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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항일애국지사 추모비
충청남도 보령에 위치한 보령항일애국지사 추모비이다. 추모비에 항일활동에 목숨을 바친 보령 출신의 애국지사들과 그들의 공로를 기술했다. 개항과 함께 밀려오는 일제침략을 막고자 항일 위정척사의 상소를 올렸다가 사형당한 백낙관과 금갑도(전남진도)에 유배당한 황재현,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인 이채우, 정미의병 당시 광복군으로 참여한 성주경, 이종국 등을 나열하면서 그들의 공로를 되새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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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렴산 기미독립만세진원지 유적비
충청남도 보령에 위치한 주렴산 기미독립만세진원지 유적비이다. 주렴산 기미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7일 밤을 기하여 보령 출신 18의사가 항거한 만세운동이다. 서울 배재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종연은 왜경의 감시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온 후, 유림 선배들을 규합하여 4월 16일 장날에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삼엄한 왜경의 감시로 거사를 하루 늦추어 17일 저녁에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4월 18일에는 야룡리 복개봉에서 또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되었으나 동지 대부분이 체포되어 박윤화 홀로 복개봉에 올라 태극기를 꽃고 만세를 불렀다. 체포된 애국지사들은 태형과 온갖 수모를 당했으며, 일생을 불편한 몸으로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의사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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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근 묘
유준근(1860-1920)은 충남 보령 사람으로, 자는 순경(舜卿), 호는 벽서(碧棲), 우록(友鹿)이며 최익현의 문인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납세를 거부하고 을사오적과 일본의 침략행위를 공박하여 투옥되었다. 1906년 5월, 전 참판 민종식이 홍산지치(鴻山支峙)에서 거의하자 그 휘하에 들어가 홍주성을 함락한 뒤 유병장과 참모에 임명되었다. 5월 말 홍주성이 함락될 때 일본군에게 잡혀 무기형을 언도받고 남규진 등 8인의 동지와 함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백관형 등 10여 명과 함께 상경하여 순종의 복위 운동을 꾀하던 중 일본 경찰에 잡혀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에 유림 대표 137인 중 1인으로 서명하였으며, 적극적인 독립투쟁 전개를 역설하였다. 한편, 문집 「마도일기(馬島日記)」는 홍주의진의 활약과 대마도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일기체로 서술한 것으로 의병운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올려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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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구, 강영국, 이명종 추모비
김사구(1879-1948)는 충남 보령 사람으로, 1919년 3월 10일 이병철·고광춘·한기석 등 8명과 함께 보령군 청소면 성연리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할 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해 5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영국(1878-1946)은 충남 보령 사람으로, 1919년 4월 10일 김사구와 함께 군중을 선동하여 시위운동을 하기로 계획하고 신태중의 집에 모인 임경진, 이병철 등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고무하였으나 일경에 붙잡혔다. 그해 5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결국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이명종(1893-1954)은 충남 보령 사람으로, 1919년 3월 6일 충남 홍성군 광천면 광천리에서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였다. 3월 8일에는 큰 글씨로 쓴 선언문 2매를 작성하여 광천장터와 옹암리에 게시하고 주민들을 규합하며 독립선언문 다수를 군중에게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붙잡혔다. 그해 4월 28일에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아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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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묘
1889년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은 부유한 명문대가 였으며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다. 1915년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도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대한광복회 조직이 와해되면서 체포 위기에 처했으나 만주에 있어 체포는 면했다.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김봉환(金鳳煥)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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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국 묘
강영국(1878-1946)은 충남 보령 사람으로, 1919년 4월 10일 김사구와 함께 군중을 선동하여 시위운동을 하기로 계획하고 신태중의 집에 모인 임경진, 이병철 등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고무하였으나 일경에 붙잡혔다. 그해 5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결국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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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구룡면 용당리)
