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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한 묘
김상한(1842-1917)은 1907년 김상한은 십 수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강년 의진에 나아가 의진의 별진장(別陣將)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이강년 의지에서 독립하여 경북지방 일대의 의병장이 되고 부하 7백 명과 함께 문경령(聞慶嶺) 산 아래에서 적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때에 따라 운강 의진과 연합전략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907년 3월 1일 경북 조령(鳥嶺)에 포진, 11월 문경 동로면에서 적 8백 명과 교전 등 많은 전투를 벌이다가 1917년 10월에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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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묵 공적비
신광묵(1872-1949)은 1896년 유인석(柳麟錫) 의병장이 거의하자 입진하여 활동하였고, 유인석 의병장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자 은신 중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정미7조약 이후 이강년(李康秊)의진에 참여하였고, 신광묵은 좌종사(坐從事)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강년 의병장이 순국하자 의진은 와해되었지만, 신광묵은 계속해서 일제에 항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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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묵 묘
신광묵(1872-1949)은 1896년 유인석(柳麟錫) 의병장이 거의하자 입진하여 활동하였고, 유인석 의병장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자 은신 중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정미 7조약 이후 이강년(李康秊)의진에 참여하였고, 신광묵은 좌종사(坐從事)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강년 의병장이 순국하자 의진은 와해되었지만 신광묵은 계속해서 일제에 항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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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옥 묘
최대옥(1866-미상)은 1907년 의병운동에 투신하여 동료 20여 명과 함께 화승총을 휴대하고 충북 제천군 근우면 부근에서 활동하였고,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비치리에서 소 1마리를 징발하는 등 군수품 보급에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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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한 창의숭모비
김상한(1842-1917)은 1907년 김상한은 십 수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강년 의진에 나아가 의진의 별진장(別陣將)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이강년 의지에서 독립하여 경북지방 일대의 의병장이 되고 부하 7백 명과 함께 문경령(聞慶嶺) 산 아래에서 적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때에 따라 운강 의진과 연합전략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907년 3월 1일 경북 조령(鳥嶺)에 포진, 11월 문경 동로면에서 적 8백 명과 교전등 많은 전투를 벌이다가 1917년 10월에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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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한 숭모비
김상한(1842-1917)은 1907년 김상한은 십 수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강년 의진에 나아가 의진의 별진장(別陣將)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이강년 의지에서 독립하여 경북지방 일대의 의병장이 되고 부하 7백 명과 함께 문경령(聞慶嶺) 산 아래에서 적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때에 따라 운강 의진과 연합전략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907년 3월 1일 경북 조령(鳥嶺)에 포진, 11월 문경 동로면에서 적 8백 명과 교전 등 많은 전투를 벌이다가 1917년 10월에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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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규 묘
김석규(1888-1929)는 마정삼(馬正三)의 아들 마만봉(馬萬奉)·마뇌병(馬雷炳)·마도현(馬道賢) 등과 박영관(朴泳寬)의 아들 박순구(朴順九) 등이 원수를 갚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일경을 살해할 목적으로 장총단(長銃團)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였다. 1921년 9월 어은리(於隱里)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이후 마남룡(馬南龍)·전봉학(全鳳學) 등과 군자금 모집과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7년 11월 붙잡혔다. 이후 사형이 선고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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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일 창의공로숭모비
권용일(1884-1971)은 1907년 의병에 투신하여 의병장 이강년의 우군선봉(처음), 도선봉(후)를 맡아 청풍과 충주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6월, 제천, 보평, 연풍 유치산, 죽령, 안동 서벽 등지의 전투에서 좌군선봉 백남규와 함께 다대한 공을 세우고 수백명의 왜적을 도륙 포로하였다. 이강년이 체포된 후, 전승지 김규환, 이범구, 김규철 등과 모의하여 고종에게서 원세개(袁世凱)에의 청병조서(請兵詔書)를 받아 출국 중 발각되어 타 삼인은 체포되고 혼자 망명에 성공하였다. 이후 해방 때까지 망명 생활하다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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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승 묘
이주승(1868-1946)은 1905년 을사조약의 늑결 이후 단양(丹陽)에서 이강년(李康秊)이 재거(再擧)하게 되었고, 입진(入陣)하여 좌종사(坐從事)에 임명되어 제천·문경(聞慶) 등지를 전전하며 일군과 싸웠다. 1908년 6월, 까치성〔鵲城〕전투에서 이강년 의병장이 부상을 입고 붙잡힐 때 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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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승 묘
이조승(1873-1900)은 유인석(柳麟錫)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진에서 스스로 종사관으로 참가하여 의병대장을 보좌하였다. 1896년 400명의 병력으로는 부족하여 사방에 통문을 보내어 병력을 강화하였는데, 이조승은 승지로서의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5백명의 민병을 거느리고 대진에 합세하여 군세를 크게 떨치게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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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승, 이조승 의병공적 숭모비
이주승(1868-1946)은 1905년 을사조약의 늑결 이후 단양(丹陽)에서 이강년(李康秊)이 재거(再擧)하게 되었고, 입진(入陣)하여 좌종사(坐從事)에 임명되어 제천·문경(聞慶) 등지를 전전하며 일군과 싸웠다. 1908년 6월, 까치성전투에서 이강년 의병장이 부상을 입고 붙잡힐 때 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조승(1873-1900)은 유인석(柳麟錫)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진에서 스스로 종사관으로 참가하여 의병대장을 보좌하였다.1896년 400명의 병력으로는 부족하여 사방에 통문을 보내어 병력을 강화하였는데, 이조승은 승지로서의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5백명의 민병을 거느리고 대진에 합세하여 군세를 크게 떨치게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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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의병광장
제천의병광장은 남산전투에서 순국한 이름 모를 수많은 의병들의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5년 만들어진 광장이다. 제천의병광장은 충북 제천에 위치하고 있으며, 제천 야외음악당 일부를 제천의병광장으로 부르고 있다. 을미사변 이후 제천에서는 을미의병이 창의되며 의암 유인석 대장이 이끄는 제천의병이 시작되었다. 현재 제천시 화산동의 제천교육지원청에서 야외음악당, 실내체육관, 공설운동장 일대가 1896년 5월 25일에 남산전투에서 안승우 중군장과 홍사구 종사관을 비롯한 수많은 제천의병들이 죽음을 맞이한 남산성전투 전적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