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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선 사적비
윤응선(1853~1925)은 1895년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湖左義陣)에서 활동하였고, 1905년 박세호(朴世和)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논의하다가 체포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윤응선은 스승인 박세화와 함께 경북 문경(聞慶)의 산중으로 들어가 거의하기로 계획하였으나, 호좌의진이 충주(忠州)에 도착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05년 초에는 충북 청풍(淸風)에서 향약을 조직하고 일진회를 배척하였다. 이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월악산(月岳山) 용하동(用夏洞)에서 의거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병으로 귀가하였고, 결국 제천시(堤川市) 덕산면(德山面) 광천(廣川)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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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익 의열추모비
김영익(1898~1957)의 이명은 김영위(金榮韋), 김삼봉(金三鳳)이다. 김영익은 1919년 3월 28일 음성시장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초천리(草川里) 서당에 다니고 있던 김영익이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정민영(鄭玟永)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면서 추진되었다. 3월 27일 그들은 우선 서당에 함께 다니던 최만득(崔萬得)·정대영(鄭大永) 등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만세운동을 추진할 것을 권유하였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 제작하면서 준비하였다. 3월 28일 오후 4시경 선언서와 태극기를 운집한 군중에게 배포하였고, 김영익이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터에 모인 군중들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가행진을 전개하였다. 이후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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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만세운동 유적비
충북 음성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3월 18일과 3월 28일 그리고 4월 6일 세 번 있었는데, 그중 3월 28일은 김영익의 소식에 의하여 서당생도 정민영, 최만득, 정대영 등이 음성장날에 만세운동을 할 것을 계획하였고, 장날 음성시장에에서 이들은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6일 밤 10시, 수백명의 군중이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를 주도한 주동자들은 왜경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지사들의 공훈을 널리 알리고자, 1987년 8월 15일에 본 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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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7의사총
의병7의사총은 김용이, 김재관, 추성손, 우재봉, 우규하, 박원용, 오원용 등 7명의 의사가 함께 안장된 묘이다.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항일의병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는데, 7의사는 제천 의병진에 참여하여 충주성을 함락시키고, 수안보 전투에서는 정운경의 휘하에서 용감히 싸워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박달재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잡혀 1896년 2월 순국하였는데, 일본군은 처형한 칠의사의 시신을 불태웠으나 동료 의병들이 이를 거두어 남산 후록 갈마골에 합장하여 칠의사총(七義士塚)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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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구 묘
홍사구(1878~1896)의 자는 우용(又容)이며, 홍사구는 1895년 스승인 안승우가 제천(堤川)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그의 종사(從事)로 활약하였으며, 1896년 스승 안승우가 적의 탄환에 맞아 사로잡히자 홍사구만이 남아서 호위하였다. 안승우가 적에게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금수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각이 있다면, 충신·역적과 사람·짐승의 구별은 알 것이다. 우리가 대의(大義)를 의지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인데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며 몸을 돌리면서 감추어 두었던 칼을 빼 적을 내려쳤지만, 홍사구의 목숨을 빼앗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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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욱영 묘
최욱영(1854~1919)의 이명은 최태준(崔泰俊)이며, 1907년 원주(原州)의 의병대장 민긍호(閔肯鎬)로부터 총기를 받아 안강리(安康里)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후 10여 개의 군(郡)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나 횡성(橫城)에서 교전 중 대퇴부 상단에 총상을 입었다. 1907년 8월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입대하여 군사장(軍師將)에 임명되어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1908년 귀향하여 이름을 권태준(權泰俊)이라 변성명하여 은신하였다. 1913년 2월 중순 의병 김재성(金在性)으로부터 고종황제의 밀서를 받아서 군자금 모금을 계획하였고, 1914년 10월부터 안동(安東)·제천(堤川) 등지에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을 받았으며,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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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묘
