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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정 추모비
김상정 선생은 서산 사람으로,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유거하던 광무 황제가 갑자기 훙거한 소식을 듣고 발상문을 작성하여 면사무소 게시판에 게시하고 훈자서 발상하였다. 동년 3월 23일 서산군 해미면에서 3.1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일경들이 민심을 회유한다는 명목으로 면민대회를 개회하였을 때 면민들에게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환기시키고 "불납세(不納稅)는 물론 왜왕의 명령을 맹세코 복종할 수 없다" 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작성하여 조선 총독에게 발송하였다. 동년 9월 12일에는 면서기가 왜경을 대동하여 소위 호세고지서(戶稅告知書)를 배부하자 "왜왕 대정(大正)은 한국과는 대대로 원수라 죽어서라도 원수를 갚겠다" 하고 중지 2절을 칼로 끊어 혈서를 써서 조선총독에게 발송하였다. 1921년 9월 12일에는 혹심한 전매령에 항거하여 담배를 재배케 하고 '대한유민(大韓遺民) 김상정 종불굴초(種不屈草)'라는 표시를 만들어 세웠는데, 왜경이 벌채를 명하자 손칼로 좌측 귀를 자르고 더러운 소리를 듣지 않겠다며 혈서로 자신의 의지를 나타냈다. 1937년 2월에는 삭발을 하지 않고 상복을 벗지 않음은 사상이 불온하다고 청양주재소에서 무참히 구타당하여 척추절상으로 종신까지 허리를 쓰지 못하였다. 1946년 1월 1일에는 광복으로 환국한 임시정부는 혈서철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아 김구 주석 명의의 특행 찬양문을 보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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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생 추모비
이원생 선생은 충청남도 서산(瑞山) 사람이다. 1908년 보성(普成)전문학교 강사로 근무하였으며, 1912년에는 경성신문사 이사 및 조선경제회 이사를 역임하였다고 한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동년 4월에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조국광복운동에 참여하였다. 동년 5월에는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구급의연금 모집위원으로 선출되어 신 정(申檉)·오익표(吳翼杓) 등과 함께 충청도대표로 군자금모집에 전념하였다. 이에 그는 다시 국내에 파견되어 서정섭(徐廷燮)과 함께 충청도 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 중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21년 2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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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철 기념비
서병철 선생은 충남 서산 출신이다. 1918년 4월 무렵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서산군(瑞山郡) 일대의 유지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운동자금을 모집했다. 3.1운동 때는 서산만세운동에 가담했고, 같은 해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일원으로 가입했다. 1920년 5월 서울 종로구(鍾路區) 인의동(仁義洞)에 있는 전기봉(全基奉)의 집에서 김상옥(金相玉) 김동부(金東浮) 등과 암살단을 조직, 친일분자를 없애고자 하였다. 같은 해 10월 독립단 서산지단사건으로 붙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1921년 10월 암살단사건으로 붙잡혀 1922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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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헌태 독립투사비
정헌태 선생은 충남 서산 출신이다. 정헌태는 경성제일고보(京城第一高普)를 다니던 중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북간도(北間島) 지린성[吉林省] 연길(延吉)로 망명하였다. 동년 음력 11월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간도전위대 소속 모연대장 이제안(李濟安)의 지휘 아래 북간도 지방에서 독립운동자금 및 동지규합을 위해 잠시 활동하다가, 국내로 돌아와 개성의 광진학교(廣進學校)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26년 3월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의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사회과에 다녔다. 일본 유학 중 그는 동년 6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조선유학생연합웅변회(朝鮮留學生聯合雄辯會)에 참가하여 한국인의 해방을 호소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7년 5월 신간회(新幹會) 동경지회(東京支會)가 세워질 때 간사를 맡아 활동하다가 일본대학 3학년을 중퇴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귀국 후 동년 12월 신간회 경성지회의 조직부 상무간사 등에 선임되어 각 지회 주최의 강연회에 연사로 참가하여 민지계발에 힘썼다.그는 1928년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자 이를 재건하기 위해 이준열(李駿烈) 등과 함께 1929년 1월 조선공산당 잠정 조직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동년 3월 당의 잠정조직을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로 개칭하고 야체이카·고려공산청년회·조선피압박동맹회 등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이때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조직부 임무를 맡았다. 그는 동지 포섭에 힘을 쏟아 민병회(閔丙會)를 비롯하여 고학당 출신 정관진(丁寬鎭)·김태래(金泰來)·김성기(金成琦)·박치우(朴治宇)·전진한(錢鎭漢) 등을 입회시키고 동년 3월 하순 고려공산청년회의 부서를 정하였다. 또한 그는 이준열 등과 함께 1929년 3월 고학당 내에 조직한 조선학생혁명당(朝鮮學生革命黨)을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 기반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학생전위동맹은 고려공산청년회 행동 조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서울지역 각 학교에 독서회를 설치하며 학생운동을 통할 지도하는 조직체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안상훈(安相勳) 등과 함께 열성자대회(熱誠者大會)를 추진하던 중 1929년 6월 당재조직준비위원회와 산하 고려공산청년회가 발각되면서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2년 7월 대전형무소로 이감 도중 ‘조선민족 독립만세’ 등을 외친 혐의로 징역 8월이 가형되어 7년 8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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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철 구 묘
