조명희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사형을 당하였지만, 연해주에서 문학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수많은 문학인을 길러낸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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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집
이상설(1870-1917)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며 아버지는 이행우(李行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고 7세 때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었다.이상설은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 시절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1904년 6월 일본이 전국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에 선임되고 이준(李儁)이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이상설은 그 늑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거듭하여 올렸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4월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북간도의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8월경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숙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간도 일대의 교육 구국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다는 칙명을 받았다. 비록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세 밀사들은 6월 27일에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결국 1916년 중병에 걸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