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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일 묘
곽한일(1896-1936)의 자는 원우, 호는 장암이며, 대한제국기 때 민종식 의진에서 돌격장, 소모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1896년 안성방면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군과 진위대가 합세하여 공격해옴으로써 아산·예산·청양 등지로 잠행하며 동지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06년 봄에는 홍산(鴻山)·보령지방에서 민종식(閔宗植)을 중심으로 한 홍주의병에 가담하여 돌격장·소모장(召募將)으로 홍주성 공격에 크게 활약하였다. 홍주성이 일본군에 함락되자, 이용규(李容珪)·박윤식(朴潤植)·김덕진(金德鎭) 등과 활동 중 일진회의 밀고로 붙잡혀, 1907년 7월 종신유배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투옥된 뒤 다시 전라남도 지도에 유배되었다가 1912년에 풀려났다. 이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 모금에 힘쓰다가 1914년에 붙잡혀 다시 유배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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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일 송덕비
곽한일(1896-1936)의 자는 원우, 호는 장암이며, 대한제국기 때 민종식 의진에서 돌격장, 소모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1896년 안성방면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군과 진위대가 합세하여 공격해옴으로써 아산·예산·청양 등지로 잠행하며 동지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06년 봄에는 홍산(鴻山)·보령지방에서 민종식(閔宗植)을 중심으로 한 홍주의병에 가담하여 돌격장·소모장(召募將)으로 홍주성 공격에 크게 활약하였다. 홍주성이 일본군에 함락되자, 이용규(李容珪)·박윤식(朴潤植)·김덕진(金德鎭) 등과 활동 중 일진회의 밀고로 붙잡혀, 1907년 7월 종신유배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투옥된 뒤 다시 전라남도 지도에 유배되었다가 1912년에 풀려났다. 이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 모금에 힘쓰다가 1914년에 붙잡혀 다시 유배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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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규 순절의 땅 기념비
이남규(1855-1907)의 자는 원팔, 호는 수당이며, 1855년 11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향리는 예산이다. 1875년 과거 합격 이후 관직 생활을 하다 을미사변 이후 향리인 예산으로 내려와 왜적을 물리칠 것과 척신(戚臣)의 머리를 베라는 상소문을 올리며 반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민종식 의병장의 홍주의진 선봉장에 임명되었으나 홍주성에 가지는 않았다. 이후 홍주의진이 크게 패하자 민종식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의병 활동을 이어나가기 위한 거사를 준비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1907년 8월 19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된 일은 당하지 않으리라."라고 외치며 압송되었는데, 일본군이 통역관을 통해 일본의 고위 관직을 제시하며 회유를 하였지만, 처음했던 다짐처럼 단호히 거부하였고, 맏아들 이충구와 가마꾼 김응길과 함께 일본군 칼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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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읍내리 만세시위현장2)
1919년 4월 1~2일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만세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만세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만세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1~2일 밤 8시경에 읍내리, 오목리 등 신창면 주민들 다수가 만세를 부르며 학성산으로 올라갔고 산 정상에서 박진화, 이덕균, 정윤흥, 김양순, 강달성 등은 약 200명의 군중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310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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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읍내리 만세시위현장)
1919년 4월 1~2일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만세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만세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만세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1~2일 밤 8시경에 읍내리, 오목리 등 신창면 주민들 다수가 만세를 부르며 학성산으로 올라갔고 박진화, 이덕균, 정윤흥, 김양순, 강달성 등은 약 200명의 군중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357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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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리 봉화만세시위 현장 표지석
1919년 4월 1~2일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1~2일 밤 8시경에 읍내리, 오목리 등 신창면 주민들 다수가 만세를 부르며 학성산으로 올라갔고 산 정상에서 불을 피우고 박진화, 이덕균, 정윤흥, 김양순, 강달성 등은 약 200명의 군중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신창면 황산리 326-10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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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린 묘
진수린(1898-1930)은 충남 아산시 신창면 신달리 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이며, 1922년경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로부터 군자금 모집을 위해 입국한 사촌 처남 최익수(崔益秀)의 임무를 도왔다. 자신이 근무하던 아산금융조합의 공금을 빼내어 최익수·이종락(李鍾洛)과 함께 중국 상해로 도항하였으며, 그 공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헌납한 후 임시정부의 재산계 서기로 임명되어 광동(廣東)·무창(武昌)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27년 11월 상해 한인독립청년회 등을 중심으로 북경, 광둥, 무창 등 중국 각지의 한인독립청년회 대표가 모여 각 청년회를 통합, 비밀결사체인 재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을 창립할 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무를 가지고 비밀리에 귀국하여 고향인 아산 신창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0년 8월 병을 얻어 가석방된 뒤, 1930년 9월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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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중방리)
1919년 4월 1일부터 2일 까지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1~2일 밤 8시경에 읍내리, 오목리 등 신창면 주민들 다수가 만세를 부르며 학성산으로 올라갔고 산 정상에서 불을 피우고 박진화, 이덕균, 정윤흥, 김양순, 강달성 등은 약 200명의 군중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염치읍 중방리 38-2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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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리 봉화만세시위 현장 표지석
1919년 4월 1~2일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2일 오후 8시에 주민 다수가 영인산에서 봉화시위를 시작했으며, 이를 계기로 상성리 뒷산 대흥당, 신운리 뒷산 형제봉, 백석포 뒷산 및 성내리 뒷산에서도 횃불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영인면 성내리 769-1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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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운리 봉화만세시위 현장 표지석
1919년 4월 1~2일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2일 밤 8시경에 영인면 신운리 주민들이 뒷산 형제봉에서 봉화시위를 시작했다. 이 봉화시위의 시작은 영인산 봉화시위이며, 신운리 뒷산 형제봉을 포함하여 상성리 뒷산 대흥당과 백석포 뒷산 및 성내리 뒷산에서도 봉화시위가 전개되었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영인면 신운리 288-7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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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영인초등학교)
1919년 3월 14일 이후로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만세 운동 및 시위가 있었다. 그 중 4월 3일 영인공립보통학교(현 영인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한 운동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에 따르면, 아산공립보통학교 학생 이세영과 김일수 등 학생 수십 명이 아산리 시장 장날을 기해 학교 교정에서 궐기한 후 장꾼이 모인 학다리까지 만세 행진을 했다고 한다. 주동자였던 이세영과 김일수는 붙잡힌 후 비교적 어린 학생인 이유로 시장거리의 청소와 노역을 했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붙잡혀 태형이 집행되는 등 엄벌에 처해졌다고 한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영인초등학교 교정에 위 시위 내용을 기록한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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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영인면 아산리)
1919년 3월 14일 이후로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만세 운동 및 시위가 있었다.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온양 시장을 거쳐 아산 시장에서 3월 14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오후 1시경 약 15명이 태극기를 들고 아산리 아산시장에 나타나 지역민들에게 독립 만세를 함께 부르자고 하였다. 일단 주동자가 체포되어 진정되었는데 저녁 6시에 이르러 약 100명이 읍 밖에서 집합하였다가 읍내로 들어오려 해 온천리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에서 헌병 7명이 급히 출동하였고 주동자 9명을 체포하고 해산시켰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442-1 버스정류장 뒤쪽에 위 시위 내용을 기록한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