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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삼일운동8사기념비
1946년 이원면민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미 3.1운동 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러나 당시 기념비를 건립했던 신흥리 12번지가 사유지였던 관계로 부득이 옮겨야 할 처지에 놓이자 이원청년회에서 1979년 개심저수지 뚝방으로 옮겨 재건립하였다.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아, 3월 15일 옥천사람 육창주(陸昌柱)와 허상기 등은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3월 27일 이원 장날을 이용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일본 헌병에게 제지당하면 모두 주재소로 몰려가서 항의하고, 만일 구금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이들을 탈출시키기로 협의한 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은밀히 부락민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7일 오후 1시경 육창주(陸昌柱)·김용이(金龍伊)·허 량(許樑)·이면호(李冕鎬)·허상옥(許相玉)·허 찬(許贊) 등의 동지를 이끌고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허상기·육창주·김용이가 체포되었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주재소로 달려가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며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고, 시위군중 2,3백명이 투석으로 주재소 유리창 등을 파괴하였다. 이에 사태가 심각하게 된 것을 안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시위군중은 일단 해산되었으나, 금산(錦山)에서 온 이경만(李景滿)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오후 3시경 일시 해산된 시위군중들이 주재소 앞에서 다시 모여 유리창을 부수며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구출하고, 몽둥이로 일본 헌병들의 말(馬)을 후려치자, 다시 일본 헌병들이 무차별 발포하여 시위군중 2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때 이원 장터에는 옥천과 대전(大田)에서 일군 수비대원이 증파되었으며, 일본 헌병도 10여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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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봉 집
이금봉(1896 - 1950)은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27일 하오 1시경 육창주(陸昌柱)·허상기(許相基)가 이원(伊院) 장날을 이용하여 300여 명의 군중을 모아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가를 누비고 주동자인 허상기·육창주·김용이(金龍伊) 등이 연행되자 더욱 격렬하게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여 투석과 곤봉으로 주재소를 습격하고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이해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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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중규 집
곽중규의 부친 곽준희, 동생 곽중선 모두 독립유공자이다. 곽중규(1891 - 1950)은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옥천군 이원면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대전형무소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1921년 9월 미국으로 가던 중 중국 상해에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192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비서로 취임하였다가 이어 비서장(秘書長)으로 승진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포 자녀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는데 힘썼다. 그 뒤 1925년 3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나창헌(羅昌憲)·최석순(崔錫淳)·강창제(姜昌濟) 등과 함께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탄핵안(彈劾案)을 제출하고, 임시의정원에 보고하여 면직 처리케 하였다. 1926년 명성(明星)사진관을 개업하여 독립운동의 비밀연락장소로 제공하였고, 1929년엔 상해 프랑스 조계로 이사하여 성광(星光) 사진관을 개업, 독립운동을 위한 연락장소로 활동케 하였다. 이어서 1931년 9월부터 윤봉길(尹奉吉)을 사진관에 은신하게 하였으며, 동생 곽중선(郭重善)으로 하여금 윤봉길에게 상해의 지리와 풍습 등을 알려주고 장차 거사에 대비케 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忠淸道)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2년 4월 윤봉길의 의거 후 중경(重慶)으로 전란(戰亂)을 피하여 이동하였다. 1933년 4월 상해로 돌아와 한족유일독립당촉성회(韓族唯一獨立黨促成會)의 간부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또한 공산당(共産黨)과 제휴하여 강소성(江蘇省) 법남구지부(法南區支部)에 가입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붙잡혀 신의주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같은 해 12월 11일 신의주지방법원(新義州地方法院)에서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5년 5월 가출옥하여 천진(天津)에 있는 동생 곽중혁(郭重赫)의 집에 머물러 있다가 신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1938년 석가장(石家莊)으로 이주하여 계속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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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회 공적비
