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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 노래비
윤희순(1860~1935)은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이면서 독립운동가로 유제원의 아내이다. 군자금 모금 및 무기와 탄환을 제조‧공급하는 탄약 제조소 운영,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대 조직, 〈안사람 의병가〉 등 8편의 의병가 작사·작곡 및, 4편의 경고문 제작·배포 등 여성들의 의병 활동을 이끌어내는 데 적극 앞장섰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조선독립단에서 활동하였고, 또한 노학당이라는 학교를 세워 항일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윤희순은 장남 유돈상이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한지 11일 만인 1935년 8월 1일(음)에 서거하였으며, 중국 요녕성 해성시 묘관둔 북산에 안장되었다. 사후 59년 만에 손자 유연익에 의해 발굴된 유해는 1994년 10월 17일 고국으로 봉환되었으며, 10월 20일 춘천시 남면 관천리 고흥유씨 선영에 남편 유제원과 합폄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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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4.3독립운동기념비
홍천군 내촌면 동창마을은 본래는 물걸리(物傑里)라고 불렸던 마을로, 교통의 중심지이며 주변의 화촌면·서석면, 인제군의 기린면과 내면의 중심지역이었다. 1919년 4월 3일 동창리에서도 3·1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3월 말부터 천도교인인 김덕원·전성렬을 중심으로 전우균·이문순 등이 내촌면과 화촌면, 서석면, 인제군의 기린면과 내면을 오가며 만세운동을 계획, 추진하였다. 마침내 4월 3일 5개 면민 1,0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외쳤으며, 만세 군중에 대한 일경의 무차별 발포로 인하여 8명이 순국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동창 4·3 독립운동기념비』는 순국한 8명의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9년 4월 3일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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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원 추모비
김덕원(1876~1946)은 강원도 홍천(洪川) 사람으로, 동학에 입도 후 갑오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하여 물걸리 동창을 습격해 동학혁명군의 군자금과 군수품을 확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동학군의 마지막 항전지인 홍천 서석 자작고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3일 내촌면 물걸리(동창마을의 비석거리, 현 팔열각 일대)에서 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내면, 인제군 기린면 등지의 주민 수천 명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던 중 일본 헌병이 시위대열에 무차별 발포하여 현장에서 8명이 순국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게 되자 시위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하고 피신하였다. 일본 헌병들은 물걸리 마을로 덮쳐 그의 본가에 불을 질러 가재를 전소시키고 계속 추적하므로 3년간 피신 생활을 하던 중 일경의 검속에 체포되어 4년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양 눈을 실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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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만세공원(물걸리)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의 ‘기미만세공원(己未萬歲公園)’은 1919년 4월 3일에 물걸리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되었다. 당시 시위에는 1,0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하였고 격렬한 시위로 8명의 주민이 현장에서 일제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기념공원 내에는 이들의 순국을 기리는 팔열각(八烈閣)과 기미만세상, 기미만세운동기념비 등 기념물이 건립되었으며 물걸리 만세운동의 주도자인 김덕원(金德元)이 운영한 마방(馬房)이 있던 터도 홍천군의 독립운동 사적지로 정비되어 있다.팔열각(八烈閣)은 기미만세공원 입구에 위치한 정자이다. 물걸리 3.1운동 당시 현장에서 순국한 팔열사(八烈士)의 충혼(忠魂)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팔열각은 1963년 민관(民官) 합동으로 건립되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퇴락하자 1990년 구성된 기미만세공원 추진위원회에서 공원 조성사업을 하면서 개보수하였다. 팔열각은 팔층으로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여덟 개의 팔각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팔모지붕을 얹은 다음 태극 문양 등의 단청을 입힌 정자(亭子) 형태의 건축물이다. 팔열각의 처마에는 ‘八烈閣’이라 적힌 현판과 정자 내부에는 건립 경위를 새긴 ‘약사(略史)’라는 제호의 목판이 걸려 있다. 정자 중앙에는 전면에 한자로 ‘순국팔열사기념비(殉國八烈士紀念碑)’와 팔열사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 배면(背面)에는 팔열각 건립 당시 제12대 홍천군수였던 이석봉(李碩峰)이 지은 헌사가 새겨져 있다. 