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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종 집
김한종(1883 - 1921)의 자는 경수, 호는 일우이다.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으로 활약한 김재정(金在貞)의 맏아들이다. 국권이 일제에 의하여 침탈당하자 구국을 맹세하고 1915년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양제안(梁濟安)·김경태(金敬泰) 등과 함께 대구에서 비밀결사인 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하였다. 광복회는 1916년 노백린(盧伯麟)·김좌진(金佐鎭) 등 동지를 규합하여 전국 규모의 독립운동단체로 거듭났다. 김한종은 충청지부장으로 임명되어 총사령 박상진과 더불어 각지의 부호로부터 국권회복운동의 자금을 거두었다. 1918년 1월에는 김경태·임봉주(林鳳柱)를 파견하여 친일 악질관리인 충청남도 아산의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를 사살하였다. 그해 1월 조직이 발각되면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경성복심법원은 1919년 9월 22일 기각하였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8월에 총사령 박상진과 함께 처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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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규 삼절묘 구 묘
이남규 삼절묘는 애국지사 이남규와 아들 이충구, 교구꾼 김응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에 조성한 묘이다. 이남규(1855 - 1907)는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 이를 규탄하는 "청절왜소(請絶倭疏)", 을사늑약 때는 "청토적소(請討賊疏)" 등의 상소문을 써서 일제의 만행을 온 나라에 알려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1906년 충남 홍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공방전 끝에 패한 민종식을 평원정(平遠亭)에 숨겨 주었다가 장남 이충구와 함께 붙잡혀 공주감옥에서 형벌을 당한 끝에 한 달만에 풀려났다. 그 후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光武皇帝)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케 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자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특히 해산 군인들의 참여로 의병운동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자 이 지역의 의병재발을 우려한 일본군은 1907년 9월 26일 이남규를 붙잡아 압송하던 중 협박과 회유를 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조금도 뜻을 굽힐 기색을 보이지 않자 칼로 선생을 죽이고, 온 몸으로 이를 막으려던 맏아들 충구와 하인 김응길(金應吉)이 함께 피살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충구(1874 - 1907)는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출신이다. 1906년 충남 홍성에서 항일 의병을 주도한 수당 이남규(修堂 李南珪)의 장남으로 부친을 도와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다가 귀향하여 은신하였다. 1907년 전국에 다시 의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헌병과 경찰 등 약 100여명은 이남규의 집을 습격하여 부자를 함께 체포하였다. 연행하여 가면서 계속 투항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으니, 아산군 온양의 평촌에 이르러 부친을 군도로 내리치니 이에 대항하던 이충구도 마침내 일병의 칼을 맞고 부친과 함께 순국하였다. 또한 이를 말리던 충복(忠僕) 김응길(金應吉)도 살해되었으니 세상 사람들은 충신, 효자와 의사가 한 가문에서 거룩하게 순절하였다고 칭송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응길은 충남 예산 출신으로 1906년 3월 봉기한 홍주의진(洪州義陣)의 선봉장 이남규(李南珪)를 도와 의병 활동을 하다가 희생되었다. 홍주의진은 1908년 3월 15일 창의하였으나 곧 실패하고 해산하였다. 이에 잔여 의병을 수습한 민종식(閔宗植)이 1906년 5월 11일 부여군 홍산(鴻山)에서 재봉기하여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하고, 5월 28일 의병진의 편제를 조직적으로 구성하였다. 이때 이남규는 홍주의진의 선봉장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5월 31일 일본군의 홍주성 공격이 시작되어 홍주의진은 6·70명이 전사하고 83명이 포로가 되었다. 민종식을 비롯한 의병장들은 홍주성을 탈출하여 충남 청양·온양·공주 등지를 전전하다가 9월 그믐에 충남 예산의 이남규 집에서 회합하였다. 이들은 10월 5일 예산으로 진격하고자 하였으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이남규를 비롯한 의병장들이 체포되었다. 이남규와 그의 아들 이충구(李忠求)는 일본군의 만행으로 함께 희생되었다. 김응길은 이남규 부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주먹으로 일본군에게 반항하다가 칼에 맞아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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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복 구 묘
이승복(1895 - 1978)은 애국지사 이남규(李南珪)의 손자로 이명은 이징복이다. 1913부터 6년간 노령과 북만주에서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永)·이시영(李始榮)·이상설(李相卨)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1920년에는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청구신문(靑丘新聞)〉을 발간하고 신문활자를 노령으로 운반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6개월간 구금당하였다. 1923년 김상옥(金相玉)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파의거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동년 7월 홍명희(洪命熹)·홍증식(洪增植)·김 찬(金燦) 등과 함께 사상단체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를 조직하였다. 1927년에는 이관용(李灌鎔)·권태석(權泰錫) 등과 함께 신간회 예산지회를 주도·조직하였다. 또한 1928년 6월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의 정기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1927∼1931년 동아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언론창달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의 진상을 보도하였다는 이유로 안재홍(安在鴻)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6년경에는 중국 남경(南京)·상해(上海) 등지의 독립운동 단체나 중국 군관학교에 입교를 원하는 국내의 청년들을 그곳의 지도자들에게 소개시켜 주며 독립투사의 양성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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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규 집
