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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바위 동학기념공원,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문바위 동학기념공원 안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비는 충북 옥천에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을 총지휘한 역사적인 장소인 한곡리를 기념하기 위한 비이다. 문바위 동학기념공원 동학농민혁명 기념비가 세워진 한곡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의 2세 교조 최시형이 대도소(大都所)를 두고, 전국의 동학도를 지휘하던 지역이다. 또한 1894년 9월, 전국 동학군에게 총기포령(총동원령)을 내리는 등, 동학농민혁명을 총지휘한 역사적 장소이다. 1893년 10월 이래로 이곳에서 제자 의암 손병희와 김연국 등 동학도들을 지도하였고, 이곳에는 최시형의 집이 남아 있고, 문바위에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새긴 이름 등이 남아 있다. 기념비는 힘차게 전진하는 옥천군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동학농민혁명 횃불을 형상화하기 위한 모양으로 제작되었고, 개혁 민족운동인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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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기념공원
김규식(1881-1950)의 호는 우사(尤史)이고, 이명은 김중문(金仲文), 왕개석(王介石), 위이민(余一民)이다. 6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선교사 언더우드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으며, 미국에서 공부한 이후,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 YMCA학교 교사, 경신학교(儆新學校) 학감으로 있었고,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191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약소민족대회 및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파리에 조선공보국(朝鮮公報局)을 설치하여 공보국 회보를 발간하고, 이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대표가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한국민족의 주장」 · 「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민족선언서를 작성, 배포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장, 학무총장 등에 선임되었으며, 1935년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그 주석이 되었고,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1945년 8 · 15 이후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의원 부의장, 3월 미소공동위원회 한국 대표를 했고, 1947년 10월 민족자주연맹 의장이 되었다. 1948년 2월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안에 반대하고, 김구와 연합하여 그 해 2월 남북협상을 제안하였으며, 남북협상 5원칙을 제시하고, 4자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북한측의 제2차 남북협상 제의를 거절하고,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하여 그 이전의 5 · 10남한단독총선거에 ‘불반대 · 불참가’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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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응삼 구 묘
조응삼(1875-1956)은 1907년 8월, 정봉준(鄭奉俊) 의진에 입진하였다. 당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에 이어서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서울의 시위대와 강화도의 진위대가 의병으로 전환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의병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보다 대중화되었다. 강원도 원주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의병장 이은찬(李殷瓚)·이구재(李九載)가 5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7월에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가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인영은 승낙한 후 원주에서 관동 창의 대장에 올랐고, 이리하여 원주를 중심으로 하여 13도 연합 의진이 구성되고 있을 때, 조응삼은 1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총기를 가지고 군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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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기미3.1독립만세추념비
음성 기미3.1독립만세추념비는 충북 음성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3년 3월 건립한 비이다. 1919년 4월 2일 오미장터에 모인 1,000여명의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고 관서를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했지만, 진천수비대의 내습으로 이성교, 임백규 등 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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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 기미독립만세기념비
1919년 4월 1일 이곳 대소면 오류리 뒷산에서 이성교, 임백규, 임경순, 김달년, 김동식, 송인식, 박병철, 박제성, 이철우, 유해길, 이용학, 민병철, 박영록 등이 모여 4월 2일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결의하였고, 4월 2일 오미장터에서 천여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앞장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만세운동을 주도한 주요 인물들은 모진 고초와 옥고를 치렀다. 임백규, 김동식, 김달년은 징역 6월형, 송인식, 박병철은 벌금형, 이철우는 징역 3월형, 이용학, 민병철, 박제성, 박영록은 태형을 선고받았다. 기미독립만세기념비는 위와 같은 대소면 오류리 출신 선열들의 독립의지와 민족정기 후세에 널리 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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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헌 묘