팔열각으로부터 공원 제일 안쪽으로 가면 기미만세상(己未萬歲像)이 있다. 기미만세상 앞에 설치된 계단을 올라가면 넓은 부지 중앙에 월대(月臺)를 쌓고, 그 위에는 기미만세상이라 새겨진 기단에 팔열사를 형상화한 여덟 명이 만세를 연호하는 인물상이 장엄하게 세워져 있다. ‘물걸리 기미만세운동 기념비’는 공원 경내에 세워진 비석으로 기미만세상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1998년 건립되었다. 이 기념비의 비문은 한국독립운동사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고(故) 조동걸(趙東杰) 전 국민대학교 교수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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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진 묘
연의진(1902 - 1919)은 강원도 홍천(洪川) 사람으로, 1919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乃村面 物傑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순국 8열사(殉國八烈士)중 한사람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이곳은 면사무소나 헌병파출소도 없는 마을이었으나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연결하는 물화교류(物貨交流)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행정구역에 관계없이 군내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만세운동도 물걸리에서 일어났으며 이곳 주민이 주동하여 부근의 여러 부락주민을 모아서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1919년 4월 3일 이곳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이문순(李文淳)의 선창에 따라 1천여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선도하다 일헌병이 쏜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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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 22인 추모비
한갑복(미상 - 1907)은 원주 감영 진위대 소속 정교로, 1905년 을사조약과 군대 강제 해산 등 일제의 침략 야욕에 맞서 정미의병을 조직하여, 홍천을 비롯한 원주, 횡성, 평창, 영월 등 영서 지역은 물론 강릉까지 진출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07년 양덕원 전투와 대미산성 전투에 참가했던 한갑복 의병장과 마지막 의병 22인은 11월 28일 동면 화방마을 가래골에서 숙영하던 중 왜병의 기습을 받아 접전 끝에 최후를 맞이했다. 한갑복 의병장을 비롯해 당시 함께 전사한 의병 22명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자 추모비를 세웠다. 정부에서는 지난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지만 안타깝게도 후손이 밝혀지지 않아 현재 행정자치부에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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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숙, 민병태의 묘
고종의 인산에 다녀온 유학자 민병숙(1873 - 1919)은 민병태의 아들이자 조카인 민준기와 함께 태극기를 만들면서 만세 운동을 준비했다. 그는 1919년 4월 1일에 전개된 홍천읍 만세 시위에 이어 1919년 4월 2일 면 소재지인 속초리로 집결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틀 동안 계속된 이 만세 시위에는 2일 새벽부터 군중이 모여들었다. 성수리 길목에서 홍천읍으로 통하는 길을 막음으로써 만세 운동의 정보가 밖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였고 덕분에 이 날의 만세 시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800여명의 군중들은 면사무소에 집결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음날 4월 3일에는 동면 성수리에서 홍천읍으로 행진하며 헌병분견소에 검거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때 일본 헌병과 수비대가 출동해서 격투가 벌어졌다. 민병숙은 헌병의 총을 빼앗으려 하다 총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동생의 죽음에 격분하여 덤벼들던 형 민병태도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민병태, 민병숙 두 사람의 묘는 왜의 감시를 피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85년 홍천군청의 지원과 여흥민씨 호참공파 후손들의 노력으로 현 위치인 홍천군 영귀미면 성수리로 이장하였다. 묘 앞에는 1985년에 후손이 세운 『救國의 두 燈불(구국의 두 등불)』 비석이 있다. 또한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1965년 5월 홍천읍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세웠던 높이 1.5m, 폭 50cm의 『殉國三一烈士 閔公 諱 丙台 丙肅 忠魂碑(순국삼일열사 민공 휘 병태 병숙 충혼비)』역시 묘 인근에 있다. 민병태, 민병숙은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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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숙, 민병태 충혼비
