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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원호 묘
권원호(1904 - 1944)는 강원도 고성(高城) 사람이다. 강원도 회양감리교회(淮陽監理敎會)의 전도사로 있을 때 일제의 동방요배(東方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를 주일예배 시간에 완강히 거부했다가 1941년 10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2년 1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옥중에서도 일제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동방요배 등을 반대하다가 소위 불경죄(不敬罪)가 추가되었다. 1943년 11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시 징역 1년 형이 가형(加刑)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중에서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옥사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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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비
이태준(1883 - 1921)의 호는 대암이며,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의사(醫師)로 몽고(蒙古)수도 고륜(庫倫)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중, 1918년 9월 김규식(金奎植)이 파리강화회의 참석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키 위해 몽고로 오자 그에게 독립운동자금 2천 달러를 제공하여 활동을 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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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이강희 공적비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형제 공적비는 지오 이경희선생과 동생인 해은 이강희선생 두 형제의 공적비이다. 이경희(1880 - 1949)는 1922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1923년 3월 중순경 김시현(金始顯)·유석현(劉錫鉉) 등이 총독부(總督府)와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조선은행(朝鮮銀行), 그리고 매일신보사 등을 폭파시키기 위해 폭탄을 국내에 반입하자 이에 참여하여 1923년 3월 15일 김시현 등이 무기와 폭탄을 국내에 들여올 때 같이 갖고 온 혁명선언서(革命宣言書) 및 격문(檄文) 수백 장을 황 옥(黃鈺)으로부터 교부받아, 각도지사(各道知事)와 경찰부(警察部)에 우편으로 발송하고, 서울 시내 곳곳에 살포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인해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여, 신간회 경성본부 총무간사 겸 경상북도 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또한 신간회 산하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를 돌보다가 1928년 11월 11일 밀양경찰서에 의해서 검속(檢束) 당하기도 하는 등 항상 일경의 감시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강희(1898 - 1942)는 이경희의 친동생으로 1898년 2월 17일 대구 무태에서 태어나셨다. 형을 따라 서간도(西間島)로 들어갔다가 중국 상해에서 여운형(呂運亨)의 도움으로 중국 상해 호강대학교에 재학 중 형이 의열단 사건으로 투옥되자 국내로 들어와 신간회 부산지회 총무, 부산학우회 서무간사, 부산협동조합장 등 민족운동에 전력하다가 1928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노차용(盧且用), 장택원(張澤遠), 정대봉(鄭大鳳) 등과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보강을 위해 비밀결사당을 조직하고 활동하던중 일경에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룬 뒤 다시 중국으로 망명, 용정 대성(大成)중학교 영어교사와 교감을 겸임 후세교육에 힘쓰며 기다리시다가 1942년 이역만리에서 44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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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하 공덕비
이성하(1859 - 1919)는 1919년 4월 1일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조인원(趙仁元)·유관순(柳寬順) 등이 아우내 장터에서 일으킨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여세를 몰아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일본 헌병이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까지도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명이 부상하였다. 이때 그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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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 목천판 간행터
동경대전은 조선후기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한문으로 작성한 천도교경전, 동학경전이다. 동경대전 목천판 간행지는 김은경(金殷卿)의 집터로 최시형(1827~1898) 선생의 지도를 받아, 『동경대전』을 목판으로 간행한 자리이다. 동학이 충청도 전역으로 확산되자, 김은경의 집에 간행소를 마련하고 『동경대전』 1천부를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동경대전』은 동학의 핵심 사상인, 모든 존재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전으로, 인류 최초로 본원적 평등사상을 연 진리이다. 『동경대전』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시의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화와 균형을 삶을 이루고자 능동적으로 대처하게 하였고, 이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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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집, 동상
이동녕선생 생가지는 2005년 12월 보수 및 정비가 완료되고, 생가 복원 사업이 이루어졌다. 우물, 이동녕 선생 좌상 등 구조물이 구성되었고, 생가에는 안방, 사랑채 등에 옛 가구 및 인물 모형이 전시되었다. 이동녕(1869 - 1940)은 천안 목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석오(石吾), 자는 봉소(鳳所)이다. 북간도 용정에 이상설 정순만 등과 같이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힘 썼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 이회영, 김구, 이동휘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활약하였으며, 1910년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13년에는 남만에서 청년운동을 하다가 해삼위로 가서 이상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부터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국무위원 겸 주석을 역힘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1940년 3월 13일 72세 때 사천성기강(四川省綦江)에서 과로로 영면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광복 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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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
