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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재 충의비
김용재(1900 - 1928)은 평북 희천(熙川) 사람이다. 조국의 독립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1920년대 중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서간도 망명 후 1923년 8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에 가입하여 군사교육을 받으면서 독립군의 자질을 배양하던 그는 참의부의 군기 확충과 재정을 위해 국내에 거점을 두고 군자금을 모집 송달하라는 명령을 받고 국내로 파견되었다. 국내로 잠입한 그는 어릴적부터 거주하며 활동하던 소백산중에 거점을 정하고 동지 김찬섭(金燦涉)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였으며, 단양·영월·영주지역은 물론 충청도·강원도·경상도 등을 출입하면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여 일경들의 체포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김현구(金顯九)가 일경에 붙잡혀 악형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거처를 자백함에 따라 그의 근거지는 발각되었다. 이에 따라 1928년 9월경 일경 100여 명이 4부대로 나누어 소백산을 포위하고 그를 체포하기 위한 수색작업을 전개해 옴에 따라 소백산 형제봉 밑에 은신하던 그는 동지 1명과 함께 일경을 상대로 총을 쏘며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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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식, 장익환 기념비
장충식(1836 - 1901)은 1896년 2월 3일 강원도 영월에서 유인석(柳麟錫)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 참가하여 의병 대장소(義兵大將所)를 설치하고 600여명의 유생으로 진용을 갖출 때 사객(司客)으로 임명되었다. 의진에서는 복수보형(復讐保形)의 큰 깃발을 걸어놓고 밀정 4명을 처단하는 등 활약하였다. 한편 의병진에서는 8도에 격문을 발하고 청풍·평창·안양·원주·풍기·영월 등지에서 왜군과 전투하였으며 제천성 공략에서 패전하여 해진될 때까지 활동하다 후일을 기약하고 은신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장익환(1866 - 1937)은 1896년 3월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에 들어가 단양방면의 수비책임자로 임명되어 단양 일대에서 군사를 소모(召募)하고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1905년 원용팔(元容八)이 의병을 일으키자, 포군 조직까지 갖추고 있던 향약 조직을 이용하여 적극 가담하여 좌군장을 맡기도 하였다. 원용팔이 체포된 후, 정운경(鄭雲慶)이 봉기하자 참여하여 반강제로 심상훈을 의진에 끌어들이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907년 7월 이강년(李康秊)이 봉기하였을 때에도 좌종사로서 적극 협조하였으며, 국채 보상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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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유사 간행지 표지석
용담유사는 천도교경전으로 이곳 단양군 샘골(南泉洞)은 천도교 제1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선생이 지은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처음으로 간행한 뜻깊은 곳이다. 제2세 교조 신사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은 수운 선생의 명교에 따라 경전(經典)을 간행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채 18년간을 미루어 오다가 1880년에 인제군 갑둔리에서 동경대전 간행을 마치고 1881년 단양군 장정리에 은신하시던 최시형은 이해 5월 이곳 샘골 여규덕(呂圭德)의 집에 간행소를 설치하여 6월 드디어 수백권의 용담유사를 간행하게 되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해월신사의 거룩한 덕업을 기리기 위하여 해월신사 순도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용담유사를 간행한 이곳에 표지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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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리 마을 자랑비
이강년(1858 - 1908)은 1895년 을미사변이 나자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감찰사 김석중 등 3인을 죽이고 유인석 휘하에 편입 유격장으로 다수 왜병을 도처 습격 도살했고 익년 유인석과 같이 도만 삼년간 있다가 귀국하였다. 1906년에는 왜인들이 고종을 위협해서 양위하라는 소문을 듣고 익년 삼월 영춘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각지로 횡행하면서 왜인을 만나는 곳마다 습격 도살하였고 강원도 의병대장 민긍호와 경기도 의병대장 허위와 상호연락하면서 왜병 대부대와 여러번 싸워 기세를 올렸으나 1908년 2월 가평에서 경성 주둔 왜병에게 체포되어 무한 곤욕에도 굴하지 않고 사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의병전투지 백자리마을 자랑비는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에 위치해있다. 영춘면 일대 의병전투지는 1907년 이강년 의병부대가 영춘면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하였던 곳이다. 그 역사적인 흔적을 백자리 마을 자랑비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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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익환 묘
