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 검색
TOTAL. 4,004 건
-
대호지 4.4독립만세운동기념탑
대호지 4.4만세운동은 대호지면에서 남주원, 이인정, 송재만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1919년 4월 4일 9시 대호지면 광장에 600여 명이 모여 30자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면장 이인정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문 낭독, 한운석이 작사한 애국자 제창이 있은 다음 행동 총책 송재만의 선서 후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여 천의시장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1,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정미면에서는 가두시위를 계속하며 당진경찰서 소속 왜경들과 대치하였고, 4명이 부상하자 군중이 왜경주재소를 파괴하고 많은 일경들을 생포하여 구타하였다. 이에 사상자가 5명이 발생하였고, 200명 이상이 구속되어 학살되거나 옥고를 치렀다.
-
4.4독립만세운동거리 표지석
대호지 4.4만세운동은 대호지면에서 남주원, 이인정, 송재만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1919년 4월 4일 9시 대호지면 광장에 600여 명이 모여 30자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면장 이인정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문 낭독, 한운석이 작사한 애국자 제창이 있은 다음 행동 총책 송재만의 선서 후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여 천의시장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1,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정미면에서는 가두시위를 계속하며 당진경찰서 소속 왜경들과 대치하였고, 4명이 부상하자 군중이 왜경주재소를 파괴하고 많은 일경들을 생포하여 구타하였다. 이에 사상자가 5명이 발생하였고, 200명 이상이 구속되어 학살되거나 옥고를 치렀다.
-
녹도항일의병 전적비
1907년 8월 해산군인들이 주도한 의병이 봉기했고, 보령과 이웃한 홍주의 분견대도 봉기한 상황에서 이 중 4-5명이 녹도로 들어왔다. 이들은 도적으로부터 녹도의 풍요를 지키며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일본 화물선을 공격하여 주민들에게 쌀과 소금을 나누어주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산의 일본군 수비대 병력 10여 명이 파견되어 와, 의병의 거처를 물었으나 주민들은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다 밤에 일본군의 배가 해안으로 떠밀리자, 의병들은 사격을 가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군산에서 의병 진압을 위해 일본군과 경찰이 녹도로 재차 건너왔으나 주민들은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군은 이장을 살해하자 녹도를 초토화시켰다. 주민들은 잠시 섬을 떠났지만, 다시 돌아와 평화로운 생활을 잇고 있다.
-
백관형 묘
관형(1861-1928)은 충청남도 보령 사람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어난 홍주의병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유림대표 137인 중 1인이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일본 관헌에 체포되자 김일원과 협의하여 33인의 의사를 계승하여 독립할 때까지 투쟁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에 3월 12일 13도 대표자 명의로 "조선 독립은 우리들 이천만의 요구이다. 우리들은 손병희의 후계자로서 조선 독립을 요구한다." 는 취지를 기술한 애원서(哀願書)를 2통 작성하고 1통을 조선 총독에게 가지고 가서 낭독하다가 체포되었다. 그해 11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황재현 항일의병사적비
황재현(1868-1903)은 충남 보령 사람으로, 1896년 유인석의진에 초청받았으며, 동년 2월 아관파천 이후 충남 보령에서 이세영 등과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다. 이들은 180여 명의 민병을 모집하고, 다음 날 홍주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1월 17일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홍주의병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세영은 홀로 홍산으로 빠져나가 2월 남포에서 황재현·이관·김홍제 등과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최상집 항일운동 추모비
최상집(1849-1909)은 보령시 웅천읍 소황리 출신으로 본관이 강릉이고, 자는 중일 호는 남호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최상집은 58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왜병의 반격으로 홍주성이 무너지면서 최상집은 포로가 되어 유준근, 이식, 안항식, 신보균, 신현두, 이상구, 문석환, 남규진 등과 함께 대마도 유배형을 받고 끌려갔다. 그럼에도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으니, 최상집을 비롯한 이들을 '홍주의병 대마도 9의사'라고 한다. 최상집은 몇 번에 걸친 감형이 이루어져 3년 만인 1908년 10월 석방되어 고국에 돌아왔으나, 의병운동의 후유증으로 병이 들어 이듬해인 1909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최상집 묘
최상집(1849-1909)은 보령시 웅천읍 소황리 출신으로 본관이 강릉이고, 자는 중일 호는 남호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최상집은 58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왜병의 반격으로 홍주성이 무너지면서 최상집은 포로가 되어 유준근, 이식, 안항식, 신보균, 신현두, 이상구, 문석환, 남규진 등과 함께 대마도 유배형을 받고 끌려갔다. 그럼에도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으니, 최상집을 비롯한 이들을 '홍주의병 대마도 9의사'라고 한다. 최상집은 몇 번에 걸친 감형이 이루어져 3년 만인 1908년 10월 석방되어 고국에 돌아왔으나, 의병운동의 후유증으로 병이 들어 이듬해인 1909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김정제 묘
김정제는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김동삼이 민족교육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설치하였을 때 총무를 맡아 양규열, 이근호, 채 찬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1920년에는 한족회의 실업 과장이자 상무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에는 대한독립군정서에 가입하여 충청남도 부여 지방에서 강철구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정의부가 조직되자 박정조, 백남준과 함께 재만한인의 생계를 지원하였고, 1926년에는 고활신, 김학선, 김탁, 오대영 등과 함께 정의부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7년에는 김기풍, 김진호, 오동진, 김동삼, 현정경 등과 함께 만주 지방으로 이주한 농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농민호조사를 조직하여 산업상 생산의 증가, 교육 발전, 위생 및 보건의 향상을 위해 힘쓰는 등 지속적인 노력을 이어갔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김광제 사적지
