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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산3.1운동만세시위지 안내석
보은군 길상마을 유래비에 삼봉산 3.1운동 만세시위지에 대한 사연이 적혀있다. 이창선(李昌善)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고, 이인하(李寅夏)·김용섭(金用燮)·이준영(李準永)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오후 8시경 김용섭은 마을 가운데에서 풍물을 두드려 소리를 내어 주민을 집합시키고, 이인하·이준영은 마을 가운데에서 주민 수십명을 집합시킨 후 구인리와 길상리 뒷산인 삼봉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창선(1895 - 1961)은 3·1독립운동을 발의하여 이인하(李寅夏)·김용섭(金用燮)·이준영(李準永) 등과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징을 치며 마을주민 수십명을 모아 구인리 및 길상리(吉祥里)의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주동자로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5월 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았고 6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인하(1894 - 1980)은 1919년 4월 11일 이창선(李昌善)을 중심으로 김용섭(金用燮)·이준영(李準永) 등과 같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켰다. 같은 해 5월 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7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용섭(1894 - 1965)은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독립만세를 고창하명서 함께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같은해 5월 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다시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준영(1889 - 1939)은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이인하(李寅夏)·김용섭(金用燮) 등과 같이 마을 주민들을 규합,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7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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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기 의열비
이용기(1880 - 1942)는 충북 보은(報恩) 사람으로 1919년 4월 8일 보은군 내북면(內北面) 산성리(山城里)에서 구열조(具悅祖)·윤정훈(尹鼎勳)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이날 밤 산성리 언덕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독립만세의 취지를 역설하고 20여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4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당하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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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교도와 농민이 합세해 일으킨 사회개혁운동이다. 보은은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1893년 1월 장내리(현 장안면)에 동학교단의 총본부인 대도소를 설치한 곳이다. 같은 해 3월에는 전국의 동학도를 규합한 보은취회가 열렸다. 최대 3만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회에서 그들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즉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다라는 정치적 기치를 올렸다. 동학농민혁명의 불씨였다. 1894년 일본이 경복궁을 기습 점거하자 동학농민군은 전국에서 일어났다. 충청, 경기, 강원, 경상도의 동학농민군이 보은으로 집결했고 곧 전봉준의 호남 농민군과 합세했다. 그러나 이들은 우금치전투에서 밀려나 해산되었고, 전라도를 거쳐 북상하던 혁명군은 보은 북실마을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으로 무참히 학살당한다. 동학농민혁명군 최후의 항전이었다고 한다. 그렇기때문에 보은은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고 종결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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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동학최후7인 학살 매장지