장익환(1866 - 1937)은 1896년 3월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에 들어가 단양방면의 수비책임자로 임명되어 단양 일대에서 군사를 소모(召募)하고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05년 원용팔(元容八)이 의병을 일으키자, 포군 조직까지 갖추고 있던 향약 조직을 이용하여 적극 가담하여 좌군장을 맡기도 하였다. 원용팔이 체포된 후, 정운경(鄭雲慶)이 봉기하자 참여하여 반강제로 심상훈을 의진에 끌어들이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907년 7월 이강년(李康秊)이 봉기하였을 때에도 좌종사로서 적극 협조하였으며, 국채 보상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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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식 묘
장충식 묘는 충청북도 단양군에 위치해있다. 묘소를 찾아가다보면 효열각에서 두 갈래 갈림길이 나오는데 아랫쪽 갈림길을 직진해서 가면 묘소가 있다. 장충식과 장익환은 부자 관계로 근처에 묘가 위치해있다. 장충식(1836 - 1901)은 1896년 2월 3일 강원도 영월에서 유인석(柳麟錫)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 참가하여 의병 대장소(義兵大將所)를 설치하고 600여 명의 유생으로 진용을 갖출 때 사객(司客)으로 임명되었다. 의진에서는 복수보형(復讐保形)의 큰 깃발을 걸어 놓고 밀정 4명을 처단하는 등 활약하였다. 한편 의병진에서는 8도에 격문을 발하고 청풍·평창·안양·원주·풍기·영월 등지에서 왜군과 전투하였으며 제천성 공략에서 패전하여 해진될 때까지 활동하다 후일을 기약하고 은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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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칠 공적비
이승칠(1850 - 1912)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두경(斗卿). 충청북도 보은 출신으로 경주영장(慶州營將) 이지현(李之鉉)의 아들이다. 원래 공적비의 비명은 의사였지만 지금은 지사로 바뀌었다. 1910년 사헌부(司憲府) 감찰직(監察織)에 재직 중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 순국하려 하였으나 가족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1912년 일본왕이 사망하자 일제는 한국인들도 상복을 착용할 것을 강요함에 이를 거부하고 1912년 6월 26일 망국의 한을 품은 채 "몸이 원수의 복을 입는다면 만대의 수치이다. 이 머리가 떨어지더라도 오랑캐는 될 수 없다(身被讐服萬代羞恥 寧爲殞首 不作夷狄)"라는 유서를 남기고 보은군 내북면(內北面) 봉황대(鳳凰台)에서 투신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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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훈 송적비
윤정훈(1881 - 1921)은 1919년 4월 8일 무명산(無名山)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 주도하였다.그는 1919년 2월 하순, 평소부터 친면이 두터운 손병희(孫秉熙)로부터 거사 밀령을 받고 독립선언문을 입수하여 이용기(李龍基)·최용문(崔容門)·안만순(安萬淳)·이흥하(李興夏) 등을 규합하여 거사를 계획하고,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4월 8일, 보은군내 각 면별로 즉, 내북면(內北面)은 산성리(山城里) 노고성, 외북면(外北面)은 관모봉(冠帽峰)에, 속리산(俗離山)은 문장대(文章臺)에 각각 거사 지정장소를 정하여, 일제히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4월 8일 무명산(일명, 갓빈데산)에서 같은 마을 사람 윤홍훈(尹洪勳)등 많은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해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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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창문 묘
석창문(1886 - 1908)의 이명은 석성국이며,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속리산 중에 의진이 형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생업을 버리고 한봉수(韓鳳洙)의 참모장이 되었다. 출전할 때마다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일병들이 그를 사로잡으려 하였으나 출입할 때마다 병기로 무장하고 있어서 어찌할 수 없었다. 1908년 5월 의병장 한봉수·김규환(金奎煥)과 함께 약 40명을 인솔하고 청주 산외일면 초정동(椒井洞)에서 일인기병 2명이 우편물을 호위하고 오는 것을 확인하고 좌우의 산기슭에 매복하였다가 이들이 오는 것을 기다려 석창문이 선두의 일본병을 저격하여 사살하고 접전 중 나머지 일인이 퇴각하자 우편물과 현금 2,000여 원을 탈취하여 군자금에 썼다. 그해 봄에 석창문이 적정을 탐색하기 위하여 홀로 의진을 떠나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렀을 때 적 수십 명에게 창졸지간에 포위되었다. 대적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틈을 보아 도주하였으나 적의 추격을 받아 주머니칼을 꺼내 들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체포당하였다. 적이 그를 심문하여 의진의 근거지를 알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석창문은 혀를 깨물며 자백하지 않았다. 적이 보은군으로 그를 끌어내려서 살해하였다. 일설에는 스스로 신랑(腎囊)을 끊어 자결하였다고 전하기도 하는데 순국 당시 그의 나이 24세에 불과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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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헌 강도유허비