고종의 인산에 다녀온 유학자 민병숙(1873 - 1919)은 민병태의 아들이자 조카인 민준기와 함께 태극기를 만들면서 만세운동을 준비해 오던 중 홍천읍의 운동에 이어 1919년 4월 2일 면 소재지인 속초리로 집결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3일까지 이틀 동안 계속된 이 만세 시위에는 2일 새벽부터 군중이 모였고, 성수리 길목에서 홍천읍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 만세운동의 정보가 밖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고 면사무소에 집결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다음날 4월 3일에는 동면 성수리에서 8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헌병 분견소에 검거된 사람을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홍천읍으로 향하며 시위 행진할 무렵 일본 헌병과 수비대가 출동해서 격투가 벌어졌다. 민병숙이 헌병의 총을 빼앗으려 하다 총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동생의 죽음에 격분하여 덤벼들던 형 민병태도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민병태, 민병숙은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殉國三一烈士 閔公 諱 丙台 丙肅 忠魂碑(순국삼일열사 민공 휘 병태 병숙 충혼비)』는 애국지사 민병태, 민병숙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1965년 5월 홍천읍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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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장환 추모비
허장환(1857 - 미상)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고 의병대장 민긍호 선생이 속초리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할 당시 군자금을 대며,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초대 영귀미 면장으로 부임한 허장환은 1917년까지 면장으로 재직했으며, 퇴임 이후에는 가재를 정리해 교육사업과 가난한 백성들을 구하는데 힘썼다. <화동의숙〉이라는 학교를 세워 교육활동에 전념했으며, 동면에 좌운초교가 설립되자 모든 재산을 장학사업에 기증하기도 했다. 허장환의 재직 당시 면 소재지였던 좌운1리 주민들은 그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61년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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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훈 추모비
이광훈(1924 - 1943)은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괘석리 출신으로, 춘천고등학교에서 독서운동을 주도하였다. 1938년 가을에 춘천고등학교의 항일학생결사 상록회가 일경에 발각되어 전 회원이 검거된 후에는 독서회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다 1941년 3월 독서운동에 참여하던 고제훈·원후정·김영근·박영한·권혁민 등이 민족차별에 분개하여 춘천고등학교 교정에서 일인 학생들과 충돌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그는 피체된 뒤 1년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2년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 형을 언도받았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3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89년 11월 16일 두촌초등학교 동창회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토록 하기 위하여 그의 모교인 두촌초등학교 교정에 『광복투사 이광훈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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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사기념비(오의사기념비)
1919년 당시, 홍천에서도 성동리 최승혁, 한용섭과 능평리 김복동이 주동이 되어 4월 1일 자주독립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논의하였다. 도로 부역을 가장한 화동리, 중화계리, 하화계리, 능평리의 농민 2백여 명을 결운리에 집결시킨 후 일제에 항거하는 자주독립운동을 선봉에서 주도했고, 도망친 군수를 잡아 그가 차고 있던 칼을 꺾었으며 김복동은 군수의 왼팔을 꺾고 굴복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모두 일본 헌병에 잡혀 옥고를 치뤘고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순국하였다. 광복의 초석이 되었던 이 다섯 의사의 업적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독립의사기념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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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묘
이춘재(1878 -1929)는 강원도 양양(襄陽) 사람이다. 1919년 4월 5일 양양군 도천면(道川面)에서 이석범(李錫範)·이종황(李鍾黃)·이종인(李鍾寅)·이능렬(李能烈)·김영경(金英經)·장세환(張世煥) 등과 같이 물치(沕淄) 장날에 모인 5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대포리(大浦里)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강현면(降峴面)에서 시위행진해 온 군중과 합세하여 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활동 중에 일경에 붙잡혀 이해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