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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홍산면 조현리)
독립운동가 조병철은 1931년 고향인 부여군 홍산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야학을 개설하고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1933년 7월 항일농민운동에 힘쓰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피체된 지 3년만인 1936년 6월 예심에 회부되어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조병순은 1931년 고향인 부여군 홍산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야학을 개설하고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1933년 10월 7일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1935년 3월 1일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옥중 여독으로 동년 4월 9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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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탑
서산의 독립운동은 한말 의병운동에서 시작됐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이후 재봉기한 창의대장 민종식의 홍주의병과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봉기한 정주원 의병에 적지 않은 수의 서산 출신의병들이 참여했다. 이후 서산지역의 독립운동은 이철영, 김상정과 같이 직접 몸으로 항거하는 의협투쟁과 국채보상운동,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졌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3.1운동,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의열 투쟁에 나선 독립단 서산지단원 서병철, 조선민족대동단 소속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음암면 유계리 출신의 김용환, 의친왕을 수행하고 상해 임시정부로 향했던 한기동 등과 같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는 국외 독립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항일투쟁으로 전개됐다. 전국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도 서산출신 학생들은 빠지지 않았다. 운산면 출신 유흥수 선생은 대구사범학생 시절 항일학생단체인 다혁당을 결성해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다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지난 2021년 서산지역 독립운동가 발굴 용역에서 542명이 새롭게 발굴되면서 서산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해 다시 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타지역과 비교에서 월등이 많은 숫자의 독립운동가들이 나왔다. 조사는 문헌조사와 일제강점기 당시의 형행기록조사, 관련 주민들의 구술채록을 통해 진행됐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의병 9명, 계몽운동 278명, 3.1운동 112명, 국내항일 82명, 독립운동 지원 1명, 만주방면 2명, 문화운동 11명, 중국방면 1명, 청년운동 42명, 학생운동 3명, 기타 1명이다. 이를 보면 이름 없는, 밝혀지지 않은 독립운동에 나섰던 수많은 서산 주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난지도에서 최구현 의병과 함께 일본수비대에 항전했던 김태순 의병, 광주학생운동 연합시위 참여를 권유하고 경성역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김병묵 학생, 비밀결사단체 독서회, 적우회 등 적색일반사용인조합 조직해 항일운동에 나선 17세의 민태규, 1929년 광주학생운동 참가, 1934년 신건설사건(제2차 카프검거사건) 주동자로 활동했던 윤붕원 등 일부는 총을 들고, 일부는 대한독립청년단 활동으로, 계몽운동으로, 국채보상운동과 군자금 모집으로, 또 학생은 학생운동으로, 그리고 일반 주민들은 3.1만세시위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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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하 기념비
이봉하 선생은 1919년 4월 8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 보현산 위에서 나상윤·황군성 등과 함께 동리 주민 50여 명을 주도하여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일로 인해 이봉하는 체포되어 1919년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득선생은 1919년 4월 8일 서산군 성연면 갈현리 거주 김옥제는 같은 마을 이종옥 집에서 남명숙 외 수 명에게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김옥제의 권유를 받은 갈현리 주민들은 함께 성왕산 위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붙잡힌 김정득은 1919년 4월 12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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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득 추념비
