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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환 묘
김세환(1884-1955)은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경 충남 청양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일부를 강제 연행해 가자, 시위군중은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를 주도하던 권흥규(權興圭)가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자 발포하여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는데, 김세환도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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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곡3.1운동기적비
백곡3.1운동기적비는 정산3·1독립운동에 참여한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 주민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85년 3월에 건립하였으며, 백곡 출신 3.1운동 의사 19명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산3.1독립운동은 1919년 4월 5~6일간의 정사면 장날에 700여 명의 주민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 일경의 무력탄압에 많은 사상자를 낸 시위운동이다. 백곡3.1운동 기적비는 백곡2리 마을회관 앞, 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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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두 묘
조종두(1889-1953)는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경 충남 청양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일부를 강제 연행해 가자, 시위군중은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를 주도하던 권흥규(權興圭)가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자 발포하여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는데, 조종두도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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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헌수 묘
정헌수(1877-1947)는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경 충남 청양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일부를 강제 연행해 가자, 시위군중은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를 주도하던 권흥규(權興圭)가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자 발포하여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권흥규의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는데, 정헌수도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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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관 묘
김대관(1876-1940)은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경 충남 청양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일부를 강제 연행해 가자, 시위군중은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를 주도하던 권흥규(權興圭)가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자 발포하여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권흥규의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는데, 김대관도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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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흥규 순열비
권흥규(1852-1919)는 1919년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으로 있었는데, 같은 해 4월 5일 1백여 명의 장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했고, 일제 헌병이 일부를 강제 연행하자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의 발포로 인하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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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3.1만세운동 기념탑
정산3.1만세운동은 2,200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이며, 4월 5일에 홍범섭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마을사람들과 협의하여 태극기를 만들고 만세 부르기로 결의하고 주민 700여명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권흥규 의사 등이 일본헌병의 발포에 의하여 즉사하였다. 4월 6일에는 권흥규의사의 시신운구 중 수많은 사람들이 궐기하던 중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7일에 500여명이 횃불 시위를 하고, 9일에도 수백명이 산에 태극기를 걸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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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묘
이규태(1890-1941)는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경 충남 청양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일부를 강제 연행해 가자, 시위군중은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를 주도하던 권흥규(權興圭)가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자 발포하여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권흥규의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는데, 이규태도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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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유허비
박윤식(1868-1939)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 궁내부 주사(宮內府 主事)로 재직하고 있었으나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사직(辭職)하였으며, 1906년 민종식(閔宗植)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향관(餉官)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4월, 홍주성을 공격하여 많은 적을 사살한 끝에 5월 홍주성을 함락했지만, 적의 불시 습격으로 인해 홍주성을 빼앗겼다. 이후 진도(珍島)로 유배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의 부당함을 공언(公言)하다가 연행되었지만, 탈옥하여 1914년까지 은신생활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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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 유허비
민종식 (1861-1917)의 자는 윤조(允朝)이고, 호는 퇴초자(退樵子)이다. 그는 1882년(고종 1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1895년 을미사변 후 벼슬을 버리고 충청남도 정산(定山)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각처의 의병들로 조직된 연합의병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06년 5월 의병들을 홍산(鴻山)에 집결시켰고, 서부의 중심지인 홍주(洪州)를 공략해 점거하였다. 홍주의병의 항일 세력은 일제 헌병에게 큰 위협거리였으며, 5월 31일 홍주성에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싸움에서 많은 이들이 전사하고 9명은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민종식은 박창로(朴昌魯)·곽한일(郭漢一)·이용규(李容珪)·이남규(李南珪)와 더불어 다시 의병을 모아 재기를 도모하다가 일경에 붙잡혔고, 1907년 7월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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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 집
민종식 (1861-1917)의 자는 윤조(允朝)이고, 호는 퇴초자(退樵子)이다. 그는 1882년(고종 1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1895년 을미사변 후 벼슬을 버리고 충청남도 정산(定山)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각처의 의병들로 조직된 연합의병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06년 5월 의병들을 홍산(鴻山)에 집결시켰고, 서부의 중심지인 홍주(洪州)를 공략해 점거하였다. 홍주의병의 항일 세력은 일제 헌병에게 큰 위협거리였으며, 5월 31일 홍주성에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싸움에서 많은 이들이 전사하고 9명은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민종식은 박창로(朴昌魯)·곽한일(郭漢一)·이용규(李容珪)·이남규(李南珪)와 더불어 다시 의병을 모아 재기를 도모하다가 일경에 붙잡혔고, 1907년 7월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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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희 묘
박종희(1889-1929)는 충남 청양 목면(木面)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청양군의 시위 중 가장 크게 일어났던 1919년 4월 5일부터 7일까지 발생한 정산면 만세시위이다. 이 시위는 목면 안심리(安心里)에 거주하는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 권흥규(權興圭)가 일본 헌병의 총탄에 맞아 순국함으로써 더욱 거세졌다. 박종희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고 태(笞) 90도(度)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