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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흥 집
양재흥 선생은 충청남도 부여(扶餘) 사람으로 1919년 4월 29일 송기면(宋箕勉)이 주도하여 일으킨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송기면의 지휘아래 신장리 장터에서 2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누비고 다니며 시위하고 있을 때 일본 경찰에 의해 주동자 송기면·유성렬(劉性烈) 등 6명이 경찰출장소로 강제 연행되었다. 이에 그는 고시상(高時相)·김인두(金印斗)·박재엽(朴在燁) 등과 함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경찰출장소로 몰려가서, 창문 유리를 깨고 기물을 파괴하면서 연행당한 동지를 구출하려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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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흥 추모비
애국지사 양재흥 추모비가 위치한 주소지는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 574-5이다. 양재흥 선생은 충청남도 부여(扶餘) 사람으로 1919년 4월 29일 송기면(宋箕勉)이 주도하여 일으킨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송기면의 지휘아래 신장리 장터에서 2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누비고 다니며 시위하고 있을 때 일본 경찰에 의해 주동자 송기면·유성렬(劉性烈) 등 6명이 경찰출장소로 강제 연행되었다. 이에 그는 고시상(高時相)·김인두(金印斗)·박재엽(朴在燁) 등과 함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경찰출장소로 몰려가서, 창문 유리를 깨고 기물을 파괴하면서 연행당한 동지를 구출하려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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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기념비
애국지사 이한구 선생은 충청남도 부여 사람이다. 1906년 5월 17일 홍주 민종식 의병대에 가담하여 선봉장 박영두와 함께 유격장에 임명되었다. 소모장 이사성과 같이 임천.한산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자 임천에 도착했다가 피체되었다. 동년 11월 23일 평리원에서 소위 "정사(政事)를 변경할 목적으로 난을 일으키는 율(律)"로 유형 10년을 받았다. 그 후로도 임천, 한신 등지에서 계속 유격장으로서 본인 재산은 물론 사촌들의 재산까지 모두 정리하여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고 주재소를 습격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불을 지르는 등 다양한 항일운동을 전개하면서 일경의 무력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계속 의병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잡혀 온갖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자 논두렁에 내다 버려지고, 후에 주민들에게 발견되어 투병하다가 어린 처자식들을 남긴 채 바라고 바라던 조국의 독립을 끝내 보지 못하고 절명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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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석 묘
손병석(1904 - 1932)은 충남 부여 사람으로 이명은 손대관(孫大寬)이다. 1926년 6월 서울 피어선기념성경학원에서 개최된 고등보통학교 학생 대표자 회의에 협성 실업학교 대표로 참석하여 6.10 만세 운동 제2차 시위를 계획하다 체포되어 기소유예되어 유공자로 지정되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因山)을 기해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와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 중동학교(中東學校)의 일부 학생 등이 인산 행렬에 격문을 살포하며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당시 현장에서 시위운동을 보고 고무된 손병석은 보다 대규모의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협성실업학교 등 기독교 계통의 학교를 중심으로 제2차 6.10 만세 운동을 계획했다. 그는 각 학교의 간부 10여 명과 피어선성경학원 기숙사에 모여 격문 수만 매를 인쇄하고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6월 16일 경찰에 발각되어 배재고등보통학교 김동진(金東鎭) 등 동지들이 검거되었고, 그도 이어서 체포되었다. 그는 6월 30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는데, 사건의 확대를 우려한 일제 당국이 서둘러 사건을 종료한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4주 간의 유기정학을 당하였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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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금리 애국지사 마을 표지석(임종래)
임종래 선생은 충남 부여군 사람이다. 1928년 2월 부여군 임천면, 충화면에 수리조합(저수지)을 시행하려 하자, 충화면 복금리와 만지리에서 김목현(金穆鉉) 등과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1928년 2월 10일 지주와 주민들이 화합하여 임천면장 임씨에게 수리조합 안한다는 계약서를 요구하고 수리조합 반대 진정서를 군과 도청에 이어 총독부에 제출하였다 .수원지 지질조사 할 때 향리 주민 수백 명이 모여 조사를 못하게 하자 이를 제지하는 임천면장 임씨를 냇물에 집어넣고 폭행, 구타하였다. 이로 인하여 1928년 10월 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요죄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또한 선생은 "일본군 연전 연승의 행진"이라는 신문보도에 대하여 일본군이 중국군과 전투에서 전투마다 패하여 일본군 수십 만 명이 전멸 당하였고, 연합군의 공격으로 일본 비행기와 군함 수백 척이 일시에 전멸당했다는 내용을 전파하다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선생은 1939년 4월 26일 구류되어 동년 5월 9일 금고 8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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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최초독립운동 발원 기념비
기미 3.1운동 때 충남에서 제일 먼저 항일운동을 시작한 충남 최초 독립운동 발원지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비이다. 이 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도내 시, 군으로 전파됨은 부여의 자랑이요 이 마을의 긍지이다. 민족대표 33인이 연서된 독립선언서와 3월 1일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서울 소식을 3월 2일에 전달받고, 바로 박용화 최용철 집에 합숙 멸왜기원 특별기도를 올리고 3월 6일(음력:2월 5일 목요일, 천안아우네장터 만세운동은 음력 3월 1일 화요일 유관순열사 주도) 새벽에 50여 명이 임천헌병대를 향해 출발하여 최후까지 주도하였다. 군중 300여명과 함께 임천헌병대 총칼 앞에 몰려가 "우리 땅은 비워주고 너희들은 물러가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임천읍내는 큰 소요사태가 벌어졌다. 이 운동이 영원이 사장될 처지에서 53년 만에 호가 규암(圭菴)이신 박영규 옹과 장남 박종련 교장께서 찾아내시고 이곳이 충남 최초 독립운동의 발원지임을 알리는 비를 1962. 3. 6 마을 입구에 최초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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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선열의거 추모기념비(추가건립)