서병철 선생은 충남 서산(瑞山) 사람이다. 1919년 비밀결사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고 이종성(李鍾聲)으로 하여금 임정호(林楨鎬)·이종헌(李鍾憲)·가재창(賈在昌)·오몽근(吳夢根)과 함께 서산 안면면(安眠面)에 동단의 지부로 독립지단(獨立支團, 일명 決死團)을 조직하게 하였다. 동년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단원 권인채(權仁采)와 서울에서 만나 향후 활동계획을 논의하였으며 임정호는 권인채에게 보내 상해 임시정부(臨時政府)로 파견하는 등 임시정부 지원활동을 폈다. 또한 1919년 12월 서울에서 권인채·임정호·이종성·가재창 등에게 모의장소와 자금을 제공하며 활동을 도왔다. 1920년 5월에는 김상옥(金相玉)·윤익중(尹益重) 등과 함께 암살단(暗殺團)을 조직하고 일제고관과 친일분자를 처단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군자금을 수합하여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를 지원할 것을 계획하였다. 또한 무장투쟁을 위해 국내에 잠입한 한 훈(韓焄) 등과 합류하여 1920년 8월 미국의원단(美國議員團)의 방한에 맞추어 총독 등 일제고관을 처단하여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거사를 준비하던 중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일경에 피체되어 1921년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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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만세터 표지석(해미면)
1919년 서산지역 해미면에서 있었던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표지석이다. 해미면의 만세운동은 총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1차 시위는 3월 19일 남상철의 주도 아래 전개하였는데, 주도자인 남상철이 일경에 체포되어 구속 되면서 해산되었다. 제2차 만세운동은 3월 24일 일어났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해미면사무소 서기인 이계성과 김관용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계성(1900~1976, 본관: 함평)은 1918년 7월 해미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해미면사무소 서기로 채용되어 근무하였다. 그는 해미에 거주하는 천주교도 한병선과 서울에서 온 신부로부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입수하고 이를 숙직실에서 다량 제작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24일 해미공립보통학교의 졸업생 고별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는 이날 해미보통학교 졸업생인 김관용(1900년생)을 집으로 찾아가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계성은 김관용을 설득한 후에 유세근의 집에 가서 유세근과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만세운동의 계획을 설명하였으며, 기독교도인 김병선을 만나 기독교도의 참가를 권유하는 등 해미면 만세운동 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김관용(1900~1975, 호: 西河)은 해미면 동암리 출신이다. 그는 3월 24일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20년 출옥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고자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유리한 승려생활을 하면서 법회강연, 대담 등을 통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이명학은 해미면 대곡리 출신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한 일로 체포되어 서산경찰서에서 구치되었다. 그는 4월 23일 서산경찰서에서 태형 90도를 선고 받고 체형을 당하였다. 이들 3명 이외에도 서산경찰서에서 구금되었던 김연택과 유세근은 4월21일 태형 90도를 맞고 풀려났으며, 김원제는 4월 23일 태형 90도를 당하고 풀려났다. 서산 지방 만세운동은 유학자와 학생들이 주도한 곳이 많았으며 일본 경찰과 헌병 및 군 수비대에 의해 강력 진압되어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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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돈 충절전망비
천주교 해미 순교 성지는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274-10 여숫골에 위치하며, 천주교 박해 관련 사료와 사적이 위치한다. 또한 이 곳에는 다양한 종류의 비석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증군무참의김공병돈충절전망비(贈軍務參議金公秉暾忠節戰亡碑) 또한 이 곳에 있다. 증군무참의김공병돈충절전망비는, 서산과 해미 일원에서 동학 농민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전사한 군관 김병돈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증 군무참의(贈軍務參議)란 전사 이후 조정에서 군무참의를 추증했다는 의미이다. 그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초토사였던 홍주 목사 이승우를 따라 종군했는데 1894년 10월 24일 전투 중 전사했으며 이 비석은 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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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3.1운동기념탑
1919년 3월 29일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장날에 큰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 날 기독교도 송기면 등은 오후 1시경 준비한 7천여 매의 태극기를 모여든 군중에게 나누어 주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선창하니 수백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누볐다. 이에 경찰은 만세시위를 주동한 송기면, 고시상 등 6명을 체포하자 이에 격분한 2천여 군중이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만세 행렬을 한산으로 돌려 시위 하던 중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14명의 의사(조남명선생, 송기면선생, 송여직선생, 임학규선생, 이근호선생, 나상준선생, 유성렬선생, 김인두선생, 이승달선생, 박재엽선생, 정일창선생, 고시상선생, 이동홍선생, 양재여선생)가 투옥되고, 수많은 양민이 태형을 당하였다. 1987년 서천 3·1운동기념비 건립위원회, 동아일보사가 그 날의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얼을 후세에 기리고 국민의 애국심 함양을 위한 산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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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광장 표지석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장터에서는 1919년 3월 29일 송기면의 주도 하에 유성렬·이근호·임학규 등이 시장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송기면은 3월 23일부터 동지를 규합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의 준비 끝에 29일 마산 신장리 장터에서 노형래·하중호·유일동 등과 함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주동 인사 송기면·유성렬·송여직 등을 체포하여 연행하였다. 