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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독립운동 공적비
김용응과 김태규는 부자지간으로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 공적비를 세웠다. 김용응(1869 - 1959)은 병농이라는 이름으로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아들인 김태규(1896 - 1962)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어 1919년 3.1운동 때부터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파리 강화회의에 송부할 의견서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중국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와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보냈다. 1919년 5월에는 연병호, 안재홍 선생 등과 활약하였으며 외교시보를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국민들에게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와의 관계로 선생의 활동이 발각되어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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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만세운동유적비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에서 전개된 3·1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괴산군이 세운 기념비이다. 1985년 9월에 건립하였으며, 2002년 11월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소수면의 독립만세운동은 몽촌리의 유해륜(柳海崙)과 경권중(慶權重), 송능식(宋能植) 등이 주도하였다. 항일 의식이 투철하던 유해륜과 경권중은 같은 군의 괴산면·장연면·청천면 등지에서 전개된 3·1운동에 고무되어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2일 새벽 2시경, 송능식이 앞장선 5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현리의 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위하여 몰려갔으나, 사전에 탐지한 일제 경찰의 무력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날 밤 8시 경에 200여 명의 시위대가 길선리(吉善里)에 사는 면장 김승환(金昇煥)의 집을 습격하여 면장을 선두에 세우고 경찰주재소로 몰려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유해륜(1883 - 1956)은 괴산군 소수면 몽촌리(沼壽面 夢村里)에 거주하였으며 이곳 유지로서 경권중(慶權重)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2일 면민 200여 명을 규합하여 소수면 길선리(吉善里)에 사는 김승환(金昇煥) 면장의 집과 소수면 주재소로 집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시위군중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5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었으며, 6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경권중(1871 - 1920)은 1919년 4월 2일 유해륜(柳海崙)과 함께 소수면(沼壽面) 길선리(吉善里)에 사는 면장 김승환(金昇煥)의 집과 경찰주재소를 찾아가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러 함께 독립운동하자고 말하고, 다시 동리민 200여명을 이끌고 면장집과 주재소에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하였다. 또한 새벽 2시경 면사무소 습격계획이 일제의 제지로 실패하자, 약 300여명의 시위군중들과 함께 밤 8시경 면장집을 습격하여, 면장을 선두에 세우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그해 5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되었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귀가 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송능식(1898 - 1963)은 1919년 4월 2일 괴산군 소수면(沼壽面)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한 유해륜(柳海崙)·경권중(慶權重) 유지 등이 괴산군내의 괴산면·장연면(長延面)·청천면(靑川面) 등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고무되어 추진되었다.4월 2일 새벽 2시 경, 괴산군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는 송능식의 주도로 시위군중 500여 명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옥현리(沃峴里)의 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위해 몰려갔다. 그런데 사전에 이러한 정보가 새어나가 일경의 무력적 저지로 일단 중지되었다. 이날 밤 8시 경, 시위군중 300여 명은 다시 집결하여 면장집을 습격하고 각 동리를 돌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경은 그날 밤부터 대대적인 검속을 실시하여 주도자들을 체포하였다. 송능식은 이 일로 붙잡혀, 이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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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권중 공적비
경권중(1871 - 1920)은 1919년 4월 2일 유해륜(柳海崙)과 함께 소수면(沼壽面) 길선리(吉善里)에 사는 면장 김승환(金昇煥)의 집과 경찰주재소를 찾아가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러 함께 독립운동하자고 말하고, 다시 동리민 200여명을 이끌고 면장집과 주재소에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하였다. 또한 새벽 2시경 면사무소 습격계획이 일제의 제지로 실패하자, 약 300여명의 시위군중들과 함께 밤 8시 경 면장집을 습격하여, 면장을 선두에 세우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그해 5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되었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귀가 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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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영 의적비
박문영(1871 - 1943)은 경남 양산(梁山) 사람이다.1919년 3월 8일 대구(大邱)에서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이 주동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800여명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쓴 대형 깃발을 높이 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7월 24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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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석조 묘
경석조(1881 - 1957)은 충북 괴산 연풍(延豊) 사람이다. 1914년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하다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 1919년에는 대동단(大同團) 충북 지단에서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길림성(吉林省) 북간도(北間島) 용정촌(龍井村)에서 고사연구회(古事硏究會)를 조직하고 절대독립(絶對獨立)을 외치며 항일활동에 주력하였다. 1929년에는 한족연합회를 결성하여 중앙 총무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기밀부장에 피선되었다. 1944년에는 중국국민당에 입당하여 재만동포의 생명과 재산보호에 힘을 다하였다. 광복 후 1949년 2월에는 반민특위(反民特委) 충북책임자로 피선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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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석조 공적비
경석조(1881 - 1957)은 충북 괴산 연풍(延豊) 사람이다. 1914년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하다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 1919년에는 대동단(大同團) 충북 지단에서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길림성(吉林省) 북간도(北間島) 용정촌(龍井村)에서 고사연구회(古事硏究會)를 조직하고 절대독립(絶對獨立)을 외치며 항일활동에 주력하였다. 1929년에는 한족연합회를 결성하여 중앙 총무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기밀부장에 피선되었다. 1944년에는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여 재만동포의 생명과 재산보호에 힘을 다하였다. 광복 후 1949년 2월에는 반민특위(反民特委) 충북책임자로 피선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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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3.1운동 7인열사비
