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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 (규암면 합송리)
노재철(1889-1961)은 1920년 북로군정서 김좌진에 협력하여 김영진과 충남 및 전북의 부호들에게서 군자금을 조달하고 격문을 배포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출옥 후에는 청장년의 정신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노명우(盧明愚, 1897-1936)는 영명학교 재학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유준석과 함께 공주시장에서 전단을 살포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붙잡혀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30년 금강문인회를 조직하였으며, 1933년에는 부여농민조합연합회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를 조직하고 확대하려했으나 일경에 붙잡혔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노명우(盧命愚, 1915-1972)는 1930년 금강문인회를 조직하였고, 장하리, 중정리 등 각 부락에 야학을 개설하여 농민층 청소년들에게 교육하고 토론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1931년 이호철·유기섭·오기영 등은 사회주의 실천방법의 연구단체로서 비밀결사 공산주의연구협의회를 조직하였으며, 뒤이어 홍산노동조합, 부여농민구락부연합회를 조직하였다. 부여농민조합연합회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를 위장 조직하여 항일 농민운동에 힘쓰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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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 (내산면 금지리)
문재동(1968-미상)의 이명은 문재동(文載東)이며, 황우경, 박성요, 황금채, 박용화, 최용철, 정판동 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을 전해 듣고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6일 오전 7시경, 김종석(金鍾錫)에게 받은 독립선언서를 붙이고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을 하였으며, 군중 다수와 집단을 이루어 임천시장, 면사무소, 공립 보통학교 등지에서 "우리조선은 독립할 것이니 너희들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일경에 붙잡혀 징역 7월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2008년에 대툥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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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 지티봉기 기념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외교권과 주권을 일제에 빼앗긴 우리 민족의 울분과 설움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전국적으로 항일의병(抗日義兵)이 일어났는데, 이곳 홍주의병은 을사늑약 이후 일어난 항일 구국운동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났으며, 대규모 항일 무장투쟁의 시발(始發)이 되었다. 이조참판을 지낸 민종식(閔宗植)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남포성(藍浦城) 전투에서 승리한 뒤 홍주성을 점령하는 큰 전과(戰果)를 올렸으나 많은 의병이 희생되었다.주요 인물로는 안병찬, 채광묵, 박창로, 이용규, 홍순대, 박윤식, 이만직, 성재한 등이 있으며, 300명 이상이 전사하고 8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주요 인물들은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홍주의병 지타봉기는 타 지역 의병봉기에 영향을 끼쳤으며, 1910년대 독립전쟁과 나아가 3·1운동으로까지 인적·사상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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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손 지비
김백손(1893-1965)의 이명은 김백순(金伯順)이며, 3.1운동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김영진과 조병채 등이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비밀결사단체인 대한건국단을 조직하였는데, 김백손은 1920년 대한건국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창호(李昌鎬)·노재철(盧載喆)·김덕제(金悳濟)·김형제(金亨濟) 등과 함께 부여군 석성면(石城面) 현내리(縣內里)·탑동리(塔洞里)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921년 일경에 붙잡혔고,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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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애국지사 추모비
독립운동애국지사 추모비는 의병, 독립군, 3.1만세운동으로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부여의 선열들을 기리기 위해 1983년 11월 세워진 비이다. 해당 사적은 2022년 11월에 새로 지어진 남령공원 내 충의사에 위치한다. 부여군지회에서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독립운동애국지사 추모비를 세워 지금까지 추모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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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
2022년 11월 남령근린공원에 건립된 충의사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국가에 대한 충성과 굳은 절개와 의리·지조를 상징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1983년 11월 부여군지회에서는 독립운동애국지사 추모비를 세워 지금까지 매년 추모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광복회 부여서천연합회지는 부여군지회의 뜻과 정신을 이어받아 2019년 추모각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했고 충의사 준공에 이르게 됐다. 충의사는 총 124분의 위패를 모셨고, 매년 합동 추모제를 지낼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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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선 시비