동학군들은 구 속리산석재 뒤 둥글레봉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동학군들이 이곳에 있다는 첩보를 접한 일본군은 장안 구인리에 주둔하며 동학군을 치기 위해 밤 10시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해월 최시형 등 동학군 지도자들은 김소천가와 지막골(금학동)에 막사를 지어놓고 지내고 있었다. 밤 10시 30분이 되자 일본군은 구인리에서 오창→누청→강신→성족→종곡리로 쳐들어갔고 동학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총소리에 놀란 동학군들은 마을 밖으로 달아났지만 일본군을 추격해 요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산으로 올라간 동학군들이 반격하며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동학군은 새벽까지 몇 번을 역습하는 전투를 계속했고 18일 오전에는 종곡부근 고지를 점령하며 일본군에 맞섰다. 일본군에 절대 밀리지 않으며 일본군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러나 동학군이 보유하고 있던 총알이 모두 떨어지고 힘도 부쳤다. 동학군의 제1선이 취약해져 급기야 저지선이 무너졌고, 동학군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총알이 떨어진 동학군들은 몰살되고 말았다. 사망자가 2천 600여명에 달했으며 그 때가 12월 18일 오후 3시였다. 살아남은 동학군들은 퇴로를 찾아 수철령을 넘고 북암리 터골을 거쳐 괴산, 강원도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북암리 부내실로도 10명이 숨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말을 타고 말티재를 넘어 북암리로 뒤쫓아온 일본군은 민가를 샅샅이 수색해 동학도를 색출했다. 여기서 꼬리를 밟힌 7명은 현장에서 죽고 3명은 부내실 주민들이 하인이라고 둘러대는 등 신분을 감춰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7명의 시체는 부내실 주민들이 집단매장을 했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2017년 부내실 주민들의 증언을 채록, 확인한 것이다. 6월 3일에는 집단매장지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넋을 위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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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영 묘
이준영(1889 - 1939)는 충북 보은(報恩) 사람으로 1919년 11일 보은군 탄부면(炭釜面) 구인리(求仁里)와 길상리(吉祥里) 뒷산에서 이창선(李昌善)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이인하(李寅夏)·김용섭(金用燮) 등과 같이 마을 주민들을 규합,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7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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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장내리 동학 취회지
보은 장내리 동학 취회지 안내판은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마을에 위치해있다. 이곳에는 1893년 3월 동학교인들이 전국에서 모여 쌓은 돌성의 자취가 있다. 1893년 3월 11일(음력)부터 4월 2일까지 보국안민과 척왜양의 깃발 아래 최소한 2만 3천 여명의 동학교도인들이 이곳에 모였다. 동학의 세력이 커져가는 만큼 박해도 심해져만 갔다. 조정에서는 동학을 사교로 단정하고 교도들을 역도비적으로 몰아 붙이며 더욱 탄압을 강화했다. 관리들은 이를 빌미로 교인들을 감옥에 가두고 재산을 몰수하고 목숨을 빼앗는등 패악을 일삼았다. 이처럼 교도들의 처지가 참담한 지경에 빠지자 생존을 위해 교조신원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한다. 동학을 합법적으로 인정받고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보장받기 위해서 였다. 1892년 12월 6일 보은장내에 동학 총본부인대도소를 설치하고 조정을 상대로 한 신원운동을 시작한다. 이로부터 장내는 갑오년농민 전쟁이 막을 내릴 때 까지 혁명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광화문앞,복합상소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탄압이 여전하자 청산에 머물고 있던 최시형은 1893년3월10일, 교도들에게 ‘장내로 모두 모이라’는 통문을 띄운다.이로써,동학사의 중요한 사건인 보은 취회가 열린다.3월10일 부터 4월 5일까지 계속된 취회에는 최시형의 통문을 받고 각지에서 모여든 교도들로 장내리는 인산인해를 이뤘고, 그 수가 2만이라고도 하고, 3만에 달했다고도 한다. 이들은 옥녀봉 아래 대도소를 중심으로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 장내를 동학의 구심점이자 성지로 만든다. 하지만 조정에서 파견한 관군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임금에 대한 모반으로 곧 역적 죄였다. 더구나 잘 조련되고 무장된 관군에 비하면 동학도들은 땅을 파던 농민들이 대부분이었고, 죽창과 농기구가 무기의 전부였다. 결과가 분명한 싸움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동학지도부는 해산을 결정했고, 동학교도들부터 해산하기 시작해 4월 2일에는 최시형을 비롯한 지도부들도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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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의거 기념비
