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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철 묘
최정철(1853-1919)은 충청남도 천안 사람이고, 이명은 채씨이다. 기미년 전해에 부군을 여의고, 다음 해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큰아들 김구응 의사가 일본 헌병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최정철은 "이놈들아! 내 자식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내 나라 독립만세를 부른 것도 죄가 되느냐! 이놈들아! 나도 죽여라!"하고 분노하며 저항하였고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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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철, 김구응 추모비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최정철 김구응 모자 추모비이다. 김구응(1887-1919)은 천안의 교사이고, 최정철(1853-1919)은 김구응의 어머니이다. 김구응은 1915년에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의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장명학교의 교사로서 조만형과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을 가르쳤고 1918년부터는 병천리 진명학교에서 교사로서 재직하던 중 3.1운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에 1919년 4월 1일 홍일선, 김교선, 한동규, 이순구, 조인원 등과 함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만세 시위의 선두에 있던 김구응이 일본 헌병이 쏜 총에 맞고 쓰러졌고, 이에 분노한 어머니 최정철이 절규하며 헌병에게 달려들었고 이내 총을 맞아 사망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김구응에게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최정철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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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김상철의 묘이다. 김상철(1899-1974)은 천안 사람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불암이며 독립지사인 김정호의 장남이다. 1919년 3월 1일 병천에서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체포되었고 1년 여의 옥고를 겪었다. 그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나가던 중 자금 조달 차 귀국한 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독립 후 광복회에서 독립기념사업을 하던 중 1974년에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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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김정호의 묘이다. 김정호(?-1955)는 천안 사람으로, 본관은 안동, 이명은 김승호(金昇鎬)이다. 양성읍(현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단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독립 자금을 모금하고자 국내로 밀입국하여 광복회원으로 활동하며 서울 중앙 우체국에서 5만 원 상당의 금액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27년 체포되어 7년의 징역을 살았다. 이후에도 만보산사건으로 다시 6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상해 임시 정부의 밀령으로 중국을 벗어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 공로 훈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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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함성' 동상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천안에서 3천여 명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을 외친 만세 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과 평양 등 전국 여섯 개의 도시에서 동시에 시작된 3.1운동을 목격한 유관순은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약 3천 명의 군중들이 모여 3번에 걸쳐 만세 운동을 진행하였다. 일제는 총으로 시위 군중을 강제 진압하였고 이날 현장에서 19명이 사망하고 많은 시위자들이 부상과 투옥 등 고초를 겪었다. 2009년 6월에 건립된 박민섭 작가의 작품으로,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태극기의 장엄한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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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장터 표지석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기리는 표석이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천안에서 3천여 명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을 외친 만세 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과 평양 등 전국 여섯 개의 도시에서 동시에 시작된 3.1운동을 목격한 유관순은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약 3천 명의 군중들이 모여 3번에 걸쳐 만세 운동을 진행하였다. 일제는 총으로 시위 군중을 강제 진압하였고 이날 현장에서 19명이 사망하고 많은 시위자들이 부상과 투옥 등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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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천안에서 3천여 명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을 외친 만세 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과 평양 등 전국 여섯 개의 도시에서 동시에 시작된 3.1운동을 목격한 유관순은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약 3천 명의 군중들이 모여 3번에 걸쳐 만세 운동을 진행하였다. 일제는 총으로 시위 군중을 강제 진압하였고 이날 현장에서 19명이 사망하고 많은 시위자들이 부상과 투옥 등 고초를 겪었다. 1947년 11월,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구미산에 건립하였으며, 2002년에 당시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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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식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유민식(유정근)의 묘이다. 유민식(1898-1969)은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운동가로, 이명은 유정근, 유만송, 유후단이다. 일제에게 국권이 피탈되자 조국 광복의 염원을 안고 만주 등지에서 국권 회복 운동을 벌이고 1919년 4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홍진, 신규식, 이명교 등과 함께 충청도 대표로 선임되었다. 1923년 5월에는 만주로 넘어가 김좌진을 보좌하고 1925년에는 김혁, 김좌진 등이 조직한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활약했다. 그러나 중국 군벌의 지원을 받은 하얼빈 일영사관경찰대가 신민부의 비밀본거지를 포위 습격하여 본부 직원 모두가 체포되어 1929년 7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었다. 1934년, 유민식은 옥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나 끔찍한 폭행과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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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김상헌의 묘이다. 김상헌(1893-1919)은 충청남도 천안 사람이다. 김상헌은 1919년 4월 1일, 갈전면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 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에 모인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일제히 호응하니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흥분된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고 일본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일본 헌병이 기총을 난사하며 위협하였고 이때 김상헌도 일본 군경의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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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김상훈의 묘이다. 김상훈(1874-1925)은 충청남도 천안의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 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에 모인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호응하여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김상훈은 시위대열에 앞장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그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인물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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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시비
김상철(金相喆)[1897~ ]은 1897년 10월 25일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 가전리 463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아우내 장터의 독립 만세 운동은 원래 수신면(修身面)·성남면(城南面) 계와 동면(東面)의 조인원(趙仁元)·유관순(柳寬順) 계의 2개의 계열로 나누어 계획되었다. 김상철은 동면 계열로 참여하였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조인원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마침 시장에 와 있던 김상철은 군중들에 섞여 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누볐다. 이때 출동한 헌병들이 총기를 난사하여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오후 4시경, 분노한 독립 만세 운동 참여자들이 주재소로 몰려가 헌병들이 빼앗아간 태극기를 다시 높이 들어 만세를 부르며, 유치장의 벽을 헐어 구멍을 내는 등 적극적인 항의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상철은 헌병 주재소의 유치장 벽에 발길질을 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 결국 이날의 활동으로 인하여 김상철은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김상철은 1921년 경성에 혁신단을 발기하여 통의부원, 혁신단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또한 3년 후인 1924년에는 중국 체류 중 군자금 조달의 사명을 띠고 귀국 활동을 하던 가운데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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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순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유창순의 묘이다. 유창순(1880-1943)은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국권을 뺏기자, 국권회복을 위해 채기중, 유장렬 등과 함께 1913년 풍기에서 풍기광복단을 결성하였다. 유창순은 풍기광복단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 구입과 군자금 모집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하여 1915년 대한광복회를 결성할 때에도 참여하여 친일 부호 처단에 앞장섰다. 대한광복회의 혁명계획인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 처단과 친일 부호 처단 등을 위해 유창순은 경상도 지방의 친일 부호를 조사하여 명단을 작성하는 한편 그들에게 보내는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발송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11월에는 채기중·강순필, 임봉주 등과 함께 칠곡의 친일 부호 장승원을 처단하였다. 이때 대한광복회의 처단 고시문을 붙여 광복회가 널리 알려지게 되며 조직이 발각돼 유창순은 1918년에 피체되었고, 10여 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