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 검색
TOTAL. 4,004 건
-
이규갑 묘
이규갑(1888-1970)의 이칭은 원서, 운호이며, 충남 아산 출신 일제강점기 대한청년단원,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6년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를 졸업하고, 1907년 충청남도 홍주 의병에서 운량관(運糧官)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2월에 평양지역 대표로 상경하여 3·1운동 준비에 참여하였다.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그는 동년 3월 20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13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를 조직하고 평정관(評政官)에 선출되었다. 서울 독립단 본부특파원으로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도착한 이규갑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에 선임되었으며, 4월 19일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1919년 7월에는 의정원의 청원위원(請願委員)이 되었으며, 국채통칙(國債通則) 및 공채발행조례(公債發行條例)를 통과시키는 등 의정원 활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상해한인청년단(上海韓人靑年團)의 서무부장 겸 비서부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지속화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929년 7월 20일에는 신간회 동경지회(東京支會) 집행위원장으로 피선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한 운동에 앞장섰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오충비
오충비(五忠碑,1968년)는 애국지사 이규갑 선생이 어머니 박안라, 형 이규풍 부부, 부인 이애라(앨라), 조카 이민호를 기리기 위해 지은 비석이다. 대한 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해외에 묻혔거나 묘소를 찾을 수 없어 조국의 품에 안기지 못한 가족들의 애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영인면 월선리에 건립되었다. 특히, 이규갑 선생의 어머니, 박안라 여사는 충무공 이순신의 9세손인 이도희와 결혼해 아산에 살면서 이규풍, 이규갑 선생을 길러냈다. 1905년 이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위태로워지자 두 아들들에게 매국노 처단 상소를 올리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두 아들을 모두 의병활동에 참여하게 하여 조국의 독립에 힘쓰도록 하셨다. 이에 따라 장남 이규풍 선생은 연해주에서 안중근 의사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고 차남 이규갑 선생은 홍주의병에 참가하게 된다. 이후 박안라 여사 자신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지만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 곳에서 사망하셨다. 선생의 독립을 위한 교육정신은 집안 대대로 이어져 손자 이민호(李敏浩), 증손자 이길영(李吉永)까지 독립운동가로 장성하게 된다. 충효비는 박안라 여사를 포함하여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규갑 선생 가족들의 행적과 정신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충국순의비
충국순의비는 창의대장 이규풍 선생과 가족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규갑(1888~1970)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그는 동년 3월 20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13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평정관 선출되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의 부인 이애라(李愛羅)는 어린애를 업고 동분서주하다가 아현동에서 일경에게 검문을 당하자 빼앗긴 어린애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몸을 뛰쳐 달아나서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서울 독립단 본부특파원으로 동년 4월 10일 상해에 도착한 그는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에 선임되었으며, 4월 19일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동년 7월에는 의정원의 청원위원(請願委員)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해에는 상해한인청년단의 서무부장 겸 비서부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지속화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929년 7월 20일에는 신간회 동경지회 집행위원장으로 피선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한 운동에 앞장섰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규풍(1865~1932)은 1909년 안중근(安重根)·이범윤(李範允) 등과 함께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의용군을 조직하여 회령과 경원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후 노령으로 후퇴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후 4월 23일에는 서울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평정관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3월에는 길림에서 열리는 민족혁신파 대표자대회에 노령지역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6년 4월에 길림성 영남호텔에서 정의부의 혁명원로인 양기탁(梁起鐸)을 위시하여 고활신(高豁信)·현정경(玄正卿)·곽종대(郭鍾大)등과 천도교 혁신파인 김봉국(金鳳國)·이동락(李東洛)과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송 헌(宋憲) 그리고 노령지역의 대표인 최소수(崔素水)·주진수(朱鎭秀)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다. 그는 고려혁명당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그후 길림성 소수분(小綏芬)에서 다시 노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이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민호(1895~1944)는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황해도 일부 및 전라·충청도를 돌아다니며 청년들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추진, 지휘하고 본부로 돌아오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1922년 가족을 동반하고 노령으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다시 만주로 들어가 신민부 부원으로 활동하던 중, 아버지 이규풍(李奎豊)이 사망하자 북경으로 가서 지하공작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장처명(張處明)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일제의 악독한 고문으로 인해 사경에 이르게 되자 가석방되어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1944년 