괴산3.1운동7인열사의 비는 충북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 신촌마을입구에 위치해있다. 일제에 항거하기 위하여 1919년 4월 만세운동을 일으킨 이 고장 출신 김의현·김의대·박영래·정해문·양신집·지민수·김일곤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비이다. 김의현(1880 - 1947)은 당시 장연면의 서당 교사로, 1919년 3월 3일 광무황제의 인산일에 참례하기 위하여 제자인 박영래와 함께 상경하여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시위를 목격하였다. 귀향 후 김의대(1892 - 1925), 김일곤(1880 - 1946), 정해문(1882 - 1947), 지민수, 양신집(1882 - 1948)과 함께 거사를 협의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수백 장을 몰래 준비하였다. 거사일자를 4월 1일로 결정하고 각 동리의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박영래로 하여금 준비된 태극기와 선언문을 각 동리에 전달하게 하였다. 4월 1일 오가리 소재 면사무소 앞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시위군중들과 함께 면사무소를 파괴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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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강면 기적비
신강면(1896 - 1951)은 충청북도 괴산(槐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30일 김수백(金壽伯)·이태갑(李泰甲)·장성원(張聖源)과 함께 청안면(淸安面) 읍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장터에 모인 시위군중 3천여명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주동자들이 청안 경찰주재소로 연행되자, 그는 선두에 서서 격분한 시위군중을 이끌고 주재소로 달려가 투석으로 대항하며 연금자 석방운동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군중들은 해산되었으며, 그는 주모자로 체포되어 그해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곳의 시위는 일경의 발포 이후에도 김수백·장성원·함재원(咸在源)이 주동이 되어 군중 200여명과 함께 부근의 우편소를 습격하였으며, 특히 청안면 독립만세운동은 3천명 이상 참가하였고, 사망자 6명, 부상자 2명을 발생케 하는 등 매우 격렬한 시위운동이었다. 충주에서 급파된 일본 경찰의 무력적 탄압으로 이곳의 시위는 겨우 중단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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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 만세운동유적비
청안 만세운동유적비는 충북 괴산군 청안면 청안면사무소앞에 위치해있다. 청안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주민들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유적비.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가던 중인 3월 중순부터 청안에서도 만세시위가 계획되고 있었다. 청안의 이태갑, 김수백, 신강면 등은 3월 30일 오후 3시 반경, 청안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 모인 2,000여 군중을 선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군중들은 우편소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경찰은 주도자를 체포하여 청안경찰서 주재소로 연행하자 격부한 시위군중들은 주재소로 몰려가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일제 경찰은 충주에서 급파된 수비대와 함께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90년 1월 1일 괴산군에서는 3·1독립운동을 일으킨 청안 면민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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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주재소터
청안주재소는 1919년 3월 30일 청안장터 만세시위 중 주도자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장터에 있던 군중이 몰려가 시위한 곳이다. 청안면에 살고 있던 이태갑·김수백·신강면·장성원·함재원·박내명 등은 3월 30일 청안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당일 오후 3시 반경, 청안 시장에 모인 약 3,000여 명의 군중들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하였고, 군중들은 이에 호응하여 시위에 동참하였다. 그러자 경찰이 출동하여 주도자들을 청안 경찰관 주재소로 연행해 갔다. 이에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로 달려가 체포된 애국지사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시위군중은 주재소 뒷문 근처의 우물에 쌓아 놓은 돌을 떼어 내어 던지고, 몇몇 사람들은 주재소 안으로 진입하여 항의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제 경찰은 충주에서 급파된 수비대와 함께 야만스런 무차별 발포를 감행하였다. 결국 일제의 발포로 홍봉운·노도원·이찬의·연병봉·우현우·연병룡 등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날 시위로 김수백·장성원·함재원은 각각 징역 3년, 이태갑·박순옥·신강면은 각각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이들의 공을 기려 장성원·이태갑·신강면·함재원·김수백에게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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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원 묘
장성원(1897 - 1956)은 충청북도 괴산(槐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30일 김수백(金壽伯)·이태갑(李泰甲)·박내명(朴來明)·신강면(辛康勉)·함재원(咸在源)과 함께 청안면(淸安面) 읍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오후 2시경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시위를 진행하며,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였고 우편소를 순식간에 파괴하였다. 이때 그는 김수백·함재원과 함께 군중 약 200명과 함께 다시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우편소를 습격하고, 군중을 지휘하여 우물에 쌓아 올린 돌을 군중에게 건네주어 투석케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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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기 공적비
정운기(1875 - 1943)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을 도모하던 중 1913년에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璋烈)·한 훈(韓焄)·강순필(姜順必)·정진화(鄭鎭華) 등과 함께 풍기(豊基)에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을 결성하였다. 풍기광복단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에 실천방략을 두고 독립운동을 폈다. 그리하여 1914년에 박창빈(朴昌彬)으로부터 권총 10정을 제공받아 박영효(朴泳孝) 등을 암살하려던 김재성(金在性)에게 교부했었는데, 사전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징역 5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15년에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박상진(朴尙鎭) 등과 통합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게 되자, 이에 참여·활동했다. 국내민족운동이 전반적으로 봉쇄되던 무렵인 1910년대 국내의 독립군 단체로 결성된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滿洲)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한다는 구도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선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해 갔는데, 이때 정운기는 자산가 명단을 작성하는 외에 군자금 모집에 필요한 경고문을 발송하면서 군자금 수합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1918년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이에 연루되어 붙잡혔으나 1919년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면소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