김정득 선생은 충남 서산군(瑞山郡)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19년 4월 8일 서산군 성연면(聖淵面) 갈현리(葛峴里) 거주 김옥제(金玉濟)는 같은 마을 이종옥(李種玉) 집에서 남명숙(南明淑) 외 수 명에게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김옥제의 권유를 받은 갈현리 주민들은 함께 성왕산(聖旺山) 위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붙잡힌 김정득 선생은 1919년 4월 12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 3월 1일 삼일절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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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정 집
김상정 선생은 충남 서산(瑞山) 사람이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유거하던 광무황제가 갑자기 훙거한 소식을 듣고 발상문을 작성하여 면사무소 게시판에 게시하고 훈자서 발상하였다. 동년 3월 23일 서산군 해미면에서 3.1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경들이 민심을 회유한다는 명목으로 면민대회를 개회하였을 때 면민들에게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환기시키고 "불납세(不納稅)는 물론 왜왕의 명령을 맹세코 복종할 수 없다" 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작성하여 조선총독에게 발송하였다. 동년 9월 12일에는 면서기가 왜경을 대동하여 소위 호세고지서(戶稅告知書)를 배부하자 "왜왕 대정(大正)은 한국과는 대대로 원수라 죽어서라도 원수를 갚겠다" 하고 중지 2절을 칼로 끊어 혈서를 써서 조선총독에게 발송하였다. 1921년 9월 12일에는 혹심한 전매령에 항거하여 담배를 재배케 하고 '대한유민(大韓遺民) 김상정 종불굴초(種不屈草)'라는 표시를 만들어 세웠는데, 왜경이 벌채를 명하자 손칼로 좌측 귀를 자르고 더러운 소리를 듣지 않겠다며 혈서로 자신의 의지를 나타냈다. 1937년 2월에는 삭발을 하지 않고 상복을 벗지 않음은 사상이 불온하다고 청양주재소에서 무참히 구타당하여 척추절상으로 종신까지 허리를 쓰지 못하였다. 1946년 1월 1일에는 광복으로 환국한 임시정부는 혈서철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아 김구 주석 명의의 특행 찬양문을 보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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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득 묘
김정득 선생은 충남 서산군(瑞山郡)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19년 4월 8일 서산군 성연면(聖淵面) 갈현리(葛峴里) 거주 김옥제(金玉濟)는 같은 마을 이종옥(李種玉) 집에서 남명숙(南明淑) 외 수 명에게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김옥제의 권유를 받은 갈현리 주민들은 함께 성왕산(聖旺山) 위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붙잡힌 김정득은 1919년 4월 12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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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정 묘
김상정 선생은 충남 서산(瑞山) 사람으로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유거하던 광무황제가 갑자기 훙거한 소식을 듣고 발상문을 작성하여 면사무소 게시판에 게시하고 훈자서 발상하였다. 동년 3월 23일 서산군 해미면에서 3.1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경들이 민심을 회유한다는 명목으로 면민대회를 개회하였을 때 면민들에게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환기시키고 "불납세(不納稅)는 물론 왜왕의 명령을 맹세코 복종할 수 없다" 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작성하여 조선총독에게 발송하였다. 동년 9월 12일에는 면서기가 왜경을 대동하여 소위 호세고지서(戶稅告知書)를 배부하자 "왜왕 대정(大正)은 한국과는 대대로 원수라 죽어서라도 원수를 갚겠다" 하고 중지 2절을 칼로 끊어 혈서를 써서 조선총독에게 발송하였다. 1921년 9월 12일에는 혹심한 전매령에 항거하여 담배를 재배케 하고 '대한유민(大韓遺民) 김상정 종불굴초(種不屈草)'라는 표시를 만들어 세웠는데, 왜경이 벌채를 명하자 손칼로 좌측 귀를 자르고 더러운 소리를 듣지 않겠다며 혈서로 자신의 의지를 나타냈다. 1937년 2월에는 삭발을 하지 않고 상복을 벗지 않음은 사상이 불온하다고 청양주재소에서 무참히 구타당하여 척추절상으로 종신까지 허리를 쓰지 못하였다. 1946년 1월 1일에는 광복으로 환국한 임시정부는 혈서철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아 김구 주석 명의의 특행 찬양문을 보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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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수 묘