3.1독립운동의거 기념비는 충북 영동군 매곡면 매곡초등학교 앞에 위치해있다. 안준, 안광덕 등이 주도하여 전개한 매곡면 3·1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1976년 3월 1일 매곡면민의 정성을 모아 매곡초등학교 교정에 건립한 기념비이다. 이 비는 2006년 3월 1일 학교 앞 공원으로 이전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게 되자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언하고 되었고, 이에 우리 민족은 전국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항거하였다. 안광덕이 서울에서 있었던 독립운동시위에 참가하고 나서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가하여 같은 마을 안준과 시위계획을 짰다. 이에 신상희 장복철 안병문이 합세하고 김용선, 남도학, 임봉춘, 이장노, 김용문, 장출봉 등도 합류하여 태극기 2천여 매를 미리 제작하였다. 4월 3일 이들은 면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옥전, 노천리의 3백 여명과 함께 시가행진을 전개했다. 이들은 매곡면사무소에 몰려가 면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불렀다. 군중의 수가 2천여 명에 이르러 황간으로 나아갈 계획이었으나 날이 저물어 중지하였다. 대신에 추풍령 헌병분견대를 습격코자 했으나 일본군 수비대의 출동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거를 주동한 사람 11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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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거 숭모비
3.1운동의거 숭모비는 충북 영동군 매곡면 매곡초등학교 앞에 위치해있다. 3.1 독립운동의거 기념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이 지역 출신의 3·1독립운동 애국지사 11명의 활동내용과 공적사항, 숭모비 건립배경 등이 기록되어 있다. 안준(1900 - 1969), 안광득(安光得)·임봉춘(林奉春)·장한철(張漢哲)·남도학(南道學)·안병문(安秉文)·신상희(申相熙)·김용선(金容善) 등은 1919년 4월 3일과 4일 양일에 걸쳐서 함께 매곡면(梅谷面)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매곡면에는 안준, 안광득, 안병문, 장복철, 신상희, 김용선, 남도학, 임봉춘, 이장로, 장출봉, 김용문 등의 애국지사가 있으나 장출봉, 이장로, 김용문 등 3명은 당시 기록의 소실과 객관적인 증거자료 미비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이에 숭모회는 지난 2004년 자료를 확보해 제출하여 장출봉 지사는 대통령표창을 받게 됐다. 또한 숭모회는 아직까지 추서받지 못한 애국지사 2명의 훈장추서를 받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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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김평근 현창비
김용호(金溶昊) 선생은 본관이 김녕(金寧) 초휘는 필수(弼壽), 자는 광업(光業), 호는 덕산(德山)이며, 1843년에 지계리(枝界里:현 점말)에서 출생하였다. 절충장군 오위장(折衝將軍 五衛將)을 역임하였다. 한말(韓末)에 을사조약이 맺어지고 고종 황제가 퇴위당하며, 우리 군대마저 해산하게 되자 선생은 퇴령임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고종 황제의 시종원 부경(侍從院 副卿)을 지낸 강두흠(姜斗欽) 등과 함께 항일(抗日) 구국운동에 나섰다. 먼저 강경한 설득으로 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 영동지회는 해산시켰으나, 일본제국의 강압은 날로 심해져 마침내 1910년 8월 29일에는 치욕의 한일 합방이 발표되고 말았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선생은 며칠을 통곡하더니 9월 11일(음 8월 8일)에 동지들과 역말(부용리)에서 국권회복의 밀회를 하던 중 창의(昌義)를 주장하다가 망국의 한을 참지 못하고 머리를 벽에다 박고 졸도 급서하였다. 김평근(1870 - 1924)의 이명은 김현권이며, 1907년 의병장 장운식(張雲植) 의병부대에 합류해 항일투쟁에 참가하였다. 동료 의병들과 함께 옥천군과 금산군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을 전개하였다. 1908년 (음)7월 15일 민한식(閔漢植)·임해준(任海俊)·이향운(李向云)·곽준희(郭俊熙) 등과 공모해 금산군 북면 보강리에 거주하는 권주사와 부북동에 살고 있던 고승필(高承弼)에게 각각 군자금으로 3원씩을 모집하였다. 또한 동년 (음)11월 24일에는 옥천군 이남면 적령리의 김동시(金東始)와 소도리의 김동욱(金東旭)에게서 각각 30원과 10원씩을 군자금으로 징수하였다. 하지만 장운식 의병부대의 활동을 탐지한 영동경찰서 순사들에게 1909년 3월 9일부터 4월 13일까지 포함하여 의병장 장운식과 부대원 민한식·임해준·곽준희·이향운·신돌석(申乭石)·주영식(朱永植)·김성여(金成汝)·강윤필(姜允必)·김화선(金化善) 등이 모두 붙잡혔다. 이 일로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로 송치되었고, 1909년 5월 8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6월 1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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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계2리(지계리) 내력비
