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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식 묘
안창식(1886-미상)은 안병찬, 안병림의 아버지이다. 안창식은 홍주의진의 선구자들인 박창로(朴昌魯)·이봉학(李鳳學)·이세영(李世永)·정제기(鄭濟驥)·송병직(宋秉稷)·조병고(趙秉皐)·김정하(金正河) 등과 더불어 가만히 서로 왕래하면서 긴밀한 연락을 하고 있었는데, 아들 안병찬(安炳燦)이 김복한(金福漢)·이설과 함께 구체적으로 거사 계획을 세우고 1895년 12월 1일 홍주성으로 입성할 계획을 세우고 찾아왔다. 그때 안창식은 채광묵(蔡光默)과 180명의 민병을 모집해 놓고 있었고, 그 군사를 안병찬에게 주었다. 이승우의 배반으로 의진의 수뇌부가 모두 체포되었고, 아들 안병찬도 체포되었다. 다시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이승우를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압송되었으나 안창식은 연로하여 일찍이 고향으로 돌려보내어졌으며, 아들 안병찬은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지(特旨)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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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준 묘
최장준(1890-1968)은 충남 청양군(靑陽郡) 화성면(化城面) 농암리(農岩里)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충청도에서 방방곡곡에서 시위운동이 연일 일어나 극성했을 때는 1919년 3월 27일부터 4월 6일경의 기간으로 이 동안은 경기도에 이어 전국에서 가장 치열한 양상을 보이었고, 4월 6일 후로 15일까지는 황해도에 이어 충청남도가 경상남도와 같이 많은 운동을 전개하였다. 화성면에서는 1919년 4월 5일 면소재지인 산정리(山亭里)에서 약 30명의 주민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또한 농암리(農岩里)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는 강학명(姜學男)이 4월 8일 구장 이병규(李炳圭)에게, 화성면의 농암리와 산정리에서는 열렬하게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왜 자기 마을에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느냐고 질타한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시위 후 체포된 최장준은 4월 22일 청양헌병분견소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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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호 기적비
임경호(1888-1945)는 임한주(林翰周)의 조카이며 한말 의병장 김복한(金福漢)의 문인이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목적으로 일제의 죄상을 폭로하고 조국독립의 열망을 담은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자. 임경호는 독립청원서의 발송책임을 맡아 황일성(黃佾性)·이영규(李永珪)·전용학(田溶學) 등과 함께 발송을 준비하였다. 영남지방의 유림들도 독립청원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는 유진태(兪鎭泰)의 소개로 김창숙과 만나 영남측의 준비에 합류하였다. 이후 1923년 1월에 결성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의 선전부에 소속되어 활동을 주도하였고, 같은해 7월 기관지 발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산업계(産業界)≫를 발간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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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주 기적비
임승주(1867-1939)는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를 계기로 홍주의병(洪州義兵)을 일으켰고 수백 명씩 홍주성으로 집결시켜 연합의병을 지휘,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승우(李勝宇)의 변심으로 12월 4일 김복한·이설·홍건·안병찬 등과 함께 붙잡혀 구금되었으나 고종(高宗)의 특지(特旨)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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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헌 묘
이종헌(1890-1957)은 1919년 3월에 대한독립단 안면면(安眠面)결사대를 조직하고, 같은 해 9월에 지단장에 선임되었다. 광영학교(廣英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고, 이후 군자금 모집에 정진하다가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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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목 생가터(충운사)
문양목(1869-1940)은 1903년 경기도 인천에서 서당교사로 재직 중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며 항일민족운동을 하였다. 1907년 3월 대동보국회(大同輔國會)에 참여하여 이병호와 백일규에 이어 회장이 되었고, 이 단체의 기관지인 『대동공보(大同公報)』의 주필도 맡았다. 1908년 3월 당시 한국정부의 외부고문이던 스티븐스(Stevens, D.W.)가 한국인은 독립할 능력이 없다고 하자, 대동보국회도 항의하였다. 이때 최유섭(崔有涉)·정재관(鄭在寬)·이덕현(李德鉉)·문양목 등이 발언을 정정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가 거절하자 그를 구타하고 돌아와 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후 전명운(田明雲)·장인환(張仁煥)이 스티븐스를 저격, 살해하자 대동보국·독립협회 등은 후원회를 조직하고 변호사 교섭, 통역선택, 경비조달 등을 맡게 되었으며, 변호 비용을 모금하고 판사전담위원이 되어 재무를 맡는 등 구명운동에 힘썼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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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헌 추모비
이종헌(1890-1957)은 충청남도 서산(현 태안) 사람으로, 1919년 3월에 대한독립단 안면면결사대를 조직하고, 같은 해 9월 19일에 지단장에 선임되었다. 이종헌은 광영학교(廣英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하였으며, 조국광복을 위해 군자금 모집에 정진하다가 1920년 3월 9일 일경에 체포되어 1921년 1월 2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 및 공갈죄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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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추모탑(오몽근, 가재창, 김정진, 염성한)