1919년 3월 6일 충화면에서 출발하여 임천장터만세운동을 주도한 7인(박성요, 박용화, 최용철, 문재동, 황금채, 황우경, 정동)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영원히 존경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부여군 충화면 팔충리 출신의 규암 박영규선생께서 53주기 의거일인 1972년 3월 6일 이 기념비를 최초 건립하였다. 이후 두 차례 재정비를 거쳐 2016년 4월 27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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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찬복 충의비
윤찬복은 평남 순천(順川) 사람이다. 기독교 전도사로 있던 그는 1919년 음력 8월 평양(平壤)의 예수교신학교 기숙사에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총무 박승명(朴承明)으로부터 향촌회(鄕村會)를 조직할 것을 권유받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최복길(崔福吉)·정찬성(鄭燦成) 등과 함께 동년 음력 10월 9일경 순천군 제현면(濟賢面)의 예수교계열 여학교에서 수십명의 교인들을 중심으로 대한국민회부인향촌회(大韓國民會婦人鄕村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동회의 회장을 맡고 최복길·정찬성은 회계를 담당하였다. 동회는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할 것을 목적으로 회원들로부터 4원씩을 모금한 후 그중 1원은 향촌회의 경비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군자금으로 적립하였다. 이렇게 하여 모금한 160원을 1920년 3월(음력) 임시정부 요원 차경신(車敬信)에게 교부하였다. 동회는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21년 1월 조직이 노출되어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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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기 공훈비
백문기 선생은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일본군 제8637부대에서 동료 3명과 함께 탈출하여 중국군 제4군단 제45사단에 편입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에 편입되어 단기교육을 수료한 후 공작반에 배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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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학 추모비
조병학 선생은 충남 부여 사람으로 1931년 10월 충남 부여에서 협의회 활동에 참여하고 1933년 5월 부여농민구락부연합회를 결성하고 항일의식 고취와 조직 확대에 힘쓰다가 1933년 8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예심 진행중 1935년 3월 1일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40여 일만인 1935년 4월 9일 고문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해당 비석은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984년 부여군이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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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철 추모비
최용철 선생은 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 등이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사실을 전해듣고 3월 6일 아침에 박용화(朴容和)·박성용(朴性堯)·황우경(黃宇京)·황금채(黃金彩) 등과 만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서로 다짐한 후 이날 오후 7시경 부여군 임천읍(林川邑)에서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면사무소와 공립보통학교로 몰려가서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피체되었다. 이해 4월 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5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형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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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 추모비
김영기(金永驥)선생은 충남 부여 출신이다. 1920년에 충남 임시교원양성소를 거쳐 잠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7년에 일본 동경의 대동문화학원에 입학하였다. 동교 졸업 후에는 귀국하여 1930년부터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의 촉탁으로 2년간 근무하면서 중학교용 〈중등교육 조선어〉 및 〈한문독본〉을 편찬하였다. 1932년부터는 대구사범학교의 한문·조선어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는 조선어 시간에 학생들에게 우리의 역사·문화 강의를 통하여 민족적 긍지를 심어주었다. 또한 식민지 통치 하에서 민족 혼을 일깨우는 데에는 문학이 가장 적절하다고 보고, 우리나라의 역대 시조 백수를 뽑아 여기에 주석을 붙여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때 시조의 연대 표시는 단기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민족 교육은 학생들의 황도교육비판·민족정신의 함양으로 연결되었고,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운동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문예부 등 비밀결사의 조직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그의 실질적 지도 아래 이루어졌다. 이 같은 그의 영향은 문예부뿐 아니라 동교의 비밀결사 연구회 다혁당에도 미쳤음을 물론이고 또 1940년 1월에 발간되었던 교양지 〈반딧불〉도 그의 지도 하에서 간행되었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동년 8월 일경에 피체되었고, 그후 6개월 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이때 함께 구속되었던 학생들이 스승의 관련을 부인하며 변명함으로써 그는 1942년 1월에 풀려나왔다. 광복 후 그는 대구사범학교 교장·경북 교육회장 등을 지냈고 서울시 교육위원 문화위원을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