최학수 선생은 충남 서산(瑞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4일 충남 서산군(瑞山郡) 정미면 천의(天宜) 장날을 이용하여 1천여 명의 대호지면(大湖芝面) 면민(面民)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에서 3·1운동의 소식을 접하면서 대호지면의 면민들은 3월 중순부터 만세시위를 계획해 갔다. 평소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에 대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켜가던 면사무소 사환 송재만(宋在萬)이 행동총책을 맡고, 면장 이인정(李寅正), 면내 유지 남계원(南桂原) 등이 만세시위에 참가하면서 3월 19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시위 군중은 경찰 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출동한 일본군과 일경에 의해 송재만·이인정 등의 주동인물이 붙잡히고 말았다. 이후 이들 면민을 다시금 만세시위를 추진하여 이웃 정미면 천의 장날인 4월 4일을 기해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대호지면에서 출발한 이들은 정미면 천의리에 이르러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일본인 순사와 순사보 등을 구타하는 한편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나 서산·당진·공주에서까지 동원된 일본 군경에 의해 이들 만세군중은 해산하고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수백 명의 인사들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4월 24일 서산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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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수 집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를 주도했던 효암 유흥수선생은 1939년 대구사범 9기생으로 재학 중 권쾌복(權快福), 배학보(裵鶴甫), 최영백(崔榮百) 등과 비밀결사 백의단(白衣團)을 조직했으며, 1940년 1월 박효준(朴孝濬), 이태길(李泰吉) 등과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반딧불' 을 제작 배포하였다. 1941년 2월에는 교내활동 뿐만 아니라 타교생 및 사회인까지 조직을 확대하여 다혁당을 결성했다. 유흥수는 다혁당 활동 중 1941년 7월 '반딧불'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피체되었다. 그는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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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후득 기념비
허후득 선생은 충남 서산(瑞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8일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운산면(雲山面) 용현리(龍賢里)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허후득은 나상윤(羅相允)과 함께 1919년 4월 8일 밤 운산면 용현리 정원백(鄭元伯)의 집으로 마을 주민들을 불러모았다. 같은 마을 출신 황군성(黃君成)을 비롯한 주민 50여 명이 여기에 응해 집결하였다. 그 자리에서 만세운동 전개 방법을 논의한 뒤, 그들은 마을에 있는 보현산(普賢山) 위에서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붙잡힌 허후득은 1919년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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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 구 묘
김용환 선생은 충남 서산(瑞山) 사람이다. 1919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김용환은 동 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지원에 주력하였다. 즉 직물업에 종사하면서 종제(從弟)인 정두화(鄭斗和) 등으로부터 6천 6백여 원의 거금을 거두어 동 단의 활동자금으로 제공하였다. 동년 음력 6월에는 당시 중국 항주(杭州)에 거주하던 신규식(申圭植)에게 대동단의 외교사무를 위임토록 하라는 동단의 밀명을 받고 중국 항주로 건너갔으나 불행히 콜레라에 감염되어 항주의 절강병원(浙江病院)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순국하였다. 김용환은 병상에 있어 공무에 지장이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국내의 본가에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을 전개하면서 객지에서 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가 남긴 유묵(遺墨)으로는 그의 일기와 시국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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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서산지회 사적지 표지석
1928년 4월 신간회 서산지회가 창립되었다. 간부는 회장 이원생(李源生), 부회장 이윤기(李潤基), 간사 김영찬(金榮燦)·조석구(趙錫九)·이일순(李一淳)·이순택(李淳澤)·유태열(柳泰烈)·명□수(明□洙)·김원제(金元濟)·박원서(朴元瑞)·신봉균(申鳳均)·이동만(李東萬)·이광훈(李光熏)·송원일(宋源一) 등이었으며 대부분 서산 읍내의 유력 인사들이었다. ‘민족 독립 쟁취’, ‘기회주의 배격’ 등의 강령을 내걸고 창립된 신간회는 일제 강점기 국내에 조직된 민족 운동 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큰 단체였다. 창립 당시 신간회 지부는 전국 141개 지역[회원 수 약 4만 명]에 걸쳐 조직되었으며, 충청남도 지역에는 서산을 포함하여 강경, 공주, 당진, 대전, 부여, 예산, 천안, 홍성 등지에 조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