대한독립단은 1919년 음력 3월 남만주 유하현에서 조맹선·백삼규·조병준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로, 국내 진입작전과 남만주 동포사회의 자치를 목표로 했다. 실제 이들은 주로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지역, 만주 등지에서 항일무장활동을 벌였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집중적으로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남북도의 조선총독부 경찰을 습격하고, 신의주 등지에서 친일세력을 처단하기도 했다. 대한독립단 안면결사대는 1919년 9월 조직되었고 이종헌이 지단장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응징 등 독립활동을 하다가 1920년 일경에 노출되어 단원들이 체포되고 조직이 해체되었다. 지단장 이종헌(1977년 애족장)을 비롯해 가재창(1982년 애족장), 오몽근(1982년 애족장), 김정진(1983년 애족장), 염성환 등이 옥고를 치렀다. 태안 안면 반도청년회는 1983년 8월 대한독립단 안면결사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애국지사 추모탑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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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년 추모비
김병년(1894-1924)은 평안남도 평원 사람으로, 1906년에 편준익 등과 함께 태안의 두 번째 근대교육 기관인 광영학교/광영신숙(廣英新塾)을 안면도 승언리에 설립하였다. 또한 1919년 3월에는 평원군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수천 명의 시위군중과 횃불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김병년은 일경의 일제 검속 때 체포되었으며, 1920년 11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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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일 집, 동상, 사적비
이종일(1858-1925)은 충청남도 태안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98년에 최초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으며, 대한황성신문 사장에 피임되었다. 고종황제의 탄신일 경축 기사에 성수만세(聖壽萬歲)가 성수망세(聖壽亡歲)로 오기되어 불경죄로 투옥되었으나 중상모략으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1906년에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 월보 과장과 보성 인쇄주식회사의 사장직을 맡았다. 1919년 2월, 오세창으로부터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자신도 이 계획에 참여하여 민족대표로 서명하기로 결심하였다. 2월 27일 이종일이 사장으로 있던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공장 감독 김홍규에게 명하여, 최남선이 경영하던 신문관의 직공이 짜서 최린의 집에 보관 중이던 독립선언서 활자판을 가져오게 하여 이를 인쇄하도록 하였다. 이에 김홍규는 인쇄 직공 신영구에게 인쇄하도록 하였다. 이종일은 독립선언서 중에서 2천 매를 28일 보성사 간사인 인종익에게 주어, 1천 5백 매는 전주 천도교구에 보내고, 나머지는 충주로 보내어 밤중에 살포하도록 하였다. 또한 독립선언의 취지를 국내에 보도하고, 독립운동 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박인호, 윤익선과 함께 독립신문을 발간하기로 협의하였다. 이에 송현동에 있는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손병희와 함께 민족대표로 서명한 독립선언서 전말을 기재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원고를 작성하여 윤익선의 명의로 발간하기로 했다. 또 3월 1일 자신이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김홍규로 하여금 독립신문을 인쇄케 하여 임준식에게 배포하도록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에 인사동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자신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약 100매를 탁상에 놓고, 이 자리에 모인 민족대표에게 돌려보게 하고 함께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3년에 걸쳐 ≪한국독립비사(韓國獨立秘史)≫를 집필하여 발간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압수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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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태안 기포지 기념비
태안 원북면 방갈리 출신 문장로(文章魯, 1846~1919)는 1893년 2월 초 박덕칠을 통해 동학에 입도하였고, 그후 적극적인 포덕활동을 전개하여 방갈리의 접주가 되었다. 박인호가 이끌던 덕포의 기포령에 의하여 30여명의 동학 우두머리를 구출하기 위한 비밀회의가 방갈리에 살던 문장로의 자택에서 진행되었다. 이후 그들은 논의대로 태안관아를 점령하여 동학의 우두머리 30여명을 구출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 면천 승전곡 전투, 신례원 관작리 전투, 홍주성 전투에 태안지역의 동학농민군을 대거 이끌고 참여했다. 그러나 1894년 10월 29일 홍주성에서 패한 이후 관군의 체포령을 피해 태안일대 해안의 토굴과 야산에 은신하면서 예포 동학 조직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00년 동학의 지도부들이 지시한 조직 강화 밀명을 받고 태안 수접주로 임명되어 조석헌 등과 함께 비밀스럽게 조직 재건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후로도 관군의 체포령을 피해 충남의 각 지역을 떠돌면서 포교활동을 벌이다가 1910년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 무한천변의 갈대밭으로 이주하여 천도교의 포교 활동뿐 아니라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1919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충청남도 태안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 태안 기포지 기념비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최초 기포지로 알려진 태안군 원북면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15년에 본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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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
충청남도 태안에 위치한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이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 운동을 일컫는데, 총 2차에 걸쳐 일어났다. 1차 봉기는 1894년 3월에 봉건 체제개혁을 위한 것이고, 2차 봉기는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항일무장투쟁이었다. 1차 봉기가 일어나던 1894년 11월, 태안 백화산에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관군이 몰려와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유규회, 최성서, 최성일, 안순칠, 피만석을 체포하고 압송했다. 또한 수많은 동학농민군들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살해당하였다. 이에 목숨을 바쳐 동학의 정신을 지키고자 한 동학농민군의 정신을 기리고자 본 탑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