안재헌(1900-1977)은 충청북도 음성(陰城) 사람으로, 1919년 4월 1·2일에 걸쳐 양재옥(梁在玉) 등과 함께 안성군 죽산(安城郡竹山) 지방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죽산공립 보통학교 학생으로서 4월 1일 이 학교에서 학생 50여 명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치고, 4월 2일 전교학생들을 동원하여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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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흉상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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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조 묘
김원조(1884~1922)는 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때 이천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 군정부(軍政府)의 연락기관을 서울에 설치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1920년 12월 28일(음)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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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3.1만세사적비
1919년 4월 1일, 한내장터에서 일제의 총칼 앞에 맨주먹으로 항쟁했던 것을 기리는 비다. 한내장터에서는 1919년 당시, 음성 지역에서 가장 치열하게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이 운동을 주동한 김을경, 이중곤, 권재학, 이용호, 추성열, 이교필, 안창렬, 안인흥, 안효양, 이태수, 유치수, 권중전, 박기범(朴箕範), 서홍기, 피춘호, 15명의 우국, 충절열사들의 거룩한 독립정신을 선양하고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2002년 3월에 본 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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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근 신정숙 집
본 사적은 충북 음성에 위치해있으며, 1929년 안창호의 부름을 받고 함께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상해 교민단 서기, 의경대 간사, 한인청년단 이사 겸 서무부장, 김구의 비서로 근무한 장현근, 신정숙 부부가 생전에 살았던 집이다. 장현근(1909~1969)은 1926년 9월에 개성상업학교(開城商業學校)에 재학하던 중 일본인 위주로 하는 것에 저항하다가 퇴학 처분을 당한 뒤, 1927년 토리교회의 주일학교(主日學校) 교사를 하며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931년 11월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상해 교민단의 서기, 의경대(義警隊) 간사, 한인청년당 이사 겸 서무부장 등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1932년 윤봉길의사의 의거 뒤, 상해(上海) 불조계(佛租界)에서 안창호(安昌浩) 김덕근(金德根) 등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7년 이후에는 상해,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민족사상 고취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신정숙(1910~1997)은 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광복군에 입대하여 1941년 3월 1일 임시정부 청사에서 제3분처 징모위원 임명식을 갖고 신정숙은 제3분처위원 겸 회계조장으로 파견되어 활약하였으며, 1942년 10월에는 광복군 제2지대 3구대 3분대에 편성되었다. 그후 제3분처는 본부를 연산현 하구진(鉛山縣河口鎭)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신정숙은 김문호(金文鎬)와 함께 전선과 후방에서 중국 유격대와 합동 공작으로 정보, 선전공작을 활발하게 전개하며 또 포로심문을 통하여 적의 일선 및 후방에 관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여 공작에 활용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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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표 공적비
이헌표(1841-1909)는 1882년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1892년에 접주를 하였으며, 이후 여러 지역의 접주를 하다가 1905년 정월에는 충청도 수접주의 대임을 받았다. 1899년 동학농민혁명이 분기하게 되었고 충청도 전역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이 크게 발호하였는데, 최시형 교주는 이헌표 접주에게 동학혁명군을 구원하도록 명했고, 이헌표 접주는 즉시 창의기병하여 1896년 보은 장내리와 종곡리 등 전투현장에 수백명의 원군을 보냈는데, 동학혁명군은 패전하고 말았다. 그 결과 전지에서 희생된 수많은 의병들의 유족들이 가족의 생환과 보상을 강청하였고, 관아와 조정에서는 온갖 박해를 받았지만, 혁명단심과 포교를 통한 개혁운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자 교세가 날로 확산되어 가고 민심과 천심이 개혁의 편에 서게 되자 이를 질시한 사람들이 이헌표를 질시하였고, 이로 인해 1903년과 1904년에 억울하게 악형과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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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화 배향 사당 (충용사)
박세화(1834~1910)의 자는 연길(年吉), 호는 의당(毅堂)이며,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태백산으로 피하였고, 1893년 조정에 추천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이후에도 개혁정치에 반대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문경 산중으로 들어가 거의할 것을 의논하던 중 문경병참소에 붙잡혔으며, 8개월간 구금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남현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청풍에서 교전 중 붙잡혔고,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단식하여 23일 만에 ‘예의조선(禮義朝鮮)’이란 글을 쓰고 자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