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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포리 봉화만세시위 현장 표지석
둔포리 봉화만세시위현장 표지석은 충남 아산에 위치해있으며, 1919년 4월 2일과 3일 밤 8시 둔포리 주민들이 이곳 바닷가에서 봉화만세시위 전개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표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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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용리 봉화만세시위 현장 표지석
운용리 봉화만세시위현장 표지석은 충남 아산에 위치해있으며, 1919년 4월 1일과 밤 8시 둔포 운용리 주민들이 차돌백이산 위에서 봉화만세 시위 전개했으며, 은근 지역 광혈 20여개 파괴했던 현장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표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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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항일민족운동자료 전시관
아산항일민족운동자료전시관은 충남 아산에 위치해있으며, 선장면의 4.4독립운동를 포함한 아산시 항일운동의 체계적인 기록 보존과 미래세대 교육에 활용하기 위하여 조성된 전시관이다. 아산 3.1운동 학술조사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의 스토리텔링을 구성하고 각 지역별 항일운동 전개과정과 항일운동 자료 등을 전시하고,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포토존 및 체험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전개과정 및 특징, 만세운동 전개지역, 참여자명부, 주요인물에 대한 소개, 신문 보도자료와 판결문 등 이미지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 아산 3.1운동 역사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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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길 집
정수길(1895-1979)의 이명은 정규희, 자는 수길, 호는 규암이다. 아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에 영향을 받았다.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시작한 이후로 4월 4일까지 전개되었다. 가장 치열했던 만세운동은 선장면 선장장터 만세운동인데, 1919년 4월 4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4.4만세운동이라고 불린다. 200여명이 참여했으며, 정수길은 임천근(林千根)·서몽조(徐夢祚)·오상근(吳相根)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4 만세운동의 진행 과정은 정수길이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과 4월 4일 장날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고, 약 200명의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주재소로 이동하여 돌을 던지며 시위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헌병들이 총을 쏘아 진압을 하여, 최병수 열사가 총에 맞아 목숨을 잃고, 이후 114명이 체포되며 해산하였다. 정수길도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히 독립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징역 2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수길은 선장 4.4만세운동뿐만 아니라 1926년에 일어난 6.10만세운동, 1938년에 일어난 천도교 멸왜기도운동에 참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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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길 묘
정수길(1895-1979)의 이명은 정규희, 자는 수길, 호는 규암이다. 아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에 영향을 받았다.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시작한 이후로 4월 4일까지 전개되었다. 가장 치열했던 만세운동은 선장면 선장장터 만세운동인데, 1919년 4월 4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4.4만세운동이라고 불린다. 200여명이 참여했으며, 정수길은 임천근(林千根)·서몽조(徐夢祚)·오상근(吳相根)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4 만세운동의 진행 과정은 정수길이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과 4월 4일 장날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고, 약 200명의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주재소로 이동하여 돌을 던지며 시위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헌병들이 총을 쏘아 진압을 하여, 최병수 열사가 총에 맞아 목숨을 잃고, 이후 114명이 체포되며 해산하였다. 정수길도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히 독립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징역 2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수길은 선장 4.4만세운동뿐만 아니라 1926년에 일어난 6.10만세운동, 1938년에 일어난 천도교 멸왜기도운동에 참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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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수 순절지