1919년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1백여 명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행진하였는데,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30여 명의 시위 참여자를 강제 연행해 가자, 군중들은 석방을 요구했고, 그중 향교 직원 권흥규(權興圭)가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자, 일본 헌병은 발포하여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튿날 아침, 운구행렬에 일본 헌병은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최운선(1868-1925)은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이후 고문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4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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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섭 기적비
유기섭(1905-1936)은 조선일부 부여지국 기자와 부여청년회 문예부장을 지냈으며, 대왕의숙을 개설하여 아동에게 한글을 교육하는 등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강성구(姜星求) 등의 동지와 함께 1931년 사회주의 사상 비밀결사 화성당(火星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고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1931년 봄 이호철·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麒泳) 등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농민조합의 조직에 착수하였으나 일경의 취체가 심하여 중단하였다. 이들은 이후 전영철(田泳哲)·강도형(姜道馨)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야학을 개설하고 초등교육을 실시하며, 토론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1933년 부여농민조합연합회(扶餘農民組合聯合會)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大也俱樂部)를 위장·조직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후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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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 기념비
이호철(1901-1971)은 1919년 휘문학교(徽文學校)학생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23년말 일본대학(日本大學)에 재학당시 재일동포를 규합하여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인식시키고 민족정신의 앙양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부락에 농민들을 위한 야학과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농민계몽에 주력하다가 1933년 일경에 붙잡혔으며,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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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독립만세비
이희춘(1926-2008)은 충남 부여(扶餘) 사람으로 1943년 1월 15일 국내 항일단체인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에 가입하여 김종구(金鍾九)·최헌길(崔憲吉)·조동훈(趙東勳) 등 수명의 동지를 만주(滿洲)로 밀파하는 등 국외 독립운동과의 연계투쟁에 힘썼다.그러던 중 1944년 4월 24일 부여 부소산(扶蘇山) 사비루(泗沘樓) 기둥에 혈서로 조선독립만세라는 글을 써붙이고 동지 최을서(崔乙書)와 함께 만세삼창을 외친 후 1주일간 도피하다가 동년 5월 2일 일경에 붙잡혀 대전지방법원 강경지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월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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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부여읍 중정2리)
유기섭(1905-1936)은 조선일보 부여지국 기자와 부여청년회 문예부장을 지냈으며, 대왕의숙을 개설하여 아동에게 한글을 교육하는 등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강성구(姜星求) 등의 동지와 함께 1931년 사회주의 사상 비밀결사 화성당(火星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고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1931년 봄 이호철·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麒泳) 등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농민조합의 조직에 착수하였으나 일경의 취체가 심하여 중단하였다. 이들은 이후 전영철(田泳哲)·강도형(姜道馨)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야학을 개설하고 초등교육을 실시하며, 토론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1933년 부여농민조합연합회(扶餘農民組合聯合會)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大也俱樂部)를 위장·조직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후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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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부여군 세도면)
3.1운동기념비는 강경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부여군 세도면 창영학교 출신의 엄창섭, 고상준, 추병갑, 김종겸, 추성배, 강세형, 윤동안, 정근섭, 서상종, 한규섭 지사의 애국, 애족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2004년 6월 세워졌다. 1919년 3월 5일 전북 익산군 웅포면 대붕암리에 거주하는 군산영명학교 강금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창영학교 선생인 엄창섭, 고상준, 추병갑이 주동이 되고, 김종갑, 추성배, 강세형, 윤동만, 정근섭, 서삼종, 한규섭의 협력을 받아 태극기를 제작하여 3월 10일 오전 10시 강경 봉오재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후 당시 일본인이 가장 많이 살고있는 홍교동을 중심으로 구름같이 몰려드는 동포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참가했던 우리 선열들은 옥고를 치뤘으며, 이 업적은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기에 이 비를 1976년 건립했지만, 노후화로 인해 2004년 재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