허상회(1881 - 1968)의 휘는 상회, 자는 완, 호는 상당, 관은 양천이다. 1919년 3월 27일 이원(伊院)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초순이래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아, 3월 15일 형 허상기(許相基)·동생 허상구(許相球), 같은 마을 친구 육창주(陸昌柱)·김용이(金龍伊)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 방법으로 3월 27일의 이원 장날을 이용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때 만일 구금자가 생기면 즉시 이들을 탈출시키기로 협의한 후, 태극기 3개를 만들어 두고 부락민에게 은밀히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3월 27일 오후 1시경, 육창주·김용이·허 량(許樑)·이면호(李冕鎬)·허 찬(許贊) 등의 동지와 함께 수백명의 군중을 인솔하여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그러나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한 일본헌병에 의해 허상기·육창주·김용이가 헌병주재소로 연행되니, 격분한 시위군중은 해산했는데, 그는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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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이 공적비
김용이(1889 - 1958)은 1919년 3월 27일 같은 마을사람 육창주(陸昌柱)·허상기(許相基)·육창문(陸昌文) 등이 이원(伊院)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미리 만든 태극기를 앞세워 들고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던 중 주동자 육창주와 허상기가 헌병주재소로 연행되자, 그는 허 양(許樑)·이면호(李冕鎬)·허상구(許相球) 등과 함께 3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서 주동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할 때 감금되어 있던 육창주와 허상기가 탈출하여 다시 시위대열에 합세함으로써 독립만세운동은 더욱 가열되었다. 이러한 시위행렬에 앞장서서 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며 활동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태극기를 빼앗기고 연행되었다. 다시 백여명의 군중이 주재소로 들이닥치자, 일본 헌병을 발포하였고, 그는 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주재소의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여, 뒤편에 있던 통나무 몽둥이로 주재소의 담장과 장지문을 부수며 계속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헌병으로부터 제지를 당하자 헌병 분대장과 헌병 보조원 등을 구타하는 등 만세시위운동을 계속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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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이 묘
김용이(1889 - 1958)은 1919년 3월 27일 같은 마을사람 육창주(陸昌柱)·허상기(許相基)·육창문(陸昌文) 등이 이원(伊院)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미리 만든 태극기를 앞세워 들고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던 중 주동자 육창주와 허상기가 헌병주재소로 연행되자, 그는 허 양(許樑)·이면호(李冕鎬)·허상구(許相球) 등과 함께 3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서 주동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할 때 감금되어 있던 육창주와 허상기가 탈출하여 다시 시위대열에 합세함으로써 독립만세운동은 더욱 가열되었다. 이러한 시위행렬에 앞장서서 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며 활동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태극기를 빼앗기고 연행되었다. 다시 백여명의 군중이 주재소로 들이닥치자, 일본 헌병을 발포하였고, 그는 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주재소의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여, 뒤편에 있던 통나무 몽둥이로 주재소의 담장과 장지문을 부수며 계속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헌병으로부터 제지를 당하자 헌병 분대장과 헌병 보조원 등을 구타하는 등 만세시위운동을 계속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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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영관 재실 (영모재)
영모재는 천영관의 재실로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에 위치해있다. 천영관의 묘소는 바로 이 재실 뒤에 있다가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천영관(1919 - 1965)는 공주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이던 1936년 3월에 동교생 구자훈(具滋勳)·김해인(金海仁)·최락권(崔洛權) 등과 함께 항일결사 명랑(明朗)클럽을 조직하였다. 이때 그들은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사용금지(日語使用禁止)·신사참배거부(神社參拜拒否)·악질 일인교유 배척 등을 전개하는 한편 무궁화식수장려 및 미신타파 등 계몽활동을 펴면서 민족의식 고양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한 후 1942년 6월 경에 그가 일제의 패망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일경에 붙잡혔고 이로 인하여 클럽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붙잡힌 후 그는 1942년 9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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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영 집
이호영(1899 - 1968)은 충북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천군에서는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을 보고 고향에 내려온 허상기(許相基)가 육창주(陸昌柱)·김용이(金龍伊)와 거사를 결의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3월 27일 장날에 태극기와 선언서를 휴대하고 시장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군중들을 격려하였고, 장터에 모인 수백 명이 일제히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내를 행진하였다. 허상기·육창주·김용이가 헌병주재소에 붙들려가자 군중은 주재소로 몰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헌병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시위에 참여하였다 체포된 이호영은 1919년 5월 5일 소위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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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익 집
