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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병창의지 (자양영당)
제천 자양영당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유중교(柳重敎)[1832~1893]가 후진을 양성할 목적으로 1889년(고종 26)에 창주정사(滄州精舍)를 세운 강학처를 기반으로, 1906년 이소응(李昭應)의 주도하에 화서학파에서 존중하는 선현들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면서 창건되었다. 1977년에 있었던 제천 자양영당 전면 보수 공사 전에는 지붕이 돌기와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1984년 12월 3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1995~2001년에 제천 자양영당 보수, 의병 사당인 숭의사 신축, 의병 전시관과 의병 탑 건립 등 제천 자양영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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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성 묘
박여성(1860-1908)의 이명은 박성렬(朴成烈)이며, 1907년 8월 평양진위대(平壤鎭衛隊)가 해산당한 후 청풍(淸風)으로 내려와 조동교(趙東敎)·황대성(黃大成)·조동규(趙東奎)·방필성(方必成)·박덕준(朴德峻)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했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였으며 충주(忠州)로 퇴각시켰고, 다음날에도 기습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 양재원(梁在遠)과 합세, 인제(麟蹄)를 공격하여 군청과 주재소(駐在所)·우편소(郵便所)를 습격하고 일진회원(一進會員)을 응징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08년 10월 13일 충주 하달천(下達川)에서 일군과 교전하던 중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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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응 묘
이소응(1852~1930)의 이명은 이선민(李宣愼)이고, 호는 습재(習齎)이다. 이소응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나자, 1896년 춘천에 집결한 유생 유중락, 이만응 등과 농민 1,000여 명에 의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병항쟁을 독려하는 격문을 8도에 보냈고 유인석의 의진으로 입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1930년 3월 순국하였다. 춘천의 의병운동과 의암 의진의 활동 상황을 기록하여 「습재연보」「습재선생문집」 등의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 활용되고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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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이 묘
김선이(미상~1896)은 서상렬(徐相烈)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충청·강원도에서 활약하였다. 일제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삼국개입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일제는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극악한 방법까지 동원하였고, 마침내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을미개혁(乙未改革)을 실시하면서 단발령까지 강행하였다. 이렇게 되자, 경기도 양평지방의 유인석의 제자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하여 거의를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서상렬(徐相烈)을 중심으로 이필희(李弼熙)·안승우(安承禹)·이춘영(李春永) 등이 거병하였다. 이 때 김선이는 처음부터 서상렬 의병장을 따라 다니며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러던 중 제천전투에서 유인석 의진이 패한 후 유인석은 1896년 7월 11일 강원도 대화에 이르러 서상렬·이강년과 함께 평안도 방면으로 갈 것을 결정하고 관서지방 이동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이에 서상렬은 전군, 이강년은 후군으로 한 서행장정(西行長征)의 행렬이 태백산맥을 따라 북으로 이어졌다. 서상렬은 강원도 양구(楊口) 교내(橋內)에서 적을 만나 싸우다가 군사를 이끌고 7월 22일 낭천(狼川:지금의 華川)으로 들어갔는데, 이 때 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 순국하였다. 당시 서상렬 의병장을 보좌하던 김선이도 서상렬의 시신을 붙들고 적을 꾸짖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전투가 끝나자 그 고을 수령이 서상렬 의병장과 김선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함께 길가에 묻었다. 그 후 석달이 지나서 사람들이 시신을 찾아 반장(返將)하고자 하였으나, 적의 기세가 너무 포악하여 수습할 수가 없었다. 이 때 의거를 같이 한 사람인 채국보(蔡國輔)가 적중으로 뛰어들어 서상렬 의병장과 김선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반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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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용규 의병순절숭모비
주용규(1845~1896)는 15세에 과장(科場)에서 시문으로 이름을 날리고, 향시(鄕試)와 성시(省試)에 연이어 합격하였으나, 국가가 점점 혼란스러워지자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895년(고종 32) 장담(長潭)에서 『성재집(省齋集)』 간행에 종사하다가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성재집』 간행을 중지하고 유인석(柳麟錫)을 주석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유인석의 휘하에서 참모로 활약하면서 팔도(八道)와 백관(百官), 각 국 공사(公司)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짓기도 하였는데, 이듬해인 1896년 충주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주용규의 아들인 주현오(朱鉉五)와 주현삼(朱鉉三)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이강년(李康䄵)과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모두 절사(節死)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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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태, 이용준 추모비