조선시대 1637년 건립된 수당 이남규 선생 고택은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가 태어난 곳으로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에 위치해 있으며 1976년 충남유형문화재 68호로 지정됐다. 이남규(1855 - 1907)는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 이를 규탄하는 "청절왜소(請絶倭疏)", 을사늑약 때는 "청토적소(請討賊疏)" 등의 상소문을 써서 일제의 만행을 온 나라에 알려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1906년 충남 홍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공방전 끝에 패한 민종식을 평원정(平遠亭)에 숨겨 주었다가 장남 이충구와 함께 붙잡혀 공주감옥에서 형벌을 당한 끝에 한 달만에 풀려났다. 그 후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光武皇帝)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케 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자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특히 해산 군인들의 참여로 의병운동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자 이 지역의 의병재발을 우려한 일본군은 1907년 9월 26일 이남규를 붙잡아 압송하던 중 협박과 회유를 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조금도 뜻을 굽힐 기색을 보이지 않자 칼로 선생을 죽이고, 온 몸으로 이를 막으려던 맏아들 충구와 하인 김응길(金應吉)이 함께 피살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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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규 3대 항일투쟁 사적비
이남규선생 3대 항일투쟁 사적비는 이남규, 이충구, 이승복 3대에 걸친 독립지사의 애국 정신을 계승하고자 건립하였다. 이남규(1855 - 1907)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과 일전을 벌일 것을 상소하고 두문불출하다가, 1906년 5월 민종식의진의 홍주성 전투에서 선봉장에 임명되었으나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주성 전투 패퇴 후 그를 찾아 온 민종식 의병장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재기를 돕다가 거사일 직전인 1906년 10월 2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고 풀려났으나, 일진회의 밀고로 1907년 9월 다시 체포되어 같이 의병에 참여했던 그의 아들 이충구(1874 - 1907)와 함께 순국했다. 이승복(1895 - 1978)은 이남규의 손자로 1913~1934년 사이에 국내와 만주 노령 지역을 드나들며 군자금 모금, 임시정부 연통제 활동 등 독립운동과 언론활동을 했고, 1927년 신간회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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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주 묘
이근주(1860 - 1910)의 자는 문약(文若), 호는 청광(淸狂)이다. 1860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고, 이후 독학으로 학문을 일궜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의하여 일어난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김복한 등 홍주의병 주도자들이 체포된 뒤에는 조의현 등과 재기를 시도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지 울분을 이기지 못해 천식과 다리가 마비되는 병이 생겼다. 1910년 경술국치의 비보를 접하자 부모의 묘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9월 23일 자결하였다. 이근주는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며, 사학을 배척하고 정학을 지킨다는 뜻의 “존화양이 척사부정(尊華攘夷 斥邪扶正)”이라는 여덟 글자를 유언으로 남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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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주 신도비
이근주(1860 - 1910)의 자는 문약(文若), 호는 청광(淸狂)이다. 1860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고, 이후 독학으로 학문을 일궜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의하여 일어난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김복한 등 홍주의병 주도자들이 체포된 뒤에는 조의현 등과 재기를 시도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지 울분을 이기지 못해 천식과 다리가 마비되는 병이 생겼다. 1910년 경술국치의 비보를 접하자 부모의 묘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9월 23일 자결하였다. 이근주는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며, 사학을 배척하고 정학을 지킨다는 뜻의 “존화양이 척사부정(尊華攘夷 斥邪扶正)”이라는 여덟 글자를 유언으로 남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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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수학지 (오치서숙 터)
오치서숙은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으로 윤봉길은 오치서숙에 들어가 성주록의 문하생이 되었다. 윤봉길(1908 - 1932)의 본관은 파평이며, 본명은 윤우의, 호는 매헌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14살 때는 인근 마을의 서당인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공부하며 사서삼경 등 중국고전을 익혔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 부흥 운동을 본격화하며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30년 만주로 망명하던 윤봉길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결국 만주로 탈출해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과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1931년 8월 활동 무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옮겨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한 뒤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해 겨울부터는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도쿄에서 일본 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며 상하이의 정세가 복잡해지자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윤봉길의 거사로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상하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이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수류탄 투척 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이후 1932년 11월 20일 오사카형무소에 수감, 1932년 12월 19일 총살되었다. 윤봉길은 1932년 일본에서 총살된 후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해방 후 유해봉안추진위원회의 주도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여 서울특별시 효창동의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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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영희 묘