김광제(1866-1920)는 충청남도 보령 사람으로, 1907년 1월 대구에서 광문사(廣文社)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부사장 서상돈 등과 함께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은 큰 호응을 모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대한자강회 강제 해방 후, 독립투사이며 언론인인 신채호, 장지연, 남궁억, 오세창 등과 함께 계몽지 대한협회 회원으로서 구국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크게 활약했다. 1919년 3.1운동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에 3.1운동 일주년을 맞이하여 유학생들과 함께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국내 및 동경의 한국인에게 배포하고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사전에 일제 경찰에 발견되어 체포되었으며, 일인이 독살하였다는 풍설이 있다. 정부는 공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항일 민족시인 7위 추모분향단
충청남도 보령에 위치한 항일 민족시인 7위 추모분향단이다. 이 분향단에 모셔진 시인은 이상화, 한용운, 심연수, 윤동주, 이육사, 김영랑, 오일도이다. 이상화(1901-1943)는 경상북도 대구의 저항 시인으로, 대구고보 재학 시인 1919년 3월 8일 장날을 이용하여 동료와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또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의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를 집필해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 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받고 석방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용운(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불교인이자 저항 시인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 운동을 하다가,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심연수(1918-1945)는 강원도 강릉 출신의 민족시인이다. 부모를 따라 고향을 떠나 연해주로 이주했으나 구소련에 의해 강제로 중국으로 이주하는 등, 정착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어려운 가정 살림에도 불구하고 1941년 일본대학 창작과에 입학하였고, <야업>, <검은 사람>, <과오> 등의 작품을 집필하였다. 1945년 용정으로 귀환하던 중, 일제 앞잡이에 의해 피살되었다. 윤동주(1917-1945)는 함경북도 청진 출신의 저항 시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를 통한 항일민족정신의 기초를 닦았고,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한 후 송몽규 등과 함께 민족정신과 조국의 독립에 대하여 토론하였으며 <서시(序詩)>, <별 헤는 밤>, <무서운 시간>, <또 다른 고향> 등 많은 항일민족시를 발표하면서 우리 민족의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사망하는데, 그의 사망이 복역 중에 정기적으로 맞은 알 수 없는 주사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육사는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저항 시인으로, 본명은 이원록이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하여 일본과 북경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잠시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좌, 3년 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1935년부터 이육사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는데, <황혼>, <청포도>, <광야>, <절정> 등의 작품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43년 4월에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 중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랑(1902-1950)은 전라남도 강진 출신의 저항 시인으로, 본명은 김윤식이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강진으로 내려왔다. 자택에서 김현상 등 동료와 정세를 논의하고 강진에서도 독립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으나, 이들의 준비와 계획이 강진경찰서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공소를 제기한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1930년대에는 <독(毒)을 차고>, <가야금>, <달마지>, <춘향> 등 다수의 민족적인 시를 발표하여 항일의식을 표출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오일도(1901-1946)는 경상북도 영양 출신의 민족시인으로, 본명은 오희병이다. 1922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강습소에서 수학한 다음 릿쿄대학 철학부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하였다. 귀국 후 1년 동안 근화학교에서 무보수 교사로 근무하다 맏형으로부터 사재(私財)를 얻어 1935년 2월 시 전문잡지 『시원(詩苑)』을 창간하였다. 그러나 『시원』은 5호 만에 발행이 중단되었고, 광복 후 상경하여 문학 활동을 재개하면서 『시원』의 복간을 도모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울한 심정으로 폭음을 계속하다 간경화증으로 사망하였다.
-
주렴산 기미독립운동
충청남도 보령에 위치한 주렴산 기미독립운동 안내판이다. 주렴산 기미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7일 밤을 기하여 보령 출신 18의사가 항거한 만세운동이다. 서울 배재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종연은 왜경의 감시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온 후, 유림 선배들을 규합하여 4월 16일 장날에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삼엄한 왜경의 감시로 거사를 하루 늦추어 17일 저녁에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4월 18일에는 야룡리 복개봉에서 또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되었으나 동지 대부분이 체포되어 박윤화 홀로 복개봉에 올라 태극기를 꽃고 만세를 불렀다. 체포된 애국지사들은 태형과 온갖 수모를 당했으며, 일생을 불편한 몸으로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의사들이 많았다.
-
3.1항일지사의거추모비
충청남도 보령에 위치한 3.1운동기념비이다. 주렴산 기미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7일 밤을 기하여 보령 출신 18의사가 항거한 만세운동이다. 서울 배재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종연은 왜경의 감시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온 후, 유림 선배들을 규합하여 4월 16일 장날에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삼엄한 왜경의 감시로 거사를 하루 늦추어 17일 저녁에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4월 18일에는 야룡리 복개봉에서 또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되었으나 동지 대부분이 체포되어 박윤화 홀로 복개봉에 올라 태극기를 꽃고 만세를 불렀다. 체포된 애국지사들은 태형과 온갖 수모를 당했으며, 일생을 불편한 몸으로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의사들이 많았다.