충청남도 부여에 위치한 애국지사마을 표지석 (구룡면 용당리)이다. 박길화(1872-1952)는 충청남도 부여 사람으로, 1912년 향리에서 삼학서원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 대한 민족사상교육에 전념하였다. 강철구와 1920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군정서에 가입하여 총재 서일의 비서역으로 활약하다가 독립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독립공채를 소지하고 입국하여 함북 회령, 청진 및 서울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박길화는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을 적극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강철구에게 전달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에 강철구는 소지하고 있던 모든 공채를 처분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려고 준비하던 중,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탐지되어 동지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따라서 박길화도 1923년 4월,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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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규 생가지비
이용규(1859-1924)는 전라북도 옥구 사람으로, 의병장 민종식이 매부(妹夫)이며, 이남규는 족형(族兄)이다. 민종식과 함께 의거 계획을 의논하던 중, 1906년 6월 을사조약으로 의병운동이 재기하자 민종식, 박창로, 안병찬 등과 논의하여 군사를 모으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홍주 전투에 참가, 전과를 올린 후 체포되어 종신 유형을 받아 1년간 복역하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의병 항쟁을 도모하였으며, 1919년에는 조선 가정부 조직에 충남 대표로 참석하여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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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철 추모비
조병철(1908-1950)은 충청남도 부여 사람으로, 1931년에 이호철(李戶喆)·노명우(盧命愚)·유기섭(柳基燮)·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麒泳) 등과 함께 고향인 부여군 홍산면(鴻山面)에서 사회주의 사상 보급 및 항일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농민조합의 조직에 착수하였으나 일경의 취체가 심하여 중단하였다. 이들은 이후 전영철(田泳哲)·강도형(姜道馨)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마정리, 금송리 등의 각 부락에 야학을 개설하고 농민의 자제들에게 한글·산술 등의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토론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았다. 또한 동년 7월 부락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여 농민조합연합회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를 위장 조직하고 항일농민운동에 힘쓰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피체된 지 3년 만인 1936년 6월 예심에 회부되어 집행유예 5년 형을 언도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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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규암면 외리)
이문용(1891-1962)은 충청남도 부여 사람으로, 이민식, 장응규 등이 1920년 6월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조직한 주비단에 참가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폈다. 이문용은 당시 3백여 석의 소작료를 거두어들이던 부형과 본인과 처 소유의 토지 외에 35간 창고와 8간의 정미소를 매각하여 막대한 대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하였다. 또한 동지 김진억과 함께 부안군 선은리에 거주하는 부호 김승호로부터 천원을 모금하는 등 군자금 모집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경성지방병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고 1924년 6월 15일 만기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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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용, 이문용 집
이순용(1886-1960)은 1919년 4월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태 6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22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이문용(1891-1962)은 상해 임시정부의 지원을 목적으로 조직된 주비단(籌備團)에 참가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폈다. 이문용은 당시 3백여 석의 소작료를 거두어들이던 부형과 본인과 처 소유의 토지 외에 35간의 창고와 8간의 정미소를 매각하여 막대한 대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하였다. 또한 동지 김진억(金鎭億)과 함께 부여군 선은리에 거주하는 부호 김승호(金承鎬)로부터 천원을 모금하는 등 군자금 모집에 앞장섰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1924년 6월 15일 만기 출옥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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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규암면 합송리)
애국지사마을 표지석 (규암면 합송리)은 충남 부여에 위치하였으며, 2021년 11월에 애국지사 이창호와 김형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이창호(1883-1927)는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가했고, 1920년 북로군정서 김좌진의 무장항일투쟁에 협력하여 윤상기, 이치국, 백남식, 윤태병, 김영진, 조병채, 노재철 등과 함께 충남 및 전북 일대에서 군자금을 조달하고 격문을 배포하는 등의 항일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김형제(1888-1945)는 북로군정서 김좌진이 충남지방에 파견한 김영진이 동지를 모을 때, 노재철, 김백순 등과 함께 가담하였고, 충남 지방의 부호들에게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20년 일경에 붙잡혔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