길영희(1900 - 1984)는 1919년 3·1운동 때 학생대표로서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후 일경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체포되어 약 8개월여의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출옥 후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당한 그는 교육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923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였다. 1925년에는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에서 역사를 전공한 후 귀국하여 배재와 경신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한편 1938년경부터는 인천에서 농촌계몽운동과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인천중학교 학부형과 학생 대표들의 요청으로 인천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일본인 중학이었던 인천중학교를 민족교육의 도장으로 바꾸는 한편, 1954년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겸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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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사당(충의사)
윤봉길(1908 - 1932)의 본관은 파평이며, 본명은 윤우의, 호는 매헌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열네 살 때는 인근 마을의 서당인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공부하며 사서삼경 등 중국고전을 익혔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 부흥 운동을 본격화하며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30년 만주로 망명하던 윤봉길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결국 만주로 탈출해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과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1931년 8월 활동 무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옮겨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한 뒤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해 겨울부터는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도쿄에서 일본 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며 상하이의 정세가 복잡해지자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윤봉길의 거사로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상하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이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수류탄 투척 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이후 1932년 11월 20일 오사카형무소에 수감, 1932년 12월 19일 총살되었다. 윤봉길은 1932년 일본에서 총살된 후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해방 후 유해봉안추진위원회의 주도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여 서울특별시 효창동의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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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집
윤봉길(1908 - 1932)의 본관은 파평이며, 본명은 윤우의, 호는 매헌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열네 살 때는 인근 마을의 서당인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공부하며 사서삼경 등 중국고전을 익혔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 부흥 운동을 본격화하며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30년 만주로 망명하던 윤봉길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결국 만주로 탈출해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과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1931년 8월 활동 무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옮겨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한 뒤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해 겨울부터는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도쿄에서 일본 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며 상하이의 정세가 복잡해지자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윤봉길의 거사로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상하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이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수류탄 투척 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이후 1932년 11월 20일 오사카형무소에 수감, 1932년 12월 19일 총살되었다. 윤봉길은 1932년 일본에서 총살된 후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해방 후 유해봉안추진위원회의 주도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여 서울특별시 효창동의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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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원 우국기념비
조인원(1875 - 1950)의 호는 야운이며,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 3일 고덕면 대천리 한내장 만세운동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파견원인 이영식(李英植)과 더불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충청도지단을 조직했다. 조인원은 서무부장을 맡아 지단장 서병익(徐丙益), 부단장 김석주(金錫周) 등과 함께 독립운동 관련 문건을 배포하는데 주력했다. 1920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열국이 승인해도 정치적 명령이 국내에서 떨치지 못하는 것은 일제 때문이니, 조선인은 세금을 납부하지 마라. 만약 이에 따르지 않으면 독립군이 국내로 들어올 때 후회할 것이다.”라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명의의 선전물을 예산군 삽교면 역촌리 등에 부착한 일로 체포된 조인원은 1921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조인원은 출감 후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지자 계몽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어 문맹 퇴치에 힘썼다. 1945년 광복이 되어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봉환할 때 동참하였으며, 말년에는 고향에서 살다가 1950년 12월 21일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