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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병 남산 전투지
제천의병 남산전투지 안내판은 충북 제천에 있으며, 충청북도제천교육지원청 앞에 위치하고 있다. 제천의병 남산 전투지는 1896년 5월 25일 제천의병이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의병장 안승우와 홍사구가 여기서 순국하였다. 제천의병은 일제의 압력으로 출동한 관군과 제천 고장숲(현 영천동 역사마을)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전투 초기 의병은 관군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 기세를 올렸으나, 갑작스런 비바람으로 화승총을 쏠 수 없게되자 남산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남산에서 관군을 막고 있던 중군장 안승우는 대세가 기우는 상황에서도 의병들을 독려하다가 관군의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안승우의 곁을 지키던 종사 홍사구도 이때 함께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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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병 남산 격전지
제천의병 남산 격전지 안내판은 충북 제천에 위치하며, 정봉산 정상에 올라가면 볼 수 있다. 1895년 일제 침략에 맞서 제천의병 일만 병력이 충주성을 점령후 물러나 제천을 본부로 삼아 주둔하면서 계속 투쟁하였다. 1896년 5월 25일 일본군과 친일파 관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맞서 고장숲(현 영천동 역관사마을) 전투에서 3차례나 적을 물리쳤으나 오후에 갑자기 흙비가 쏟아지면서 의병들의 중요장비인 화승총이 비에 젖어 사격을 할 수가 없어 전투력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남산에서 항전을 하게 되었는데 중군장 안승우와 종사 홍사구는 의병들을 독려하며 분투하였지만 전세가 불리하자 주변의 의병들은 모두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남산에서 항전한 이곳을 남산 격전지라고 한다. 그 후 총격을 받은 안승우는 회유하는 적을 매섭게 꾸짖으며 순절하고, 홍사구 역시 스승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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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군 독립만세 발원지 기념비
증평군 독립만세 발원지 기념비는 충북 증평에 있다. 1919년 4월 10일 도안면 광덕리 구계마을에서 오후 5시경부터 약 300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일제 경찰이 무력 탄압하여 1명의 순국자가 발생한 독립만세시위의 역사적 사실을 알리기 위해 건립한 기념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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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 집
연병호(1894-1963)는 충청북도 괴산(현 증평) 사람으로, 1919년 4월에 서울에서 이병철과 협의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조용주, 안재홍, 김홍식, 김연우, 김태규, 이의경, 조소앙 등이 합류하여 역할을 맡았다. 그중 연병호는 조용주와 함께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창립된 최초의 단체로, 임시정부에 대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통신하여 주는 것,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 그리고 선전활동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경상북도 도 경찰은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애국부인회와 연계하여 서울에 본부, 각 지방에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때 연병호도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다시 상해로 탈출한 그는 1921년 4월 한인대동(韓人大同)을 목적으로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世界韓人同盟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 김현구, 조소앙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수습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로의 의견이 부합되지 않자, 조소앙, 김용철, 조완, 이기룡 등과 함께 탈퇴하였다. 1929년 말에는 안창호, 이동녕, 김구, 엄항섭, 이시영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연계하여 조국광복운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2월에는 윤기섭과 함께 재남경(在南京) 한국혁명당 대표로서 재만(在滿)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홍면희, 김원식 등과 회합하고 독립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양 단체를 통합하여 새로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였다. 1935년 1월 재남경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집행위원이던 연병호는 정무(政務)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어, 의열단(義烈團)을 다시 통합하여 1935년 7월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그는 또한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 무렵에 독립공론(獨立公論)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그는 일제 앞잡이인 이갑녕(李甲寧)의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총영사관의 경찰의 추적을 받아 1937년 1월 7일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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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 항일역사공원
연병호(1894-1963)는 충청북도 괴산(현 증평) 사람으로, 1919년 4월에 서울에서 이병철과 협의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조용주, 안재홍, 김홍식, 김연우, 김태규, 이의경, 조소앙 등이 합류하여 역할을 맡았다. 그중 연병호는 조용주와 함께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창립된 최초의 단체로, 임시정부에 대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통신하여 주는 것,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 그리고 선전활동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경상북도 도 경찰은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애국부인회와 연계하여 서울에 본부, 각 지방에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때 연병호도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다시 상해로 탈출한 그는 1921년 4월 한인대동(韓人大同)을 목적으로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世界韓人同盟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 김현구, 조소앙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수습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로의 의견이 부합되지 않자, 조소앙, 김용철, 조완, 이기룡 등과 함께 탈퇴하였다. 1929년 말에는 안창호, 이동녕, 김구, 엄항섭, 이시영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연계하여 조국광복운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2월에는 윤기섭과 함께 재남경(在南京) 한국혁명당 대표로서 재만(在滿)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홍면희, 김원식 등과 회합하고 독립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양 단체를 통합하여 새로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였다. 1935년 1월 재남경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집행위원이던 연병호는 정무(政務)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어, 의열단(義烈團)을 다시 통합하여 1935년 7월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그는 또한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 무렵에 독립공론(獨立公論)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그는 일제 앞잡이인 이갑녕(李甲寧)의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총영사관의 경찰의 추적을 받아 1937년 1월 7일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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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환 공적비
연병환(1878-1926)은 1908년 7월 이후 중국 길림성 연길현 해관(海關)에서 관리로 근무하면서 1919년 간도 용정(龍井)에서 일어난 3·13 만세시위운동에서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다가 일제 간도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2개월의 처벌을 받았다. 이후 상해(上海)로 이동하여 1920년 대한인거류민단(大韓人居留民團)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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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 구 묘
