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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세도면 청송리)
조중구(1880-1942)는 1910년 국권침탈 이후 1914년 서간도 합니하(西間島哈泥河)에서 동지들과 광제회(光濟會)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미국 등지에서 발간되는 신한민보(新韓民報)를 국내에 들여와 발행하다가 1915년 초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7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20년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1922년 4월까지 의정원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임시선전원에 임명되어 호북성(湖北省) 등지에 파견되어 선전활동을 했으며, 1922년부터는 중국군에 입대하여 무력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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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구 묘
조중구(1880-1942)는 1910년 국권침탈 이후 1914년 서간도 합니하(西間島哈泥河)에서 동지들과 광제회(光濟會)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미국 등지에서 발간되는 신한민보(新韓民報)를 국내에 들여와 발행하다가 1915년 초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7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20년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1922년 4월까지 의정원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임시선전원에 임명되어 호북성(湖北省) 등지에 파견되어 선전활동을 했으며, 1922년부터는 중국군에 입대하여 무력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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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청년회 독립만세운동 사적비
금계청년회 독립만세운동 사적비는 충남 부여에 위치하였으며, 60여명의 회원이 있었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금계청년회를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김형배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허환을 총무로 임명하여 조직하였고, 야학당을 개설하여 문맹을 퇴치하고 애향심을 고취하였다. 1919년 갓개 장터에서 군중들과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하였고 이후 임천시장, 홍산, 강경, 한산 등지에서 수개월 동안 만세시위운동을 하였다. 특히 허환은 일본 및 대만에 건너가서 지하독립운동을 하였으며, 대만에서 조선인 친우회를 조직하여 독립자금을 거두는 등 활동하다가 1934년 6월 구속되어 고문 끝에 순국하였다. 이후 일경의 방해로 제대로 된 행렬을 하지 못하였고, 군중의 반일감정은 극에 달아 금계청년회원들의 항일시위는 최고조에 다다랐다. 금계청년회는 충청남부에서 최초로 3.1독립만세를 외쳤고 초왕리는 그 진원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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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외산면 문신리)
유창열(1897-1980)은 1920년 추재도의 권유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충남지부 특파원이 되어, 사양면 내 자산가 등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자택에서 추재도와 회합하여 ‘애국사상을 가진 조선인 동포는 마땅히 자기의 생활을 돌보지 않고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자금을 출연(出捐)해야 한다’는 문서를 만들었고, 1920년 12월 중순 추재도 등과 함께 이기춘·이상덕 등을 방문하여 통지서에 기재된 금액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21년 이상덕의 집을 재차 방문했다가 일경에 붙잡혔고,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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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외산면 삼산리)
추교철(1885-1951)의 이명은 추재도(秋載道)이며, 1919년 충남 보령에서 만세시위에 가담하였고, 독립애국단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중이었다.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 모금지령서를 교부받아 자산가들에게 수합활동을 했으며, 유창렬을 동지로 포섭하여 충남지부 특파원으로 임명하고 활동토록 했다. 1920년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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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교철 묘
애국지사 추교철의 묘는 충남 부여에 위치하고 있다. 추교철(1885-1951)의 이명은 추재도이며, 충남 보령에서 3.1운동에 가담하였다. 같은 해 7월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독립애국단을 조직하였고, 유창렬(劉昌烈)을 동지로 포섭하여 임시정부 충남지부 특파원으로 삼았다. 1920년 9월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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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집
박영희(1896-1930)의 이명은 박두희(朴斗熙), 박영섭(朴寧燮), 박장섭(朴章燮)이며, 만주로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의 학도단장을 맡았고, 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대한독립군단, 신민부 조직에도 가입 및 참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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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공적비
박영희(1896-1930)의 이명은 박두희(朴斗熙), 박영섭(朴寧燮), 박장섭(朴章燮)이며, 만주로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의 학도단장을 맡았고, 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대한독립군단, 신민부 조직에도 가입 및 참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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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1919년 3월 6일 박용화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전개된 곳이며, 박용화는 천도교주 손병희의 독립운동 전개 소식을 듣고 결심하였다. 충화면 출신 박성요 선생 등 7명이 서울의 천도교 교인을 통해 비밀리에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임천장터에서 이를 배포했다. 장터에 모여든 군중은 임천면사무소와 보통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부여헌병대 임천분대로 몰려가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그 결과 박용화 등 7명이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충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임천장터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지역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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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손 기념비
김백손(1893-1965)의 이명은 김백순(金伯順)이며, 3.1운동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김영진과 조병채 등이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비밀결사단체인 대한건국단을 조직하였는데, 김백손은 1920년 대한건국단에 합류하게 되었다.충남, 전남, 전북 지방의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집해 북로군정서 김좌진 사령관에게 많은 자금을 전달하였다. 1921년 일경에 붙잡혔고,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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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 기념비
이용철(1891-1961)의 이명은 이중윤(李重胤)이며, 1913년 9월 임병찬, 이용순, 정용규 등 유생이나 의병들에 의해 조직된 독립의군부의 일원으로 1914년 서울에서 김창식, 이기영 등과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일경에 붙잡혔고, 1915년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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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장암면 북고리)
문경섭(1883-1941)과 문장섭(1896-1967)은 1920년 대한독립군정서에 가입하였고 고향인 부여에서 강철구, 김동진, 박길화, 김정제 등과 함께 독립군을 위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일경에 붙잡혔고, 1923년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