이용태(1890~1966)는 제천군 백운면장(白雲面長)으로 재직하였고, 1928년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39년 4월 만주로 망명하여 제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으로부터 대종교에 관한 해설을 듣고 전교로 승진하였으며, 경의원장(經議院長)이라는 중책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1월 일제의 대종교 말살정책으로 간부 24명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8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이용준(1907~1946)은 신간회(新幹會)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30년 동아일보 봉천(奉天)지국 보급원으로 만주로 건너갔고, 1931년 5월 상해(上海)에 있는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무력적인 항일투쟁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백정기(白貞基)의 권유에 의거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에 입단하여 엄순봉(嚴舜奉)·김성수(金聖秀)와 함께 활동하였다. 1932년 상해사변이 발생하자 일시 피신하였다가 유기석(柳基石)의 권유로 천진 일본총영사관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큰 피해는 입히지 못하고 일부를 파괴하는데 그쳤다. 1933년 3월, 상해에서 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의 암살계획을 수립하였으며, 1935년 3월, 정화암(鄭華岩)과 함께 엄형순·이규창(李圭昌) 등으로 하여금 상해 거류민회 부회장인 친일파 이용로(李容魯)를 총살, 처형하도록 하였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가입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8년 12월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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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태 흉상
이용태(1890~1966)는 제천군 백운면장(白雲面長)으로 재직하였고, 1928년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39년 4월 만주로 망명하여 제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으로부터 대종교에 관한 해설을 듣고 전교로 승진하였으며, 경의원장(經議院長)이라는 중책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1월 일제의 대종교 말살정책으로 간부 24명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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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준 흉상
이용준(1907-1946)은 신간회(新幹會)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30년 동아일보 봉천(奉天)지국 보급원으로 만주로 건너갔고, 1931년 5월 상해(上海)에 있는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무력적인 항일투쟁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백정기(白貞基)의 권유에 의거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에 입단하여 엄순봉(嚴舜奉)·김성수(金聖秀)와 함께 활동하였다. 1932년 상해사변이 발생하자 일시 피신하였다가 유기석(柳基石)의 권유로 천진 일본총영사관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큰 피해는 입히지 못하고 일부를 파괴하는데 그쳤다. 1933년 3월, 상해에서 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의 암살계획을 수립하였으며, 1935년 3월, 정화암(鄭華岩)과 함께 엄형순·이규창(李圭昌) 등으로 하여금 상해 거류민회 부회장인 친일파 이용로(李容魯)를 총살, 처형하도록 하였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가입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8년 12월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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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삼 묘
이맹삼(1867-1919)의 이명은 이희민(李喜敏)이며, 묘비에도 본명인 이맹삼이 아닌 이명 이희민이 적혀있다. 1919년 4월 17일 제천군 제천면(堤川面)에서 이범우(李範雨)·장용근(張用根)·이기하(李起夏)·권종필(權鍾弼)·전필현(全弼鉉)·조명구(趙明九)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제천 남부지역의 책임자로 많은 주민을 이끌고 시위하던 중 일군 수비대의 위협으로 해산하였으나, 오후 6시 쯤 다시 군중을 규합하여 경찰주재소로 향하여 시위행진하다가 일경의 무차별 사격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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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섭 제단비
윤정섭(1845-1913)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 공포되자 유인석(柳麟錫)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충북 제천에서 진용을 재편성하였는데, 이때 윤정섭도 의진편성에 참여하여 참모로 선임되었다. 1896년 2월 충주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떨쳤고“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이란 격문을 관리들에게 보내어 각성을 촉구하였고, 윤정섭은 동생인 윤양섭(尹陽燮)과 함께 충주성에서 힘을 다해 의진을 도왔다. 이후 유인석을 수행하여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심양에서 중국 정부와 군사제휴를 협의하는 등 항전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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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철 공적비
김규철(1881-1929)은 1907년 8월 1일 군대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고, 김규철은 단양을 근거지로 이명상(李明相)과 더불어 의거를 일으켜 중군장(中軍將)이 되었으며, 대체로 단양 청풍(淸風) 충주(忠州)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9월 죽령(竹嶺) 지역에서 4백여 명을 인솔하고 적과 전투를 전개하여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후 1922년 군자금(軍資金)을 모금하여 독립군에게 전하기 위하여 상해(上海)로 가던 도중 인천(仁川)에서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5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한편 이강년의 '창의 일록'을 간행하는 사업에 참여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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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철 묘
김규철(1881-1929)은 1907년 8월 1일 군대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고, 김규철은 단양을 근거지로 이명상(李明相)과 더불어 의거를 일으켜 중군장(中軍將)이 되었으며, 대체로 단양 청풍(淸風) 충주(忠州)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9월 죽령(竹嶺) 지역에서 4백여 명을 인솔하고 적과 전투를 전개하여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후 1922년 군자금(軍資金)을 모금하여 독립군에게 전하기 위하여 상해(上海)로 가던 도중 인천(仁川)에서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한편 이강년의 '창의 일록'을 간행하는 사업에 참여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