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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일 기적비
윤병일(1872-1957)은 1906년 민종식(閔宗植)이 이끄는 홍주의병(洪州義兵)에 참가하였고, 좌군관에 임명되어 홍주로 진격하던 중 패퇴하였다. 1916년에는 이용규(李容珪)·이만직(李晩稙)·조종국(趙鍾國) 등과 같이 충남 논산(論山)의 연산(連山)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의사들을 모집하던 중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이로 인해 일 1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강화 석모도(席毛島)에 유배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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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3.1운동기념비
청양 지역 최초로 3.1만세운동의 조짐이 보인 때는 1919년 4월 3일, 운곡면 미량리에서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사전에 탄압을 받게 되자, 4월 6일 운곡면 6개 마을 60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마을 뒤편 국사봉에서 횃불 독립만세시위를 펼쳤다. 그러나 결국 95명이 체포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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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 신대 3.1만세운동 기적비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게 4월 6일 운곡면에서도 마침내 일어나게 되었다. 운곡면 신대리 독서봉 정상에서 청양군 최초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으며, 95명의 의사가 태형을 선고받았고 그중 22명이 신대리 출신이었다. 이곳이 청양군 3.1만세운동의 발원지이기에 후손들의 표상으로 삼고 애국지사들의 희생을 기리고자 운곡 신대 3.1만세운동 기적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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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재 묘
임철재(1892-1972)는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경 충남 청양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 때 일본 헌병이 일부를 강제 연행해 가자, 시위군중은 석방을 요구했다. 만세운동에 참가한 권흥규(權興圭)가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자 발포하여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는데, 임철재도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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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영 유허비
이세영(1870-1941)은 을미사변에 격분하여 1906년 민종식, 채광묵, 박창로 등과 홍주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군에게 패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종식(閔宗植)·채광묵(蔡光默) 등과 함께 의병봉기를 모의하였고, 1906년 의병장 민종식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으나, 홍주성에서 패하여 붙잡혀 황주로 종신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같은 해 독립의군부 충청·전라·경상도 등 3도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08년 4월 동생 이창영과 성명학교(誠明學校)를 세우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대한협회 은산지회(殷山支會)를 조직하였으며, 1913년 3월 독립의군부 함경·평안·황해도의 3도사령으로 활약하였고, 그해 6월 만주로 망명하고, 대종교에 입교하여 상교(尙敎)가 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모부 차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5월 신흥무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에 참여하여 군사부장, 10월에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군사위원장이 되었으며, 1930년에는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를 조직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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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집
김덕진(1864-1947)의 자는 경명(景明)이고, 호는 낙계(樂溪)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전국적인 을사의병이 일어났는데, 홍주 지역의 의병들은 민종식(閔宗植)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고, 김덕진도 민종식 의진에 참여했다. 홍주의진은 1906년 5월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지만, 곽한일, 박윤식, 김운락 등과 같이 재궐기를 준비하였다. 이 계획의 일부가 일본 헌병대에 알려지게 되면서 재궐기는 실패하게 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 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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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묘
김덕진(1864-1947)의 자는 경명(景明)이고, 호는 낙계(樂溪)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전국적인 을사의병이 일어났는데, 홍주 지역의 의병들은 민종식(閔宗植)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고, 김덕진도 민종식 의진에 참여했다. 홍주의진은 1906년 5월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지만, 곽한일, 박윤식, 김운락 등과 같이 재궐기를 준비하였다. 이 계획의 일부가 일본 헌병대에 알려지게 되면서 재궐기는 실패하게 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 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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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태 묘
김경태(1879-1921)는 1917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의열투쟁의 선봉에 섰고,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滿洲)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서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김경태는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며 친일부호 처단에 앞장서 1918년 1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임봉주(林鳳柱) 등과 함께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이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됨에 따라 일경에 붙잡혀 임세규·채기중과 함께 1921년 8월에 사형을 집행당하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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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환 묘
윤병환(1889-1949)은 1919년 4월 7일 충남 청양 지곡리에서 이동명(李東明)·이영은(李永殷) 등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횃불을 놓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며, 이후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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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기적비
김덕진(1864-1947)의 자는 경명(景明)이고, 호는 낙계(樂溪)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전국적인 을사의병이 일어났는데, 홍주 지역의 의병들은 민종식(閔宗植)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고, 김덕진도 민종식 의진에 참여했다. 홍주의진은 1906년 5월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지만, 곽한일, 박윤식, 김운락 등과 같이 재궐기를 준비하였다. 이 계획의 일부가 일본 헌병대에 알려지게 되면서 재궐기는 실패하게 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 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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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은 묘
김동은(1895-1937)은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경 충남 청양군(靑陽郡)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1백여 명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30여 명의 시위 참여자를 강제 연행해 가자, 분노한 시위군중은 피검자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를 주도하던 향교 직원 권흥규(權興圭)가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자, 일본 헌병은 발포하여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튿날 아침, 시장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고향 집으로 운구하는데 1천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운구행렬에 동참하였고, 여기에서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김동은은 4월 5일부터 4월 7일까지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며, 태 70도의 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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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한 묘
윤병한(1892-1954)은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경 충남 청양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 때 일본 헌병이 일부를 강제 연행해 가자, 시위군중은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를 주도하던 권흥규(權興圭)가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자 발포하여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는데, 윤병한도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