최병수(1876-1919)가 참여한 아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에 영향을 받았다.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시작한 이후로 4월 4일까지 전개되었다. 가장 치열했던 만세운동은 선장면 선장장터 만세운동인데, 1919년 4월 4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4.4만세운동이라고 불리며, 200여명이 참여했다. 4.4 만세운동의 진행 과정은 정수길이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과 4월 4일 장날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고, 약 200명의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주재소로 이동하여 돌을 던지며 시위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헌병들이 총을 쏘아 진압을 하였는데. 200 여명의 만세 시위군중 앞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던 최병수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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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 무인멸왜운동 기념탑
기미독립 무인멸왜운동 기념탑은 1930년대 후반 천도교 구파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1938년(무인년) 일제가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탄압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운동인 멸왜기도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2005년 8월 15일에 세워진 탑이다. 1934년 8월, 제 4대 천도교 교주 박인호가 멸왜기도와 독립운동을 하라고 밀령을 내렸다. 이후 1938년 일어난 무인멸왜운동은 선장, 온양, 신창, 둔포 지역의 천도교 지도자들이 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7~13일간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건이다.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기도문을 매일 아침, 저녁 식사시간에 외치도록 하고 유사시에 대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던 운동이다. 최제우의 안심가를 변형하여 기도문을 만들었으며, "개 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간에 소멸하여" 라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천도교 교인들의 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기도문을 암송하게 했으며, 기도 운동의 확대를 위하여 모금운동을 했다는 것은 아산 지역 독립운동이 계속해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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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 4.4 독립만세운동 기념상
선장 4.4 독립만세운동 기념상은 아산시 4.4만세운동 기념공원 내에 위치하는데, 기념 동상과 함께 4.4만세운동의 전개과정을 알 수 있는 비석과 그 당시 4.4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공훈을 적어놓은 비석도 함께 있다. 아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에 영향을 받았고,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시작한 이후로 4월 4일까지 전개되었다. 이중 가장 치열했던 만세운동이 4.4 아산독립만세운동인데, 1919년 4월 4일 정수길이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과 장날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고, 선장면의 부두 노동자를 겸한 반농반노의 주민들이 선장 장날 군덕리 시장에서 200여 명이 시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천봉이 군중들의 선두에 서고 정수길 등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군중들을 이끌고 선장헌병주재소로 이동했으며, 군중들은 주재소 구내로 진입하여 창문, 유리 등을 파괴했다. 이후 주재소 헌병들이 온양에서 출동한 보병 80연대 상등병 이하 7명의 지원을 받아 총기를 발포하여 1명이 순국, 114명이 체포된 항일 독립운동이다. 4.4 아산독립만세운동이 선장면에서 일어난 이유는 포구(배가 드나드는 항구)가 발달하여 주변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고, 인천과의 연결된 뱃길을 통해서 많은 물자가 들어왔으며, 장날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아산시는 선장면(선장시장)의 역사성 및 상징성을 반영하여 지역 특화장소로 선정하였으며, 4.4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확대 발전시켜 즐길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하고 주민 공동체 의식 함양을 도모하기 위하여 해당 공간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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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시장 만세시위 현장 표지석
"아산 3.1운동 사적지 선장시장 만세시위 현장 1919년 4월 4일 선장 장날 선장면 주민들이 대대적인 만세시위 전개" 라는 안내석이 세워져 있으며, 4.4 독립만세운동 상징공간으로써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아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에 영향을 받았고,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시작한 이후로 4월 4일까지 전개되었다. 이중 가장 치열했던 만세운동이 4.4 아산독립만세운동인데, 1919년 4월 4일 정수길이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과 장날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고, 선장면의 부두 노동자를 겸한 반농반노의 주민들이 선장 장날 군덕리 시장에서 200여 명이 시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천봉이 군중들의 선두에 서고 정수길 등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군중들을 이끌고 선장헌병주재소로 이동했으며, 군중들은 주재소 구내로 진입하여 창문, 유리 등을 파괴했다. 이후 주재소 헌병들이 온양에서 출동한 보병 80연대 상등병 이하 7명의 지원을 받아 총기를 발포하여 1명이 순국, 114명이 체포된 항일 독립운동이다. 4.4 아산독립만세운동이 선장면에서 일어난 이유는 포구(배가 드나드는 항구)가 발달하여 주변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고, 인천과의 연결된 뱃길을 통해서 많은 물자가 들어왔으며, 장날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아산시는 선장면(선장시장)의 역사성 및 상징성을 반영하여 지역 특화장소로 선정하였으며, 4.4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확대 발전시켜 즐길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하고 주민 공동체 의식 함양을 도모하기 위하여 해당 공간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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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시 선장면 독립운동가 마을길
