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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경 묘
정운경(1861~1939)은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유인석 의진에 참가하였고, 중군장에 임명되어 충주성(忠州城)을 점령하고 전공을 세웠다. 이후 전군장 겸 전군군사사(前軍軍事師)에 임명되어 충주·제천 등지에서 적군과 교전하였으며, 원주 대평교(大平橋)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의진은 일단 해산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단양(丹陽)일대에서 이규석(李圭錫)·김홍경(金鴻卿)·강수명(姜秀明)·지원영(池源永)·김지현(金知鉉)·정해훈(鄭解薰) 등과 더불어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투 태세가 정비되기도 전에 불의의 습격을 받아 장병들이 흩어지고 정운경은 영춘에서 체포되어 유배 15년형에 처해져 황주 철도(黃州 鐵島)로 유배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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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수 집
황학수(1877~1953)의 자는 필옥(弼玉), 호는 몽호(夢乎), 이명은 이국현(李國賢)이다. 1898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參尉)에 임관되었고, 이후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의 교관이 되었다. 1907년 8월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자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였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3·1운동 이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원 및 군무부 비서국장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0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장과 중앙집행위원 및 군사부장(軍事部長)을 역임하면서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 1922년 통군부(統軍府)가 조직되자 군사부장을 역임하였으며, 여러 일이 있은 후, 1923년 통의부로 돌아와 군사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한국노병회, 1927년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하였으며, 1930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도 참여하고, 1932년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참여하였으며 1938년 7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위원, 1939년에 임시의정원 의원에 재선되었다. 그 뒤 충칭[重慶]에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으며 생계부장(生計部長)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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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운, 정호섭, 서상무, 안춘홍, 전재규 창의기념비
백광운, 정호섭, 서상무, 안춘홍, 전재규 창의기념비는 충북 제천에 위치해있으며, 충북 제천 출신의 항일독립운동가인 다섯 명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백광운의 본명은 채찬이며, 1905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둔전제를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3·1운동 후 서로군정서에 가입 후 동지들과 국내에 잠입하여 일본기관 파괴, 경찰주재소 습격 등을 전개하였으며,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에 소속되어 일본총독 사이또를 습격하는 등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정호섭은 1914년 7월 북간도 연길현에 참모부를 설치하고 활동하였고, 무기를 소지하고 함경도에 잠입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서상무는 고종 때에 칙유상관이 되었지만 부관 김연식과 만주에 가서 유인석을 초청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안준홍은 1907년 이강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후에 의병을 양성하는 교관으로 독립운동에 크게 활약하였다. 전재규는 참봉벼슬을 지내다가 1896년 충주, 단양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체포되어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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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원 집
이만원(1867~1944)은 1896년에는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 의진의 독전장(督戰將) 겸 유격장(遊擊將)으로 활약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의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충북 제천(堤川)을 비롯하여 청풍(淸風) 까치성 싸움에 이르기까지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9년 1월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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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원 창의구국기념비
이만원(1867~1944)은 1896년에는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 의진의 독전장(督戰將) 겸 유격장(遊擊將)으로 활약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의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충북 제천(堤川)을 비롯하여 청풍(淸風) 까치성 싸움에 이르기까지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9년 1월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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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재
제천 박약재는 충북 제천에 위치해있으며, 기존 명칭이던 념수재(念修齋)에서 박약재로 명칭이 바뀌었다. 박약재는 진주강씨 문중 강당으로, 조선 중기 처음 세워졌다. 1905년 삼월 을미일에 의암 유인석이 만주로부터 창의열사를 이곳으로 회합하였고, 이때 수많은 열사들이 의병재기를 맹세하고 념수재 현판을 박약재로 고쳐 유인석의 친필로 게시하였는데, 이는 선생의 창의를 전국으로 알리자는 뜻을 지닌다. 1910년 중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의병사 기록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강년 선생의 '운강창의일록'을 이곳에서 강순희, 박정수 등이 1907년에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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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희 묘
강순희(1868~1929)는 1896년 유인석(柳麟錫) 의진에서 활동하였으며, 1905년 9월 정운경(鄭雲慶) 의진에 참가하였는데, 원주진위대의 불의의 습격을 받고 정운경 의병장이 붙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강년이 1907년 7월 「정미7조약」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자, 이강년(李康秊) 의진에서 사서(司書)로 활약하였다. 이 기록들이 이강년 의병장의 창의록인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을 저술 편집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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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우 추모비
이범우(1892~1971)는 제천 장터에서 권종필·이기하(李起夏)를 만나서 구체적인 독립만세 시위운동 거사를 협의하고 있었는데, 전날 제천 공립보통학교 졸업생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다 누설되어 주동자가 검거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분하여, 즉석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뜻을 모았다. 전필현(全弼鉉)이 가세하여 이날 오후 6시쯤 제천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수차례 선창하니 모두 호응하였고, 그러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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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탑
충북 제천 의림지에서 용두산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비룡담 저수지 아래에 위치한 솔밭공원을 만날 수 있다. 솔밭공원의 끝자락에 의병탑, 충혼탑, 충혼의 빛, 반공위령탑, 월남참전기념탑, 대한민국무공수훈자 공적비 등 6개의 기념탑이 나란히 들어서 있다. 제천은 의병의 고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제천의병의 역사적 의미가 크다. 솔밭공원 내 의병탑은 그러한 제천의병의 활동을 알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마련됐다. 제천 솔밭공원은 저마다의 의미를 담은 6개의 탑이 한 데 모여 나라를 지키기 위한 선열들의 정신을 기리면서 시민들에게 편안한 휴식을 주는 곳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현충일 추념식이 거행되고, 수시로 많은 참배객들이 다녀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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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우 묘
이범우(1892~1971)는 제천 장터에서 권종필·이기하(李起夏)를 만나서 구체적인 독립만세 시위운동 거사를 협의하고 있었는데, 전날 제천 공립보통학교 졸업생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다 누설되어 주동자가 검거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분하여, 즉석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뜻을 모았다. 전필현(全弼鉉)이 가세하여 이날 오후 6시쯤 제천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수차례 선창하니 모두 호응하였고, 그러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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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의병장 집결지 (영호정)
영호정은 제천 의병장 집결지였으며, 1807년 이경집이 건립한 후, 6.25 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그의 후손이자 3.1운동 때 제천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범우가 1954년에 중건하였다. 화강암 주춧돌 위에 건축된 목조단층 정자리 건평이 13㎡(4평) 팔작지붕에 정면2칸, 측면 2칸으로 되어있다. 동쪽 우측 칸에 ‘영호정(暎湖亭)’이라 쓴 현판을 걸었으며, 누마루로 오르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4면에는 난간을 만들지 않은 대신 한 자 높이 정도로 머름을 만들었다. 정미의병 당시, 이강년이 제천천남전투에서 승리 후 영호정에서 부하 장수들과 정치를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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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응 창의숭모비
이소응(1852~1930)의 이명은 이선민(李宣愼)이고, 호는 습재(習齎)이다. 이소응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나자, 1896년 춘천에 집결한 유생 유중락, 이만응 등과 농민 1,000여 명에 의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병항쟁을 독려하는 격문을 8도에 보냈고 유인석의 의진으로 입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1930년 3월 순국하였다. 춘천의 의병운동과 의암 의진의 활동 상황을 기록하여 「습재연보」「습재선생문집」 등의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 활용되고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