목천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는 1919년 충남 천안시 목천면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설립한 것으로 1989년 3월 14일에 목천초등학교 운동장 동쪽에 높이 3.5m의 목천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1919년 3월 14일 오후 4시 무렵 천안군 목천읍에 있는 목천보통학교에 다니는 학생 약 120명이 교정에 모여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목천읍 읍내로 진출하여 일본 헌병대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 시위를 앞장서서 이끈 인물로 네 명이 체포되었는데,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전하여 오는 기록이 없다. 당시 목천 보통학교 학생들의 나이는 13~23세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순식간에 각지로 파급 확산되어 4월 1일은 호서지방 최대의 항일투쟁 의거인 아우내 만세운동으로 이어졌으니 이곳 목천 학생의거는 바로 천안지방에서 최초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으로서 주동학생 4명이 체포·구금된 중대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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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집, 유허지비
이범석은 1900년 10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한동안 목천읍 서리 뒷산 밑의 증조부 집에서 자랐다. 이범석(1900 - 1972)의 호는 철기(鐵驥, 哲琦), 자는 인남(麟男), 이명은 이국근(李國根), 윤형권(尹衡權), 김광두(金光斗), 왕운산(王雲山), 왕모백(王慕白)이다. 이범석은 중국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에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대첩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1941년 임시 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참모장으로 참가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 민족 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을 창설하여 청년 교육에도 힘썼다. 1948년에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및 국방 장관 등을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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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목천면 동리)
애국지사 마을 표지석은 이동녕 선생이 나서 자란 마을임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목천고등학교 언덕길을 올라서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있는 산방천 앞 동리교에 세워져있다. 이 마을에 위치한 석오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는 2015년 12월 천안시에서 복원한 곳으로 이동녕 선생은 1869년 10월 6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 79-2번지에서 의성군수를 역임한 교육자 이병옥의 장남으로 태어나 우리나라 최초의 항일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시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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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선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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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읍내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탑
천안읍내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 중 대표적인 것은 1919년 4월 1일에 갈전면 아우내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다. 갈전면에서는 조인원을 중심으로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던 중, 인근 수신면과 성남면에서도 김상훈(金相勳)·홍일선(洪鎰善) 등의 20대 청년들이 밤마다 각 마을 근처의 산에 봉화를 올리며 만세를 부르는 것을 알고, 두 계통의 주동자가 만나 만세운동을 합동으로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4월 1일 조인원이 3,000여 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헌병파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일본헌병들이 기관총을 난사해, 유중권 등 많은 사상자가 났고, 시위군중은 일단 후퇴하였다. 그러나 격분을 참지 못한 시위군중은 헌병파견소로 몰려가 일제의 만행을 성토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취하려 하였다. 이에 조인원의 만류와 설득으로 충돌 없이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천안에서 급파된 일본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19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했으며, 많은 사람이 검거되었다. 검거된 주동자 가운데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끝까지 만세를 부르며 항거하다가 마침내는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밖에도 입장장터에서는 3월 20일과 28일 두 차례에 걸쳐 양대여숙의 여학생과 직산금광 광부들의 주동에 의해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29일 천안읍에서 약 3,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출동한 일본헌병에 의해 26명이 검거되었다. 또 3월 14일 목천보통학교학생 120명이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일본헌병과 충돌해 4명이 검거되고, 3월 31일에는 성환면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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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응 묘
김구응(1887 - 1919)의 이명은 김구웅이며, 1919년 4월 1일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조인원(趙仁元)·유관순(柳寬順) 등이 갈전면(葛田面) 아우내(竝川) 장날을 기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니, 아우내 장터는 만세소리로 가득찼다. 시위군중이 계속 독립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고 일본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군중의 기세에 놀란 일본 군경들이 주재소에서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되어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대며, 계속 발포하여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명 이상이 부상하는 일대 참사가 일어났다. 이날 그도 적의 흉탄에 맞아 쓰러졌는데, 일본 헌병은 잔인하게도 다시 머리에 대고 총을 쏘아 죽였고,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아들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던 어머니 최정철(崔貞徹) 마저도 잔악무도하게 창칼로 찔러 순국케 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