김상태(1862~1911)는 1896년 이강년(李康秊)이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였고, 유인석(柳麟錫)이 영월(寧越)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 의진에 가담하여 싸웠다. 제천 의병장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가 순절하자, 유인석은 만주로 망명하였고, 김상태는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을 따라가 섬기다가 3년 뒤에 귀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상태는 동지 정운경(鄭雲慶)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7년 이강년의 의진과 합세하였다. 이강년과 김상태의 관계는 남다른 관계였는데,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되자 그의 군사지휘권을 인계 받아 단양(丹陽)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총독부는 그에게 상금 오백금(五百金)을 걸었고, 우중수(禹中守)가 그를 배신하여 고발하였으며, 결국 체포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적의 손에 욕보느니 차라리 자처하겠다" 는 결심을 하고 단식을 하였다가 1911년 9월 21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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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규 묘
이정규(1864~1945)는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유인석(柳麟錫)과 제천, 장담(長潭) 등지에서 거의하여 의진을 편성하였다. 제천의진의 참모장(參謀將)으로 임명되었고, 1896년 1월 충주성을 공격·함락하는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2월 유인석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제천·충주·단양·풍기·평창 등지로 행군하면서 군수품의 보충을 하였고, 북간도 통화현(通化縣)에서 유인석의 의병운동 재거를 보좌하였다. 또한 종의록(從義錄)을 저술하여 초기 의병운동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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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탄압지 제천향교
고려후기에 창건된 제천향교는 1389년(공양왕 1)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백운면 화당리에 창건되었다. 1590년(선조 23)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퇴폐되었으며, 그 뒤 1907년(순종 1) 의병장 이강년이 일본과 교전 중일 때, 일본의 의병말살 작전으로 제천 시내 전역이 붙타버렸으며, 그 당시 제천향교도 불에 타 버렸다. 1909년 대성전이 중건된 것을 시작으로 1922년에 명륜당, 1980년에 동재, 1981년에 서재 등을 중건하였다. 대성전은 제사 공간이며, 명륜당은 학습 공간,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갑오개혁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공자의 제사를 지내며, 초하루·보름에 향을 피운다. 1981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지방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설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운영하고 있다.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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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피체 유적비
이강년(1858~1908)의 자는 낙인(樂仁), 낙인(樂寅), 호는 운강(雲岡), 이명은 이강년(李康年)이다. 이강년은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용양위부사과로서 선전관이 되었지만,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제천으로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같은 해 4월, 관군과 제천에서 싸우다가 패한 유인석이 요동으로 가자, 이강년도 의병을 해산하고 유인석을 따라갔고, 그곳에서 3년 동안 지내고 돌아와 단양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907년 정미칠조약으로 한국 군대가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때마침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부대와 합세해 충주를 공격하였다. 1907년 12월에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양주에 집결해 13도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이에 참석하였다. 1908년 장병들을 독려하여 용소동전투(龍沼洞戰鬪), 갈기동전투(葛其洞戰鬪), 백담사전투(百潭寺戰鬪), 안동서벽전투(安東西壁戰鬪)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8년 6월 4일 청풍(淸風)·작성(鵲城)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결전에서 발목에 총알을 맞고 붙잡혔고,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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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전적추모비
이강년(1858~1908)의 자는 낙인(樂仁), 낙인(樂寅), 호는 운강(雲岡), 이명은 이강년(李康年)이다. 이강년은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용양위부사과로서 선전관이 되었지만,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제천으로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같은 해 4월, 관군과 제천에서 싸우다가 패한 유인석이 요동으로 가자, 이강년도 의병을 해산하고 유인석을 따라갔고, 그곳에서 3년 동안 지내고 돌아와 단양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907년 정미칠조약으로 한국 군대가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때마침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부대와 합세해 충주를 공격하였다. 1907년 12월에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양주에 집결해 13도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이에 참석하였다. 1908년 장병들을 독려하여 용소동전투(龍沼洞戰鬪), 갈기동전투(葛其洞戰鬪), 백담사전투(百潭寺戰鬪), 안동서벽전투(安東西壁戰鬪)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8년 6월 4일 청풍(淸風)·작성(鵲城)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결전에서 발목에 총알을 맞고 붙잡혔고,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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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경 집
정운경(1861~1939)은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유인석 의진에 참가하였고, 중군장에 임명되어 충주성(忠州城)을 점령하고 전공을 세웠다. 이후 전군장 겸 전군군사사(前軍軍事師)에 임명되어 충주·제천 등지에서 적군과 교전하였으며, 원주 대평교(大平橋)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의진은 일단 해산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단양(丹陽)일대에서 이규석(李圭錫)·김홍경(金鴻卿)·강수명(姜秀明)·지원영(池源永)·김지현(金知鉉)·정해훈(鄭解薰) 등과 더불어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투 태세가 정비되기도 전에 불의의 습격을 받아 장병들이 흩어지고 정운경은 영춘에서 체포되어 유배 15년형에 처해져 황주 철도(黃州 鐵島)로 유배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