그러자 격분한 2천여 군중이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한산면을 경유하여 서천으로 가기 위해 행진하던 중, 주민 피해를 우려한 서천군수의 자제요청을 받아들여 자진해서 해산하였다.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군중들은 2, 000여 명에 이르렀고, 군중들은 고시상·양재흥·박재엽 등의 주도로 출장소를 파괴하고, 체포된 인사들을 구출하였다. 이 만세시위로 송기면 등 14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1년 3월에서 5년의 옥고를 겪었다. 신장리의 만세운동은 서천지방에서는 가장 큰 3·1만세운동이었다. 이곳에서 서천군의 대표적인 3.1 독립만세운동이 힘차게 일어났던 그 날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얼을 후세에 기리며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하여 2021년 새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광장을 조성하고 기념비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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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전 흉상
김인전 목사는 충청남도 서천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가산을 정리하여 교육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한영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4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전주 서문교회 제 2대 담임목사로 1914-1919년까지 사역하였다. 1914년 독립운동 비밀결사회인 송죽형제회를 조직하고 1919년 3.1만세운동의 전라북도 지도자로 만세운동에 관여하였으며, 1920년 인성학교 교장으로 교육현장에서 직접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뽑히고, 재무예산위원·정무조사특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비서국장 겸 임시공채관리국장에 임명되고, 1921년 안창호 등과 함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조직하였다. 1922년 임시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제4대 의장에 뽑혔다. 같은 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다. 1923년 5월 과로로 순직하였다. 이후 상하이 만국공묘에 묻혔다가, 1993년 8월 유해가 환국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80년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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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풍 묘
이기풍 선생은 황해도 벽성(碧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0일 진학철(陳學哲) 등과 함께, 사리원(沙里院) 장날을 이용하여 서종면 단장리(西鍾面丹墻里)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1916년 이래 서울과 평양간의 독립운동·지하조직 연락책으로서 활약하며, 벽성군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여 왔다. 1919년 3월 1일 이래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사인면 만화리(舍人面萬和里) 교회의 신도인 박기영(朴基永)과 연락하며,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제반준비를 마쳐놓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3월 10일 오전 9시, 그는 서종면 단장리에서 그곳 기독교인과 인근의 사리원장에 가는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2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사리원에서 급히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1년 6월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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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집
김갑수(金甲洙)는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5년 월남 이상재(李商在)와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남양(南陽)대학에 다니면서 여운형(呂運亨)·서병호(徐炳浩)·조동호(趙東祜)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여운형이 이끄는 전 중국대학 축구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필리핀에 원정을 가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상해의 재해외(在海外) 조선인유학생회를 주도하였다. 1918년 애국동지들을 규합하고자 국내에 진입하였으나 군산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다가 한국인 간수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상해로 갔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 당시 그는 임시정부 발행채권을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전북 임피(任陂)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노력하였다. 그 후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선으로 독일 베를린에 유학 중 베를린 고려학우회(高麗學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이상재의 권유로 배재학교 교감으로 7개월간 근무하였으나, 일경의 탄압으로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건너가 동흥(東興)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7년 다시 귀국한 그는 민족 자본의 육성을 위해 전북 완주 봉동에서 윤건중(尹建重)이 설립한 봉우산업조합에 참여하여 이사로 활동하다가 1938년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