공재익(1878 - 1949)는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27일 이원면(伊院面) 장터에서 300여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연행된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헌병들을 곤봉으로 후려 때리고 유치장을 파괴하여, 갇혀 있던 동지들을 구출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체포되어, 이해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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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구 송적비
허상구(1898 - 1958)의 휘는 상구, 자는 천집, 호는 일당, 관은 양천이다. 1919년 3월 1일 국장을 참관하기 위하여 육창문(陸昌文)·육창주(陸昌柱)와 함께 서울에 올라갔던 차에,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원산 기타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고, 또한 최근의 국제정세가 조선의 독립에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듣고, 이 세 사람은 즉석에서 고향인 이원(伊院)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0일 동안 서울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귀가해서는 부친 허 훈(許訓)·형 허상기(許相基)·김용이(金龍伊)와 함께 다시 구체적으로 독립운동 거사를 상의하고 이원 장날인 3월 27일을 독립만세운동의 거사일로 정하였다. 3월 27일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시장으로 가서 「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동서 양쪽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시위군중 300여명을 이끌고 주재소에 쇄도하여 헌병주재소의 담장과 유리창을 부수고 연행자를 탈출시키며 계속 격렬하게 시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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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평계리출신 독립유공자 공적자랑비
수묵.평계리출신 독립유공자 공적자랑비는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평계리에 위치해있다. 기존 허상구 선생의 공적비가 있던 자리인 이곳에 수묵·평계리 출신 3.1운동 독립유공자 9명(김용이, 육창주, 이면호, 허상기, 공재익, 허간, 허상구, 허상회, 허찬)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자랑 비 1기를 신규 설치했다. 수묵·평계리는 이원면에서 가장 많은 3.1운동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지역으로 알려졌다. 이 공적자랑 비는 이원면의 역사성과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세웠다. 또 이원면 수묵리와 영동군 심천면 마곡리 등 곳곳에 흩어져 있던 허상기·허상회·허간·허찬 선생의 공적비 4기를 옮겨 설치했다.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아, 3월 15일 옥천사람 육창주(陸昌柱)와 허상기 등은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3월 27일 이원 장날을 이용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일본 헌병에게 제지당하면 모두 주재소로 몰려가서 항의하고, 만일 구금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이들을 탈출시키기로 협의한 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은밀히 부락민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7일 오후 1시경 육창주(陸昌柱)·김용이(金龍伊)·허 량(許樑)·이면호(李冕鎬)·허상옥(許相玉)·허 찬(許贊) 등의 동지를 이끌고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허상기·육창주·김용이가 체포되었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주재소로 달려가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며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고, 시위군중 2,3백명이 투석으로 주재소 유리창 등을 파괴하였다. 이에 사태가 심각하게 된 것을 안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시위군중은 일단 해산되었으나, 금산(錦山)에서 온 이경만(李景滿)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오후 3시경 일시 해산된 시위군중들이 주재소 앞에서 다시 모여 유리창을 부수며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구출하고, 몽둥이로 일본 헌병들의 말(馬)을 후려치자, 다시 일본 헌병들이 무차별 발포하여 시위군중 2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때 이원 장터에는 옥천과 대전(大田)에서 일군 수비대원이 증파되었으며, 일본 헌병도 10여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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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기 공적비
옥천 이원장터 3.1운동에 주도했던 허상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옥천 이원장터 3.1운동은 장날이었던 1919년 3월 27일 이원면 수묵리 주민 허상구·허상기·허상희·육창주·공재익·조이남·이금봉·이호영·김용이 등 9명이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도화선이 된 운동이며, 600명이 넘는 군중들로 가득 찼으며, 결국 시위자 2명이 순국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허상기(1871-1946)는 1919년 3월 15일 육창주(陸昌柱)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는데, 3월 27일 육창주(陸昌柱)·김용이(金龍伊)·허 량(許樑)·이면호(李冕鎬)·허상옥(許相玉)·허 찬(許贊) 등의 동지를 이끌고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허상기는 일본 헌병에게 육창주·김용이와 함께 체포되었고, 이경만(李景滿)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로 인해 일시 해산된 시위군중들이 주재소 앞에서 다시 모여 유리창을 부수며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구출하자, 다시 일본 헌병들이 무차별 발포하였다. 이후 허상기는 징역 5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