연병호(1894-1963)는 충청북도 괴산(현 증평) 사람으로, 1919년 4월에 서울에서 이병철과 협의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조용주, 안재홍, 김홍식, 김연우, 김태규, 이의경, 조소앙 등이 합류하여 역할을 맡았다. 그중 연병호는 조용주와 함께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창립된 최초의 단체로, 임시정부에 대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통신하여 주는 것,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 그리고 선전활동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경상북도 도 경찰은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애국부인회와 연계하여 서울에 본부, 각 지방에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때 연병호도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다시 상해로 탈출한 그는 1921년 4월 한인대동(韓人大同)을 목적으로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世界韓人同盟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 김현구, 조소앙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수습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로의 의견이 부합되지 않자, 조소앙, 김용철, 조완, 이기룡 등과 함께 탈퇴하였다. 1929년 말에는 안창호, 이동녕, 김구, 엄항섭, 이시영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연계하여 조국광복운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2월에는 윤기섭과 함께 재남경(在南京) 한국혁명당 대표로서 재만(在滿)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홍면희, 김원식 등과 회합하고 독립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양 단체를 통합하여 새로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였다. 1935년 1월 재남경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집행위원이던 연병호는 정무(政務)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어, 의열단(義烈團)을 다시 통합하여 1935년 7월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그는 또한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 무렵에 독립공론(獨立公論)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그는 일제 앞잡이인 이갑녕(李甲寧)의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총영사관의 경찰의 추적을 받아 1937년 1월 7일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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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 송덕비
연병호(1894-1963)는 충청북도 괴산(현 증평) 사람으로, 1919년 4월에 서울에서 이병철과 협의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조용주, 안재홍, 김홍식, 김연우, 김태규, 이의경, 조소앙 등이 합류하여 역할을 맡았다. 그중 연병호는 조용주와 함께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창립된 최초의 단체로, 임시정부에 대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통신하여 주는 것,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 그리고 선전활동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경상북도 도 경찰은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애국부인회와 연계하여 서울에 본부, 각 지방에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때 연병호도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다시 상해로 탈출한 그는 1921년 4월 한인대동(韓人大同)을 목적으로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世界韓人同盟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 김현구, 조소앙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수습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로의 의견이 부합되지 않자, 조소앙, 김용철, 조완, 이기룡 등과 함께 탈퇴하였다. 1929년 말에는 안창호, 이동녕, 김구, 엄항섭, 이시영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연계하여 조국광복운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2월에는 윤기섭과 함께 재남경(在南京) 한국혁명당 대표로서 재만(在滿)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홍면희, 김원식 등과 회합하고 독립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양 단체를 통합하여 새로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였다. 1935년 1월 재남경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집행위원이던 연병호는 정무(政務)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어, 의열단(義烈團)을 다시 통합하여 1935년 7월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그는 또한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 무렵에 독립공론(獨立公論)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그는 일제 앞잡이인 이갑녕(李甲寧)의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총영사관의 경찰의 추적을 받아 1937년 1월 7일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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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의 묘
이찬의(1878-1919)는 충청북도 괴산 사람으로, 1919년 3월 30일 청안(淸安) 장날을 기하여 김수백, 이태갑, 신강면 등이 주동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는 3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주재소와 우편소로 행진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점차 시위군중이 격렬해져서 우편소와 주재소 등을 습격하자, 이에 겁이 난 일본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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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무 공적비
임창무(1893-1944)는 충청북도 괴산 사람으로, 1919년 4월 4일 김제군 만경면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임창무는 당시 만경 보통학교 교사로서, 동료인 오연길, 장태석, 이석재 등과 함께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인근 익산군 오산면의 애국지사인 문용기와도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4일 정오, 그는 3, 4학년 학생 1백여 명을 교정에 모여놓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고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동하였다. 그러나 이때 김제경찰서에서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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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무 묘
임창무(1893-1944)는 충청북도 괴산 사람으로, 1919년 4월 4일 김제군 만경면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임창무는 당시 만경 보통학교 교사로서, 동료인 오연길, 장태석, 이석재 등과 함께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인근 익산군 오산면의 애국지사인 문용기와도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4일 정오, 그는 3, 4학년 학생 1백여 명을 교정에 모여놓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고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동하였다. 그러나 이때 김제경찰서에서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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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 의거 기념비
충청북도 증평에 위치한 3.1독립운동의거 기념비이다. 본 비는 1919년 3월 30일, 청안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젊은 주도자 이태갑, 장성원, 신강면, 함재원, 박래명, 김수백 등이 사전계략을 세워, 3월 30일 오후 2시경 거사가 일어났다. 괴산 연락원 이모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이태갑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군중들이 따라 외치며 행진했다. 시위군중이 주재소와 우편소를 엄습하려 하니 왜경과 주둔 일병이 총을 쏘아 대응하고 해산하는 군중을 마구 검거하였다. 그 결과 백여 명이 검거되었고, 주도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위와 같은 애국지사들의 공로를 기리어 충청북도 증평 삼일공원 내에 3.1독립운동의거 기념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