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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규대 묘
채규대(1890-1906)는 민종식(閔宗植) 홍주의병장 휘하에서 활약한 채광묵(蔡光默)의 아들이다. 1906년 4월 8일 부친과 함께 홍주성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용맹하게 싸웠으나, 부자가 함께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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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훈 사적비
한훈(1889-1950)은 1906년 홍주(洪州)에서 민종식(閔宗植)이 항일의병을 일으켰을 때 참가했으며, 홍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홍주성을 상실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1년 임병찬(林炳瓚)과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고, 1913년에는 채기중(蔡基中)·유장렬(柳璋烈)·김상옥(金相玉) 등과 함께 비밀항일결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였다. 1915년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 등과 합류해 광복단을 광복회로 개편, 강화해서 군대식 조직으로 편성하여 활동하던 중 조직이 발각되자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국내에서 결성된 비밀항일결사인 암살단(暗殺團)에 합류하여, 김상옥·김동순(金東淳) 등과 함께 일본총독을 암살하고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해 우리 민족의 독립열의를 세계에 알리고자 계획했지만,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년 6개월간의 복역생활을 하다가 출옥하였으며, 6.25동란 중에 북한군에게 납치 피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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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석 사적비
한태석(1876-1949)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민종식(閔宗植) 의병부대에 합류하고 홍주성 교전 등에 참전하며 계속해서 활동하다가, 1916년 비밀결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할 때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으며, 1920년 8월 사이토[齋藤實] 총독과 정무총감(政務總監)을 저격, 사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나 한우석(韓禹錫)이 붙잡힘에 따라 무산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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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흥규 묘
순국선열 권흥규의 묘는 충남 청양에 위치해있으며, 권흥규(1852-1919)는 1919년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으로 있었는데, 같은해 4월 5일 1백여 명의 장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하였는데 일제 헌병이 일부를 강제 연행하자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의 발포로 인하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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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덕사(최익현 사당)
모덕사는 충남 청양군 목면에 있으며 최익현이 생전에 살았던 고택에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조선 말 송암리 장구(長久)마을에 최익현이 와서 살았는데,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06년 청양군내 유림들이 발의, 1913년에 공덕사(恭德祠)라는 명칭으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광복 후 사우를 중수하고 고종의 밀지(密旨) 내용 중 ‘慕卿宿德(그대의 큰 덕을 사모함.)’에서 ‘慕’자와 ‘德’자를 따서 모덕사라 이름을 바꾸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1982년과 1985년에 유물전시관·장서각(藏書閣) 등을 건립하고 고택(古宅) 등도 보수하였다. 1982년부터 모덕사관리사무소를 두어 관리하고 있다.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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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충대의의사비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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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좌상(모덕사)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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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흥규 추모비
권흥규(1852-1919)는 1919년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으로 있었는데, 같은해 4월 5일 1백여 명의 장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하였는데 일제 헌병이 일부를 강제 연행하자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의 발포로 인하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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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면출신 정산 3.1만세운동참가자비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이러한 물결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곳에서도 4월 5일 정산3.1만세운동이 일어나 항일의 기치를 드높였다. 한편, 이로 인해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197명이 태형을 받았는데, 그 중 목면 출신 수형자 41명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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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선 묘
이교선(1892-1941)은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경 충남 청양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일부를 강제 연행해 가자, 시위군중은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를 주도하던 권흥규(權興圭)가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자 발포하여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는데, 이교선도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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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봉 묘
이경봉(1894-1955)은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경 충남 청양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 때 일본 헌병이 일부를 강제 연행해 가자, 시위군중은 석방을 요구했다. 만세운동에 참가한 권흥규(權興圭)가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자 발포하여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후 사람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는데, 이교봉도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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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 묘
조하(1894-1962)는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경 충남 청양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 때 일본 헌병이 일부를 강제 연행해 가자, 시위군중은 석방을 요구했다. 만세운동에 참가한 권흥규(權興圭)가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자 발포하여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후 사람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는데, 조하도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