5월 29일 끝내 별세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애라(1894~1922)는 영명여학교 교감 이규갑(李奎甲)과 결혼 후 공주 영명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17년 평양의 정의여학교에 전근되어 근무하던 중, 3·1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하였다가 평양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남편을 돕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온 그는 한남수(韓南洙)·김사국(金思國)·홍면희(洪冕熹)·이규갑(李奎甲) 등이 비밀히 연락 회합하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국민대회를 소집하는데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어린애를 업고 동부서주하였는데, 아현동(阿峴洞)에서 일 헌병에게 몸수색을 당하게 되자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린애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뛰쳐 달아나는 등 눈물겨운 일화를 남겼다. 이 아기는 애처롭게 사망하였는데 애국부인회에서 장사를 지내었다고 한다. 남편을 쫓아 만주 간도로 건너갔던 그는 국내에 연락차 도문(圖們)을 거쳐 입국하다가 함북 웅기(雄基)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온천리 헌병분견소 터 표지석
헌병분견소란 1910년대부터 일본이 조선인의 저항운동을 탄압할 목적으로 헌병과 경찰을 통합하여 치안을 담당하게 한 제도이다. 즉, 군사경찰이 일반 경찰 사무를 함께 담당함으로써 더 강력한 통치로 조선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각 지역마다 기존에 배치된 일반 경찰서 외에도 순경주재소와 함께 헌병분대⋅헌병분견소⋅헌병파출소 등도 경찰 관서로 기능하였다. 온천리 헌병분견소는 아산군 각지에서 검거된 만세시위 참가자 수백 명을 체포하여 태형을 집행한 곳이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민문화센터 앞에 헌병분견소의 터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건립되어있다.
-
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음봉면 연암산)
1919년 4월 1~2일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1~2일 밤 8시경에 음봉면 산동1리 금마산, 산동3리 용와산, 월랑리 연암산 주민들 다수가 산 정상에 올라가 불을 피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음봉면 동암1리 복지회관 앞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
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음봉면 금마산)
1919년 4월 1~2일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1~2일 밤 8시경에 음봉면 산동1리 금마산, 산동3리 용와산, 월랑리 연암산 주민들 다수가 산 정상에 올라가 불을 피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음봉면 동암1리 복지회관 앞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
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음봉면 용와산)
1919년 4월 1~2일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1~2일 밤 8시경에 음봉면 산동1리 금마산, 산동3리 용와산, 월랑리 연암산 주민들 다수가 산 정상에 올라가 불을 피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음봉면 동암1리 복지회관 앞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
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음봉면 국사봉)
1919년 4월 1~2일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1~2일 밤 8시경에 음봉면 원남리 주민들이 봉화 시위 형태로 만세운동을 전개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음봉면 원남리 257-12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
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읍내동)
1919년 3월 14일 전후로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만세 운동 및 시위가 있었다. 그 중 3월 12일 온양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아산군의 첫 만세운동인 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 시위가 학교 담을 넘어 시장으로 번져나간 형태였다. 당일 오후 2시 30분 온양장터에서 학생 30여명과 주민 20여명이 함께 만세를 외쳤고 진압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3월 14일과 15일에 걸쳐 현창규, 서만수, 권태원, 김치삼 등의 주도하고 1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번져갔다. 이후 아산군 전체에서 다양한 방식의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읍내동에 위 시위 내용을 기록한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
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온양초등학교)
1919년 3월 14일 전후로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만세 운동 및 시위가 있었는데,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현 온양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시위가 아산군의 첫 만세 시위였다. 이 시위는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뛰어나와 만세시위를 하면서 시작되었고, 일본인 교장이 학생들을 설득하면서 일단 해산되었다. 하지만 다음 날 일부 학생들이 온양 장터에서 주민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이어감으로써 아산군 전반에 만세 시위가 번지게 되었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읍내동 온양초등학교 교정 내에 위 시위 내용을 기록한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
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인주면 걸매리)
1919년 4월 1~2일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2일 밤 8시경에 인주면 걸매리 주민들이 안말 갯둑 너머(현재 바다)에서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주민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시위 참여자들은 이 만세운동으로 인해 체포되어 구금되거나 태형이 집행되는 등의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 바닷가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
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탕정면 매곡리)
1919년 4월 1일을 전후로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3월 31일 밤 8시경 탕정면, 염치면, 배방면 등에 있는 산 정상에서 횃불을 올리고 2,500여 명의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탕정면 매곡리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