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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중 묘
윤형중(1895 - 1935)는 충청남도 홍성(洪城) 사람이다. 1919년 윤기순(尹己順)과 함께 고향인 장곡면(長谷面) 화계리(花溪里)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이날 500여명의 독립만세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도산리(道山里)에 있는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0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8월형에 벌금 20원(圓)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또한 1923년 1월에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운동에 동생 윤익중을 통하여 재정지원을 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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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욱 묘
1919년 4월 1일 밤 충남 홍성(洪城)에서는 금마면(金馬面) 가산리(佳山里)에 설치된 임시 연극장에서 관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영갑(閔泳甲) 등은 가산리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을 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였고, 이날 관람객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하여 동의를 구한 뒤, 20∼30명의 관객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만세운동이 일경에 의해 해산당하자, 이들은 이튿날 홍성 장터로 나가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윤용욱(1891 - 1966)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월 19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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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균 구 묘
신보균(1862 - 1912)는 충남 홍주(洪州) 사람이다. 1906년 5월 민종식(閔宗植) 의병장이 홍산(鴻山)에서 창의하고, 서천(舒川)·보령(保寧) 등지를 거쳐 홍주(洪州)에 입성하자 신현두(申鉉斗)·김상덕(金商悳)과 함께 합세하고 유병소 서기에 임명되었다. 1906년 5월 20일에서 5월 31일 사이에 의병진에서 빼앗았던 홍주성(洪州城)을 함락당하자 일본군은 역습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져 여기에서 김상덕(金商悳)을 비롯하여 80여명의 장병이 순국하고, 윤석봉(尹錫鳳)·이상두(李相斗) 등 80여명이 일본군에게 붙잡혔으며, 그중 남규진(南圭振)·문석환(文奭煥) 등 9명과 함께 일본의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어 억류생활을 하였다. 이때 억류중에도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과 10명의 의사(義士)간에 우국충절에 관한 시를 많이 지었다. 1906년 12월 17일 최익현(崔益鉉)이 유배지인 대마도(對馬島)에서 순절하자 유배중이던 신보균을 포함한 10명의 의사 임병찬(林炳瓚)·남규진(南奎振) 등 모두가 흰 두건을 쓰고 장례집사가 되어 존제(尊祭)를 지내고 반구(返驅)를 따라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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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도 묘
이희도(1885 - 1919)는 충청남도 홍성(洪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홍성군(洪城郡) 내의 횃불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밤 홍성면을 비롯하여 홍북면(洪北面)·금마면(金馬面)·홍동면(洪東面)·구항면(龜項面)의 24개 부락에서 일제히 횃불을 올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그 시위가 계속되니 그 기세에 놀란 일본 군대가 동서로 포위하여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그는 이때 적의 흉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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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면 삼일각
홍동면민들이 주도한 만세운동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병익(구정리)과 이창우(팔괘리) 등이 발기해 홍동노인회와 기념비 건립을 제안하여 1973년 3월 기미독립운동기념비를 세우고, 1978년에는 홍성군의 지원으로 비각(정측면 각1칸의 팔작지붕)을 세우고 삼일각(三一閣) 현판식을 거행했다. 홍동지역에서의 3·1만세운동은 4월 4일, 5일, 8일의 3일 동안 네곳에서 전개됐고 4일에 전개된 3·1만세운동은 주민들이 횃불을 들고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는 형태였으나 정확한 참석인원은 확인되지 않는다. 5일의 만세운동은 신기리 만경산에서 전개됐는데, 홍동면민 대부분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위 군중에는 김좌진의 제종제인 김종진(金宗鎭)이 합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만세시위의 영향으로 홍성군의 동북부 4개면(홍북·금마·홍동·구항면)의 24개 촌락에서 횃불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놀란 일제의 수비대가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10여 명이 순국했고, 다수가 부상 또는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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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성 묘
황윤성(1879 - 1919)는 충청남도 홍성(洪城) 사람이다. 홍성군 홍동면(洪東面)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거사하기 위하여 인근 각 부락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1919년 4월 8일 야간을 이용하여 일제히 독립만세 소리를 높이 외치며 시위하도록 하고 이 기세를 이용하여 주재소를 습격하여 강제 연행되어 있던 동지들을 탈출시키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일인 4월 8일 밤에 세천 부락은 청광산에서, 주원 부락은 석삼봉에서, 월현 부락은 수현봉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봉화를 올리며 시위하다 주재소를 습격하여 연행자를 석방시켰다. 그리고 『왜놈들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연창하면서 시위하다 귀가하였으나 이튿날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태형을 받았다. 그후 심한 고문의 여독으로 신음하다가 그해 5월 6일 4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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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기념비 감장 비
1919년 기미년 3·1독립운동에 참여한 김용철이라는 인물에게 감사의 뜻으로 세운 기념비다. 김용철은 공훈록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이다. 비석 앞면에는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 김용철(金溶哲)-기미년 3월 1일 조국광복의 전위로써 신명을 도(賭)ᄒᆞ야 왜적에 항쟁하신 의열에 깁히 감사이 뜻을 표하옵고 자(慈)에 기념배를 진정함. 대한민국 28년 3월 1일 홍성군 3·1독립운동기념대회 군민일동’ 라고 세겨져 있으며, 비석을 세웠던 대한민국 28년은 서기 1946년이다. 그러나 비석의 뒤에는 ‘子 世權’으로 새겨져 있어 건립자가 김용철의 아들 김세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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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항일독립운동여성상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 전날 한복을 입은 100년 전 여성이 등불을 비춰주고 교복을 입은 현재의 여성이 판화로 독립선언서를 찍어내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100년 전 힘껏 외쳤던 숭고한 독립의 뜻을 미래 청년에게 전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배경으로 설치한 화강석 기둥에는 항일여자독립선언문 전문과 공식 서훈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 472명의 이름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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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역사인물 부조탑