각계2리(지계리) 내력비는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 226-3 마을 입구에 위치해있다. 바로 옆에 김용호, 김평근 부자 현창비도 세워져 있다. 마을 내력비문에 애국지사 관련 언급이 있다. '순종3년(1909)에는 이 동리 출신 의병장 김평근의 체포보고서와 경성공소원 판결문에 그 주소가 '영동군 서이면 지계리'라 되어 있으니 현 각계2리가 지계리 였음이 분명하다.' '1913년(국치 3년후)에 일제가 서둘러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그 이듬해부터 시행하며 지계리를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라 고쳤다. 이는 이 동리 출신 애국지사 김용호 부자의 순국과 항일사실을 지우려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따라 동리 이름 마져 없앤것으로 본다.' 라고 적혀있어 김용호, 김평근 부자와 관련된 사적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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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한식 선정비
민한식(1876 - 1915)는 충북 영동(永同) 출신으로 1907년 음력 11월부터 1908년 음력 11월까지 장운식의진(張雲植義陣)에 소속되어 충북 옥천(沃川)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민한식은 1907년 음력 11월 20일 임해준(任海俊)·신돌석(申乭石)·이향운(李香雲)·곽준희(郭俊熙)·김평근(金平根) 등과 함께 옥천군 이내면 기탄리(歧灘里) 이시근(李始根)으로부터 군자금을 수합하였고, 이후 옥천·금산 일대에서 총기를 휴대하고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3월 영동경찰서 순사들에게 체포되어 같은 해 6월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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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3.1독립운동기념탑
양산3.1독립운동기념탑은 충북 영동군 양산면 양산초등학교 내에 위치해있다. 3.1독립운동은 우리 민족 수난기에 빼앗긴 우리나라의 주권을 되 찾기 위한 위대한 민족항일운동이었다. 1919년 3월 20일 양산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청년단이 조직되고 치밀한 계획끝에 거사일은 사람이 많이 모일수 있는 이웃 학산의 장날인 3월 30일로 정하였으며 청년들은 그날까지 태극기를 만들어 면민들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하였다. 이때 이 거사계획을 눈치챈 보통학교 학생 이흥연과 이성주는 성급한 마음에 흑판에다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써서 도로가에 세워놓고 시위를 벌이다 왜경에게 체포되는 일을 당하기도 하였다. 약속된 3월 30일 청년단장 이관연은 단원들과 함께 면민들을 선동 격려하며 학산 장터로 진출하였고 때 맞추어 영동-무주간 도로공사에 동원되었던 부역꾼들이 합세하니 삽시간에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으며 이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의 함성과 함께 돌을 던지며 학산주재소를 습격하였다. 당시에 도적 왜경들도 그 위세에 눌려 태극기를 들고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전해지며 그 와중에 구속되었던 이성주와 이흥연도 구출되었다. 그러나 왜군의 지원병이 동원되자 군중은 흩어지고 청년단장 이관연과 단원 이기주 이현주등은 피신 할수 있었으나 여러 명의 청년단원과 시위군중은 체포되고 말았다. 고향의 어른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이 고장의 청년은 너나없이 만세운동에 동참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들가운데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몇분은 광복과 함께 기록에 의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기도 하였으나 총칼의 억압으로부터 도피하여 고통의 나날을 보냈던 더 많은 사람들은 그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아 후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이에 당시의 거사에 동참했던 모든 분들의 정령을 추모하고 현양하며 매년 3.1절 기념행사를 유족과 함께 제향하자는 뜻도 더불어 이 탑에 함께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