아산시 선장면 독립운동가 마을길 표지판은 아산시 4.4만세운동 기념공원 내에 위치하는데, 안내판에는 독립운동가 묘소와 집터, 만세 시위 진행지, 기념시설 등에 관련한 정보가 적혀있다. 아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에 영향을 받았고,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시작한 이후로 4월 4일까지 전개되었다. 이중 가장 치열했던 만세운동이 4.4 아산독립만세운동인데, 1919년 4월 4일 정수길이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과 장날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고, 선장면의 부두 노동자를 겸한 반농반노의 주민들이 선장 장날 군덕리 시장에서 200여 명이 시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천봉이 군중들의 선두에 서고 정수길 등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군중들을 이끌고 선장헌병주재소로 이동했으며, 군중들은 주재소 구내로 진입하여 창문, 유리 등을 파괴했다. 이후 주재소 헌병들이 온양에서 출동한 보병 80연대 상등병 이하 7명의 지원을 받아 총기를 발포하여 1명이 순국, 114명이 체포된 항일 독립운동이다. 4.4 아산독립만세운동이 선장면에서 일어난 이유는 포구(배가 드나드는 항구)가 발달하여 주변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고, 인천과의 연결된 뱃길을 통해서 많은 물자가 들어왔으며, 장날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아산시는 선장면(선장시장)의 역사성 및 상징성을 반영하여 지역 특화장소로 선정하였으며, 4.4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확대 발전시켜 즐길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하고 주민 공동체 의식 함양을 도모하기 위하여 해당 공간을 조성하였다. 4.4만세운동기념공원에는 기념상뿐만 아니라 기미년 선장 4.4 독립만세운동사 기념비, 독립 유공자의 공훈내역을 담은 부조, 유형을 받은 참여자 명단 등이 함께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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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독립만세길
선장독립만세길 안내판은 선장포 노을공원 근처에 위치하는데, 안내판에는 4.4아산독립만세운동사와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에 대한 정보, 그리고 4.4아산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한 사적들이 지도 위에 표시되어있다. 아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에 영향을 받았고,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시작한 이후로 4월 4일까지 전개되었다. 이중 가장 치열했던 만세운동이 4.4 아산독립만세운동인데, 1919년 4월 4일 정수길이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과 장날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고, 선장면의 부두 노동자를 겸한 반농반노의 주민들이 선장 장날 군덕리 시장에서 200여 명이 시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천봉이 군중들의 선두에 서고 정수길 등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군중들을 이끌고 선장헌병주재소로 이동했으며, 군중들은 주재소 구내로 진입하여 창문, 유리 등을 파괴했다. 이후 주재소 헌병들이 온양에서 출동한 보병 80연대 상등병 이하 7명의 지원을 받아 총기를 발포하여 1명이 순국, 114명이 체포된 항일 독립운동이다. 4.4 아산독립만세운동이 선장면에서 일어난 이유는 포구(배가 드나드는 항구)가 발달하여 주변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고, 인천과의 연결된 뱃길을 통해서 많은 물자가 들어왔으며, 장날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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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신창현 기포현장 표지석
동학농민혁명 신창현 기포석이 들어선 선장 노을포 공원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신창현에 속한 선장포구와 장터였으며, 보국안민의 기치로 봉건체제 타파와 일제 침략으로부터 국권수호를 위해 동학농민군이 기포(봉기)한 곳이다. 아산의 동학혁명은 음력 10월 5일 아산관아를 점령하고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 동학농민군 접주(지도자)는 곽완, 김경삼, 이신교, 정태영 등으로 이후 정태영 아들 정수길(규희)은 1919년 3.1운동 때 선장 장터에서 4.4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894년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전국 120여개 군현에서 봉기, 조선 관군과 지배층의 군사력에 비해 압도적이었으나 조정이 청에 원병요청을 했다가 일본에 장악된 후 친일내각으로 인해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특히 아산은 백석포에 진주한 일본군이 청을 격파하고 그 위세를 더해 직접적인 고통을 가해오자 반외세(反外勢), 척왜(斥倭)의 분위기가 크게 불타올라 동학농민군이 9월 초부터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2차 기포를 시작했을 때, 아산지역 백성들도 함께 봉기했다. 아산지역의 동학농민군은 당시(음력 10월 5일) 아산현을 혁파하는 등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처절히 싸웠으나, 결국 일본군에 장악된 조선 친일내각과 일본군에 의해 엄청난 희생을 당하고, 혁명은 좌절됐다. 하지만 그 정신은 3.1운동과 항일투쟁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