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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학 묘
박영학(1878-1920)은 충청남도 천안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에 모인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니 온 천지가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대의 위세에 놀란 일본 헌병이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까지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했다. 박영학은 4월 27일 천안헌병대에서 태(笞) 60도를 맞고 빈사상태로 귀가하였으나, 그 장독으로 신음하다가 이듬해 7월 7일 향년 42세로 끝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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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선 묘
김교선(1892-1970)은 충청남도 천안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의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홍일선과 함께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고, 인근 부락에 살고 있는 한동규와 이순구에게 독립만세시위 거사의 취지를 역설하여 찬동을 얻었다. 4월 1일에는 동료들과 함께 아우내 장터에 나가 시장에 온 사람들에게 독립만세 시위대열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시위군중 3천여 명이 모여 시위하자, 그 열기에 놀란 일본군이 발포를 시작하였고 이에 19명이 순국하고 30명 이상이 부상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오후 4시경 김교선은 한동규, 이순구, 이백하 등과 함께 100여 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일본 헌병주재소 앞을 버티고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다. 그해 9월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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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구 묘
김정호(미상-1955)는 천안 사람으로, 본관은 안동, 이명은 김승호(金昇鎬)이다. 양성읍(현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단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독립 자금을 모금하고자 국내로 밀입국하여 광복회원으로 활동하며 서울 중앙 우체국에서 5만 원 상당의 금액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27년 체포되어 7년의 징역을 살았다. 이후에도 만보산사건으로 다시 6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상해 임시 정부의 밀령으로 중국을 벗어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 공로 훈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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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묘
김정호(?-1955)는 천안 사람으로, 본관은 안동, 이명은 김승호(金昇鎬)이다. 양성읍(현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단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독립 자금을 모금하고자 국내로 밀입국하여 광복회원으로 활동하며 서울 중앙 우체국에서 5만 원 상당의 금액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27년 체포되어 7년의 징역을 살았다. 이후에도 만보산사건으로 다시 6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상해 임시 정부의 밀령으로 중국을 벗어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 공로 훈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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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추모비
김상철(1899-1974)은 천안 사람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불암이며 독립지사인 김정호의 장남이다. 1919년 3월 1일 병천에서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체포되었고 1년 여의 옥고를 겪었다. 그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나가던 중 자금 조달 차 귀국한 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독립 후 광복회에서 독립기념사업을 하던 중 1974년에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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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묘
김상철(1899-1974)은 천안 사람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불암이며 독립지사인 김정호의 장남이다. 1919년 3월 1일 병천에서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체포되었고 1년 여의 옥고를 겪었다. 그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나가던 중 자금 조달 차 귀국한 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독립 후 광복회에서 독립기념사업을 하던 중 1974년에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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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쟁의사 광복회원 기념비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1915년 통합하여 결성된 혁명단체이다. 1910년대 헌병경찰제에 의한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가 자행되던 시기에, 폭력혁명적 투쟁으로 맞선 대한광복회의 행보는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였다. 또한 일제의 조선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가난한 민중들이 고통받음에도, 자신들의 안일만을 위해 민족성을 포기한 친일 부호배에게 철퇴를 가하며 민족정기를 일깨워 주었다. 대한광복회의 의열투쟁 방략은 이후 암살단, 의열단, 한인애국단으로 명맥을 이어가며 독립운동을 지탱하는 한 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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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구 묘
이관구(1885-1953)는 황해도 송화 출신으로, 상경하여 박은식, 양기탁의 언론사업에 종사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회문대학 등에서 수학한 뒤, 1913년 국민당의 제2차혁명에 참가하였다. 이후 1914년 귀국하여 해주(海州)에서 유림계의 이종문, 오순원 등과 밀의하여 항일격문을 작성하고 배포하였다.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신규식이 주도한 동제사에 가입하였으며, 고향의 가재를 매각하여 삼달양행, 상원양행을 설립하였고, 박상진이 주도한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대외업무를 맡았다. 그는 신흥학교의 이시영에게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박상진과 함께 무기 확보에 힘을 쏟았으며, 총독암살을 계획하고 회원 성낙규, 조선환을 서울에 잠입시켰다. 1917년에는 귀국하여 대한광복회의 황해도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유림출신 인사들을 동회에 가입시키며 조직 확대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918년 초 동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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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협 묘
유중협(1891-1959)은 충청남도 천안 사람으로, 1913년 채기중, 유창순, 유장렬 등이 조직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에서 활동하였다. 풍기광복단은 대부분은 의병적 성향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실천 방략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 구입과 군자금 모집이었다. 1915년에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들이 제휴하여 혁명단체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자, 유중협은 이에 가입하여 군자금 수합 활동에 힘썼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따라서 혁명계획은 군자금 모집,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 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 처단 계획 및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유중협은 충남 천안지방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던 중 1918년 초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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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3.1 독립만세운동기념탑
본 탑은 1919년 3월 20일 입장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오전 10시경 광명보통학교 학생 80여 명이 교문을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양대시장으로 향하였다. 양대장터에서는 애국심에 불타는 광부들도 합세하여 시위대열에 앞장서니 장터에 나와 있던 700여 명의 농민들도 함께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8일, 일제 군경의 탄압에 대한 천안시민의 애국정신은 다시금 폭발하여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날의 시위는 충청남도 이래 최초의 순국자가 발생했으며 광부들이 일제의 총칼에 맞서 싸우는 등 격렬한 저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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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섭 묘
홍찬섭(1892-1958)은 1919년 3월 서울에서 3.1운동에 참가했고, 4월 1일 경기 안성 칠곡리에서 이유석(李裕奭)·이근수(李根洙)·이희용(李熙龍)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고,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들어가 지방 선전대로서 활동하였다. 이후 국내선전의 임무를 맡고 활약하다가 마침내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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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광묵 묘
채광묵(1850-1906)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박창로(朴昌魯)·안병찬(安炳瓚) 등과 홍주성(洪州城)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였으나 목사 이승우(李勝宇)의 배반으로 실패하였다. 의병거사에 실패한 뒤 곧바로 상경하여 10여 차례에 걸쳐 토적상소(討賊上疏)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제수하였으나, 이를 고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박안기(朴安曁)·이만식(李晩植)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1906년 4월 민종식(閔宗植)과 의병대를 조직하여 수천 명으로 규합된 대의병진의 참모장으로 추대되어 홍주성을 점령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반격하는 일본군과 최후까지 접전하다가 아들 채규대(蔡奎大)와 함께 전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