김좌진(1889 - 1930)은 1908년 박상진과 광복단사건으로 3년을 복역 후 간도로 건너갔다. 후에 3.1운동 당시 동만주의 왕청현에서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으로 활동하였으며 사관연성부를설치하여 독립군 간부양성에 전력하였고, 1920년 9월 동지 나중소, 이범석등과 더불어 청산리 작전에 참가 10배의 왜적을 대파하여 사상 3천3백여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1926년 김혁 등과 더불어 신민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27년 중국 구국군 사령관 양우일과 회담하고 공동전선을 취하였다. 1929년 정신, 민무등과 중동선 일대에서 한족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으로 활동중 동년 음12월25일 고려공산청년회원 주중한인청년동맹원 박상업(일명 김신준)의 권총 저격 피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한용운(1879 - 1944)은 기미독립운동 때 불교계대표로 33인 중 1인이다. 3년 징역을 받았고 출옥 후에도 문학운동과 불교혁신운동에 진력하며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또한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 투쟁사상 고취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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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기념탑
홍주의병이란 홍주군(현, 충남 홍성군)을 비롯한 홍주문화권 내에서의 의병항쟁을 말하는 것으로, 1895년과 1906년 말 충청남도 홍성 일대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항일 투쟁이다. 안창식(安昌植)과 채광묵(蔡光黙) 등 홍주의 유생들은 1895년 12월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청양의 화성에서 향회를 실시한 뒤 민병을 모아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들은 12월 3일(음력) 홍주 관아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金福漢: 1860~1924)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 만에 관찰사 이승우(李勝宇)가 배반하고 의병 지휘부를 체포하였다. 체포를 면한 유생들은 이후 의병의 재기를 시도하였다. 1906년 안병찬(安炳瓚)·채광묵 등은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듣고 의병을 재기하였다. 이들은 정산에 거주하고 있는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 1861~1917)을 총수로 추대하고 1906년 3월 15일(음력 2월 21일) 예산의 광시에서 봉기하여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홍주성에서 일본군이 패퇴하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일본군 보병 제60연대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좌 지휘하의 보병과 기병대를 파견하여 의병 참모장 채광묵 부자 등 300여명을 학살하였다. 의병장 민종식은 간신히 예산 대술에 있는 이남규(李南珪)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민종식 등은 그 해 10월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이용규 등 주도자들이 체포되었다. 민종식은 미리 피신해 체포를 면했으나 11월 20일 공주 탑산리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에도 홍성 일대 유림들의 재기 움직임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이들에 대한 감시와 학대를 강화하였다. 1907년 9월에는 이남규 부자를 체포해 가던 중 귀순을 강요하다 거부 당하니 온양 평촌에서 이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1월에는 김복한이 거병을 밀의하였다고 하여 악형을 가하였다. 김복한·안병찬 등은 1919년 유림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한 문서인 파리장서에 서명하는 등 이후에도 운동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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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
홍주의사총은 홍성지역에서 있었던 의병활동 중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수백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소다.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났는데, 홍성 지역에서는 민종식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이 전개됐다. 민종식은 1906년 고종의 명을 받아 의병을 이끌고 남포와 보령의 일본군을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였으며, 5월 19일 마침내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포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5월 31일 폭격으로 조양문이 무너지고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민간인과 의병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많은 의병들의 시체가 홍성천과 남산 부근에 방치되었다. 이에 광복 이후 의병들의 유해를 남산에 안치하고 ‘병오항일기념비’를 세우며 추모제를 지냈다. 그런데 1949년 현재의 홍주의사총이 있는 구릉에서 또 다른 유골들을 발견하면서, 이 유골들이 옛 홍주의병의 유해임을 확인하고 현 위치에 새로이 의사총을 조성하였다. 사당인 창의사에 900의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구백의총이라 했던 것을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홍주의사총은 을미의병으로부터 면면히 계승되어 온 한말 홍주의병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중요한 유적으로, 매년 5월 30일 순국의사 추모제를 올리고 있으며 2001년 8월 17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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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의비
1894년 조선후기 정치 경제 사회의 갖가지 모순 속에서 심한 흉년과 가난으로 고통 받던 농민들이 탐관오리 숙청과 외세 배격을 요구하는 동학교도들과 뜻을 같이하여 봉기한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으로 퍼지던 때, 홍주지역에서도 수많은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내포 동학군은 홍주목의 중심인 홍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홍주성 인근에 속속 모여 들었다. 당시 홍주성을 지키고 있던 전력은 최정예 일본군 40명과 관군 400명, 그리고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붓을 던지고 칼을 들어 목숨을 버린다는 유교정신이 몸에 배어있는 홍주유생 천여 명이 고작이었다. 이 때 동학군은 홍주성 전체를 포위하고 있었고 홍주향교를 지휘본부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당시 향교에는 전란에도 불구하고 향교를 지키려는 7명의 유생들이 있었는데, 오경근 최민지 방세응 방석규 이준복 서종득 최학신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특히 많은 유교서적이 있는 서재를 지키려 하였고, 탐관오리와 양반들에게 시달림을 받은 동학군들이 유생인 그들을 살려둘 리가 없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 이들은 결국 맨몸으로 항거하다 죽음을 맞았고, 문묘와 서적도 소실되었으나 다행히 향교 건물은 지켜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