송은헌(1877 - 1946)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경식(敬植), 호는 강와(剛窩)로 보은 강신에서 태어났으며 보통 송면헌(宋勉憲)이라 불린다. 유인석(柳麟錫) 의진에 군자금을 지원하고, 1919년 항일문구의 제문으로 일제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을미사변의 변보(變報)를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여 복수보형(復讐保形)의 4자를 머리맡에 걸어 두고 그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마침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그 분노는 폭발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의 의병은 유생이 주체가 되었으므로 그 사상적 배경도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이념으로 하고 존왕적(尊王的)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 중에도 유인석 의진은 가장 전투적 성격을 띠고 활발하게 의병항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유인석 의진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지원하기로 하고, 유인석 의병진에 3백 냥의 군자금을 제공한 이후 수십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그 후 1910년 주권이 상실되자 유인석 의병장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려 하였지만, 스승 어윤적이 때가 좋지 않다고 극구 만류함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유인석 의병장을 기리는 항일문구의 제문으로 일제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지만, "오늘날 옥중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홀로 작은 충성을 바치며 웁니다"라는 옥중시를 짓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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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석, 어경선 추모비
어윤석(1846 - 1898)은 아들 어경선(魚敬善)과 함께 1896년에 유인석(柳麟錫)이 이끈 제천의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화서학파의 학문적 특징인 춘추대의적 존화양이 사상에 철저히 경도되어 있었던 인물이다. 그리하여 의병활동 중에 남긴 글에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성재 유중교 세 분 선생님의 문하들이 일생을 통해 강설(講說)한 것은 서학을 배척하고 왜적에 대해 복수하는 것 뿐이다. (중략) 나라를 사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의거에 누가 창의(倡義)하지 않으며, 원수를 갚고 형세를 보존하는 일에 누가 거사하지 않겠는가. 오늘의 일을 차마 어찌 말로 다하랴. 일을 하는데 우리는 죽지 않으면 그만이고, 죽는다 해도 대의를 펴서 천하를 구하기 위해 죽으니 죽을 명분을 찾은 것이다”라고 하여 강렬한 항일투쟁 의지를 드러내었다. 그 후 유인석이 휘하 의병을 이끌고 황해도·평안도 등 양서지방을 거쳐 재기를 위해 서간도로 망명할 때 아들 어경선과 함께 동행하여 갖은 고초를 겪었다. 서간도에서 돌아온 직후인 1898년에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어경선(1869 0 1816)은 1896년 아버지와 함께 유인석(柳麟錫)의 제천의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하지만 의진 내의 직책이나 구체적 활동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후 유인석 의병이 황해도·평안도 등 양서지방을 거쳐 재기를 위해 잔여세력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할 때 부친과 함께 동행하였으며, 1898년에 유인석이 다시 서간도로 망명할 때에도 또한 함께 망명하여 갖은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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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경선 묘
어경선(1869 0 1816)은 1896년 아버지와 함께 유인석(柳麟錫)의 제천의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하지만 의진 내의 직책이나 구체적 활동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후 유인석 의병이 황해도·평안도 등 양서지방을 거쳐 재기를 위해 잔여세력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할 때 부친과 함께 동행하였으며, 1898년에 유인석이 다시 서간도로 망명할 때에도 또한 함께 망명하여 갖은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